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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마음 (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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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예수의 마음
성경말씀 : 빌립보서 2:1-11


예수 믿는 사람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 호칭은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이 붙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초대교회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붙인 이름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 이름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붙여준 것입니다. 이는 초창기의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사는데 힘썼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해야 합니다. 만약에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여러 면에서 부족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를 닮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있어야 하고 나름대로 힘쓰고 애쓰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내용적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나 행동은 마음의 생각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우리의 말과 행동에 교만함이 나타납니다. 마음에 추한 생각을 품으면 말과 행동 역시 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을 뜻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예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겸손이란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를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항상 자기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높입니다. 내 의견을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존중하고 먼저 양보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 못지않게 지혜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도 겸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어도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달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겸손하신 분은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갖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位)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에는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 계시하신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자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 곧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이보다 더한 겸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셔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히 자기를 낮추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고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다가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없이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기에 우리가 죄 사함과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주님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겸손히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이 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누구 할 것 없이 본능적으로 교만한 기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린 비장의 무기가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사단의 하수인인 뱀이 하와에게 다가가서 던진 말은 “너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힌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함으로 둘 다 타락했습니다. 지음 받은 존재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니 얼마나 교만한 생각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교만해진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평생도록 땀 흘려 수고하며 살다가 죽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에 처하셨습니다.

오늘날도 교만은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고 했습니다. 교만한 생각은 곧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다툼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은 교회의 덕을 깰 뿐 아니라, 교만한 사람 자신에게도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신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이 이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화목한 믿음의 공동체로서 성장해 왔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의 지체인 우리 각 사람이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 말씀처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일을 본받아 행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이치로 볼 때에는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이 도리지만 주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연조가 오랠수록, 직분이 중할수록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다른 형제들을 섬기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차이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의 마음은 곧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 행하심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에 덕을 세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실 뿐 아니라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고 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를 친구로 여겨주셨으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목숨을 가장 소중하게 여깁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온 천하를 준다한들 자기 목숨과 바꿀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줄 믿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사랑입니다. 거의 모든 문학과 노래와 연극과 영화의 주제가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족할만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결핍 상태에서 허덕입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뇨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뿐일세“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음성으로 저들을 부르건만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에는 귀를 막고 감각적이고 찰나적이고 정욕적인 사랑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신 이웃들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저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이 한 둘이 아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한없이 큰 사랑을 받았으므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만, 불신 이웃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므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알기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지만 불신 이웃들은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3장 16절에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만 특별히 믿는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신기한 것은, 사랑하면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곰보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속담이 있는데 맞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세리들이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하면서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셨습니다. 그들이 초대하는 식탁에 함께 앉으셔서 음식을 드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용납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은 배척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에는 사랑이 넘쳤으나 바리새인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나 공로가 없지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자격을 따지지 않고 거저 주는 사랑입니다. 사실상 사람으로서 아가페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실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내 마음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지만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여쭙기를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본받아 형제들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온유하다 함은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 총독 앞에서 당당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저는 역사상 예수님처럼 용기 있는 분은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용기와 온유는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알고 있지만 사실은 온유한 사람이 진정한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고, 오 리를 가자고 요구하는 자에게 십 리를 함께 가주는 용기는 온유한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시니 저희가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이에 일어나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그러자 저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기를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셨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살기등등해서 이 여자를 거칠게 끌고 왔습니다. 여자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부드러운 구석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불쌍히 보시고 친절하게 대우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따뜻하고 부드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에게조차 친절하게 대우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들이 보낸 하속들이 들이닥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시몬 베드로가 칼을 빼어 휘둘러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한쪽 귀를 베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눅 22:).

대제사장의 바깥뜰까지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심문받으시는 광경을 바라보았던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22절 이하에서 이같이 증언했습니다.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온유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하고 완악해졌습니다. 조급하고 참을 줄을 모르고 사납습니다. 친한 사람에게는 친절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친절합니다. 자칫하면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세상 풍조에 따라서 행하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언급하신 땅은 장차 주님께서 만드실 새 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온유한 자가 영원한 새 땅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본받아서 가시는 곳마다 따뜻한 인정이 넘치는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예수의 마음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천국을 떠나 이 땅에 오신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 어느 안식일에 평소에 하시던 대로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사람들 앞에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그것은 이사야서 61장의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죄와 마귀와 인습과 질병에 포로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으며, 죄인들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냥 말씀으로만 하셔서 문둥병을 고치지 아니하시고 왜 불결한 문둥병자의 몸에 친히 손을 대셨을까요?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 주님의 긍휼하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또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마태는 즉시로 세관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 날 저녁에 마태의 집에서는 주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마태가 세리였으므로 자연히 손님 중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이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나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1)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요 들은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고서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의 마음이 없이 행하는 우리의 겸손과 사랑과 온유와 긍휼은 하나같이 위선에 불과합니다. 언젠가는 도금한 것이 벗겨져서 추한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래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행하심으로 여러분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며, 세인들로부터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다르다는 칭송을 듣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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