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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눔의 삶 / 고후 9: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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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의 삶

본문 : 고린도후서 9:6∼12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8절)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모든 것을 넘치게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지내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12편 9절을 인용한 고린도후서 9장 9절을 보면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후히 뿌려주시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 구조의 심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주거의 목적만을 가져야 할 주택이 투기의 대상으로 바뀐지 오래고 자신들의 집값을 유지하기 위해 입주민들이 담합하기도 합니다. 계층간 반목 현상은 이미 사회병리 현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는 점점 분열되고 있습니다.
진정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되려면 서로 절제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의 교우들을 돕는 데 열성인 점을 칭찬하는 부분입니다. 많이 나눠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억지로 구제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희사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는 모두 요단 강물을 받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받은 것을 끊임없이 흘려보내기 때문에 땅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사해는 받기만 할 뿐 흘러나갈 곳이 없기 때문에 죽음의 바다가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눠줄 것을 마련해 주시고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 풍성하게 하십니다. 가진 것을 나누면 언제나 부요하게 되어 아낌없이 남을 또 도울 수 있고 이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11절)입니다. 성도는 착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해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복을 구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강변한다면 하나님께선 전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늘 나눌 것을 생각하고 이로 인해 기쁨과 행복의 열매를 맺길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누는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왜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눅18:22, 느8:10)
'낮은 울타리' 라는 월간지에 실린 글입니다.
손님, 어떤 빵을 찾고 계십니까?"
벌써 이십 분째, 물건은 안 사고 진열된 빵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청년에게 편의점 주인은 참다못해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하는 말이란.
"유통기한을 봤어요. 혹시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진열하지 않았나 해서..."
"몇 개는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지만 안심하고 드셔도 좋을 빵만 있습니다."
"그렇군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 있는 청년은 언뜻 보기에도 지저분했습니다.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몸에선 이상한 냄새가 났지만 주인은 그런 청년을 내쫓지 않았습니다. 자정 무렵이 되자 청년은 조심스레 빵 하나를 집어 진열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곤 시계가 열두 시를 막 넘어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그 빵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가더니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힘이 없는지 얼마 못 가 털썩 주저앉는 청년의 어깨 위로 잠시 후 누군가의 손이 다가왔지요. 돌아보니 놀랍게도 편의점 주인이었습니다. 당황한 청년은 들고 있던 빵을 서둘러 내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해 훔쳤습니다. 이 빵은 자정이 넘었기 때문에 유통기한이 지난 거예요."
그러자 편의점 주인은 주머니에서 우유를 꺼내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없으니 이것과 함께 천천히 들게나."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
둘째,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라면'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초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뒤 나는 농사꾼으로 남길 바라는 아버지께 혼자 일하면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무일푼으로 이곳 저곳 골목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때 작고 허름한 인쇄소 앞에서 만난 김씨 아저씨가 내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인쇄소에서 일하거라. 나중에 돈이 모아지면 야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마" 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부터 나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찬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자면서 아저씨의 인쇄소에서 일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 월급을 받았을 때 나는 라면 한 상자를 사다놓고 나머지는 몽땅 저금했습니다. 신이 나서 일하는 동안 또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라면상자에 손을 넣어보니 라면이 두 개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개를 꺼냈는데 다음날 신기하게도 라면 두 개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 분명히 어제 하나를 끓여 먹었는데...."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하나를 꺼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도 여전히 라면은 두 개였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라면 한 상자를 한 달이 넘게 먹은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일부러 하루 종일 라면 상자가 있는 쪽에서 일했다. 퇴근 무렵 김씨 아저씨가 나를 불러 가게에 갔다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시기에 인쇄소밖에 나와 유리창 너머로 슬쩍 라면 상자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아저씨가 라면상자 쪽으로 걸어가더니 품속에서 라면 한 개를 꺼내 상자 속에 집어넣고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걸어나오셨습니다. 