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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하나님 (렘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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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의 하나님
본문 : 렘 31:1-6

주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을 갖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구주대망 2004년 한달이 이제 지나가고 오늘 2월 첫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무척 춥던 날씨는 풀렸으나 마음들은 아직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해 들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는 시간들을 집중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지난주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살폈습니다. 오늘은 사랑의 하나님을 살피려고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만큼 진부한 제목도 없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시길 소원합니다.

사람들은 사랑받고자하는 심층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다오”라고 내면에서는 소리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이고 인간의 심연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면 늘 들어온 말이라고 느끼지만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소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 하면 아주 시적인 것이나 감상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랑이란 현실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듣는 것은 감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 동참한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는 모두가 다릅니다. 정말 오늘 난생 처음 예배의 자리에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진리를 찾는 구도자로서 여기에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신앙세계가 실제적인 것인지를 알고자, 진리의 답을 알고자 애쓰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을 위해서 드릴 말씀은 한 마디로 하나님은 지금 모습 그대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의 자리에 들어오시긴 하셨지만 바로 붙잡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긴 하는데 자신이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지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아직도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깊숙이 사랑하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 구도자도 아니고 몸부림치는 수준도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가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잊고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름을 당신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구약에 성막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어 있는 흉배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 흉배는 12보석이 달려 있고 보석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입고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신 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그렇게 당신의 가슴에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어디에 이르렀든지 상관없이 오늘 말씀을 듣고 이 자리를 떠날 때는 이 자리를 찾아 나온 것과 같은 상태의 사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정서적인 감동보다는 인격적인 감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굶주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육수준은 높아졌지만 세상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살벌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굶주린 세상에 대한 대답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신간서적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세미나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국회에서 새로운 법령을 통해서, 아니면 새로운 상품을 통해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랑에 굶주린 세상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선포합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31:3) 그 옛날 이스라엘을 인도한 사랑이 바로 오늘 우리를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합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한결같은 사랑을 너에게 베푼다.” “나는 늘 너를 사랑하였다. 나는 맨 첫날이나 오늘이나 똑같이 네게 변함없는 사랑을 지니고 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올 들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심층적인 욕구를 채우시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욕구는 물질이 아닙니다. 성공도 아닙니다. 명성도 아닙니다. 새로운 직업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욕구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성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이 사랑은 신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얻고자 온갖 몸부림을 치고 여러 가지 사랑의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사랑을 얻고 싶어서 우리는 성공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사랑을 얻고 싶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다못해 아이들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고 듭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동정을 통해서도 사랑을 누리려고 듭니다. 아니면 승진을 통해서도 사랑받기를 추구합니다. 높아지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할거라고 상상합니다.

때로는 신체적인 접촉을 사랑과 동일시합니다. 성적인 관계를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휴가와 쾌락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소유가 사랑을 얻는 수단이 될 것처럼 여깁니다. 아이들은 문제를 일으키므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일시적이고 일시적인 형태의 사랑일 뿐입니다. 일시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가치, 일시적인 환영, 일시적인 인정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만 사랑에 대한 더 심각한 갈망만 일으킬 뿐입니다.

소금물은 해갈시키지 않습니다. 더 심한 갈증을 불러일으킬 따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무궁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바울은 지금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하듯이 에베소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장,광,고,심 즉,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고 넓으며, 얼마나 깊고 높은가를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도 커서 그 끝을 볼 수도 없고 또 그 사랑을 다 헤아릴 수도 없음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에베소 성도들도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며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할 만큼 넓으며 우리의 모든 고통과 절망을 헤아릴 만큼 깊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셨습니까? 여러분 개인의 삶에서 경험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좋은 날들도, 나쁜 날들도 하나님은 받아주시며 사랑합니다.

신앙인은 이 하나님을 사랑을 알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신앙의 형제들에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저는 성도님들을 만날 때 어떤 경우로 만나든지 늘 질문하는 것은 거의 동일합니다. 언제 첫발을 교회 디뎠습니까? 언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덧붙여서 성경은 몇 번쯤 읽어 보셨습니까?