어린 사 남매와 병든 아내와 함께 월세 단칸방에 살고 계시다는 김씨 아저씨........나는 그 날 아저씨의 심부름도 잊은 채 인쇄소 옆 골목에 쭈구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셋째, 나눔의 삶이 지혜로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처가 운영하는 아프리카의 랑바레네 병원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미모의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리안 프레밍거. 헝가리 귀족의 딸로 태어난 그는 모든 악기의 연주에 능했으며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배우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던 그녀는 어느 날, 슈바이처의 찬송가 연주를 듣고 결심했습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허상일 뿐이었다. 남을 위한 삶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 이에 프레밍거는 그 자리에서 아프리카 행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슈바이처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흑인 병자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프레밍거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남을 위한 삶이 이렇게 행복한 것을…”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질을 땅에 쌓아두지 않습니다. 하늘에 쌓아둡니다. 나누어주고, 베풂으로써 덕으로 재산을 늘려갑니다. 개인의 유익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 얻어지는 큰 축복의 길을 아는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자녀는 부모가 뿌린 덕의 씨앗이 열매맺어 일생에 두고두고 필요한 자원이 됩니다. 그러나 죄인은 스스로를 위해서 재물을 땅에 쌓아둡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 금은보화를 가져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 13:22)
넷째, 나눔의 삶이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책에 실린 글입니다. 우리 집 근처에는 허름한 옷차림에 늘 아이를 업고서 붕어빵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다른데 보다 굽는 속도도 느리고 맛도 좀 떨어지지만 동네에서 늦게까지 하는 곳은 그곳 뿐이라 나는 가끔 그곳에 들러 야참거리를 사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어머니 친구 분들이 놀러와 말씀 나누시는 도중에 우연히 그 붕어빵 아주머니의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 아주머니는 결혼해 행복하게 잘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남편이 심장병으로 죽으면서 남편의 부하직원에게 교묘한 방법으로 모든 재산을 가로채였다는 것입니다. 그 사연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다른 붕어빵 장사가 보여도 먹고 싶은 걸 꾹 참았다가 일부러 집 근처 그 붕어빵 아주머니께 들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열한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행색이 남루해 꼭 거지처럼 보이는 아이들 여럿이 그 붕어빵 아주머니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그 애들과 정답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슬쩍 다가갔더니 아주머니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건 팔다 남은 붕어빵밖에 없지만. 가슴만은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구나. 비록 지금은 너희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회에 악을 끼치면 안 된단다. 너희들도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그러자 마냥 맛있게 붕어빵을 먹던 꼬마들이 갑자기 꼬깃꼬깃하게 접힌 천 원짜리와 십 원,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때까지 아주머니가 주신 붕어빵과 사랑에 대한 보답이에요." 순간 나는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차마 그 앞으로 나서서 붕어빵을 살수가 없었습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가난한 자에게 옷과 먹을 것을 나누어 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눅3:11)
다섯째,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른 인생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씨들' 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네 자매에게는 아주 행복한 아침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자기들의 음식을 가엾은 이웃에게 주고 마른 빵과 우유만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그 날 아침, 이 자매들보다 더 기분 좋은 사람들은 그 도시 전체에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혼자서 배불리 먹고 남는 것을 주는 것은 진정한 나눔이 아닙니다. 사랑을 나눠주는 기쁨은 그것을 실천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지요. 인생은 나눔입니다. 필요한 물건 뿐 아니라 겉옷과 속옷, 슬픔과 기쁨,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인생이고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 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11:2)
여섯째, 나눔을 실천할 때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가 기쁨과 부요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요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삶이 나그네와 만남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남이 실제적이 되려면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음식과 선물을 나누며 슬픔과 기쁨을 나눌 때 그 만남은 진해지고 깊어지고 뜨거워집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소유적이고 탐욕적입니다. 그래서 불행해집니다.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나눔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나눔을 실천할 때 피차 사랑과 기쁨과 부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서로 ‘나눠주는’ 일을 잘했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서로 나누었고 겉옷과 속옷을 나누었으며 슬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도르가의 구제와 고넬료의 구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했던 빌립보 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도 나눔과 참예였습니다. “너희가 내 고난에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빌 4:14∼6, 고후 8:4).
일곱째, 나누어 줄 때 더욱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참 역설적인 것입니다. 남에게 많이 나눠줄수록 자신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뭐든 풍요롭다 보면 남한테 많이 줄 수는 있지만 많이 나눠주다 보면 생기는 게 또 풍요로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에서나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나누면 줄지 않고 더 많아집니다. 바닥이 나지 않고 더 채워집니다. 그것이 나눔의 역설이며 나눔의 신비입니다. 게다가 보너스까지 얻게 됩니다. 넘치는 감사와 기쁨, 마음의 행복과 평화, 풍요로움과 따뜻함, 주변과의 관계 회복 등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7장 34- 44절에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이 나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큰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굶주린 무리들을 위하여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 기적으로 인하여 5000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작은 소년의 나눔의 정신이 놀라운 기적과 풍요가 나타난 역사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여덟째. 베푸는 자에게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에“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하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베풀기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집 앞에 앉았는데 사람 셋이 그 의 집 앞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는 달려나가서 그들을 맞이하고 귀하게 준비한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그 세 사람은 하나님께서 천사 2명과 함께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아브라함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나서 그에게 두 가지의 복을 베풀었습니다.
1)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의 아내 사라가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능치 못하심이 있겠는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돔, 고모라 도시가 죄악이 너무 많아 그곳을 심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생각났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심판 받으면 거기에 살고 있는 조카도 더불어 심판 받을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 50명이 있어도 심판하실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거기에 의인 50인이 있을 것임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점점 숫자를 줄여가며 하나님께 “그래도 용서해주실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45명, 40명, 30명, 20명, 결국 10명까지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은 10명만 있어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당했습니다.
고넬료가 복 받은 것은 베푸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가 파송한 이달리야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여 하나님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① 그는 경건했습니다. 삶이 칭찬 받았다는 것입니다.
②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정치가로서 인기를 얻기 위한 전술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진실한 성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전 가족의 복음화였습니다.
③ 그는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필요할 때만 기도한 것이 아니고 항상 기도한 것입니다. 생활 전체가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④ 그는 많은 백성에게 구제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제를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청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는 경건한 종을 보내어 베드로를 초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집에 들어 왔을 때 그는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맞이했습니다. 겸손한 모습입니다. 주의 종을 모시는데 세상적인 명예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을 때 성령께서 그들 가정에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런 후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베풀기를 좋아한 고넬료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성령세례 먼저 받고 물세례를 받는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나눔의 생애였습니다. 주님은 진리도 지혜도 사랑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눔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이해인 시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 우리의 날들은 어찌 이리 소유를 위해서만 숨이 차게 바쁜지 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하게 하소서. 진정 당신 안에서가 아니면 나눔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신이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신 대로 아낌없이 모든 것 내어 주고도 한 끝의 후회가 없는 너그럽고 순수한 마음을 주소서."
나눔은 소유의 많음에 있기보다 존재의 넉넉함에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 내면의 충만을 누리는 자만이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눔은 물질의 과다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입니다. 나눔은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항상 나눌 것이 있습니다. 주고 또 주고도 줄 것이 남는 연인들의 마음처럼, 더 주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나눔은 생명의 원리입니다. 나눔은 희생으로 시작되지만 풍성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기쁨은 나눌 때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눌 때 그 슬픔이 절감이 됩니다. 깊은 샘물을 퍼내면 퍼낼수록 맑은 물이 올라오듯이, 우리의 삶은 나눔으로 더 풍성해집니다.
여기 계신 성도 여러분 모두가 나눔의 삶을 살므로 그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잘했다 칭찬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세상의 모든 것들의 주인 되신 하나님!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내 것 인양 허세와 오만을 부렸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나로 하여금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 것임을 날마다 시인하며 나로 드려지게 하소서. 늘 이웃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생활을 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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