목회가 참 쉬운 것 같아요. 세 가지만 물으면 상대방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대체로 다 알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그 큰 하나님의 사랑에 휩싸이고 나면 우리는 부족함을 더 이상 느끼질 않습니다. 언제나 만족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우리 삶의 감동과 열정, 만족과 감격을 가져갑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입니다. 신약에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10:11, 표준새번역)

양이란 어떤 동물인지 사실 우리는 잘 모릅니다. 사진으로만 보면 괜찮은 동물처럼 보입니다. 털도 하얗고 보송보송해 보입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그 실체를 압니다. 세상에 양처럼 고집 세고 미련한 가축도 잘 없습니다. 동시에 멍청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주위가 산만해서 제 마음대로 가 버립니다. 가면 간 길로 다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주인에게로 잘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은 곁길로는 갈 줄 아는데 돌아오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아이큐가 따라 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우리를 양에 비유하는 것 때문에 대단히 자존심 상한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의 실체가 특별히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새 탁구를 하는데 탁구공을 기계가 쏴 주면 내가 칩니다. 그런데 속도가 정확하게 날아오기 때문에 친 공이 잘못 떨어졌다고 해서 지나간 공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게 되면 새로 날아오는 공을 놓칩니다. 그런데도 지나간 공에 대해서, 실패한 공에 대해서 빨리 포기를 못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회를 또 놓칩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어리석고 고집 센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깐 5년마다 대선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더라구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는 올해 56세입니다. 제가 선거권 얻고 나서 4년, 5년마다 계속 투표해 왔는데 투표 할 때마다 기대를 가졌죠. 그러나 수십년동안 아직도 그 기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쯤 포기해야 되는데 놀랍게도 아직도 누굴 찍을까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거든요.

정말 멍청하기가 이를데 없고 고집 세기가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한시도 관심을 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양과 같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1. 하나님은 우리 실체를 아시고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그 위대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요10:14)라고 밝힙니다. 아시는데도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알면 돌아설까 싶어서 우리는 예쁘게도 꾸미고 가진 것처럼, 아는 것처럼 처신해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발버둥치는데 하나님은 훤히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보고 “야, 너 입 좀 열어봐”해서 입 속을 들여다  봐야 속을 아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아실까?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하실까? 내가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지 정말 기억이나 하고 계실까? 그럽니다. 그런 여러분의 불신앙은 왜 늘어갑니까? 담임 목사가 날 잘 모르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우리 집사님들이 “목사님, 절 아세요?” 하는 질문을 가끔 합니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반장을 왜 한번도 못해 봤을까 하고 늘 아쉬워합니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60명은 기억할 용량은 가졌을텐데. 내가 해본 줄반장은 12명-14명은 끝이 나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하고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내 문제에 뭐 그렇게 신경을 쓰실까?’ 신경을 쓰신다니까요.

성경대로 얘기를 해줘도 ‘에이, 설마 하나님께서 내 문제에 그렇게 세세한 관심을 가지랴’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너희 머리카락도 다 세고 계신다.”(마10:30, 표준새번역).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일에 세밀하고 자상하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여러분을 잊어버리고 무시하여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시인은 노래합니다. “여호와 어지시어 삼라만상을 아끼시며 주께서 손수 지어내신 모든 것에 극진한 사랑을 베푸시도다.”(시145:9, 현대어성경) 아, 이렇게 시를 읊을 수 없다고 하면 읊어 놓은 시라도 읽으면서 감동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리는 참 딱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바쁘긴 바쁘지만 어떨 때 보면 신문의 요만한 코너에 시들이 실리는데 그것조차 한번, 1분이면 충분히 읽어 볼 수 있는 분량인데도 이것을 읽지 않고 지나갈 때가 있더라고요.

“여호와 어지시어 삼라만상을 아끼시며 주께서 손수 지어내신 모든 것에 극진한 사랑을 베푸시도다” 왜 삼라만상을 아끼시고 극진한 사랑을 베푸십니까? 당신이 지으셨기 때문에. 지음 받은 만물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며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은 그의 극진한 보살핌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리의 반항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마치 세상에서 우리가 유일한 존재인 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그처럼 끊어 버리고 세상을 떠날 때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유한한 두뇌로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 상상도 경험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감탄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세상을 지은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우리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것을 다 믿기가 힘들죠. 죽기 전까지 몇 번씩이나 바뀌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불변하십니다.

젊은 아빠 여러분은 비디오카메라로 여러분의 아이의 영상을 담아보셨습니까? 어쩌면 아이의 모습을 줌인으로 확대해서 계속해서 그 아이의 움직임을 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식을 찍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찍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를 않습니까? 여러분은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만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 대해서 줌인해서 여러분의 모습 한사람, 한사람을 다 살핍니다. 오늘 처음 오셨습니까? 군중 속에서 숨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호하심으로 들어납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양떼를 보살피듯이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그러나 현대인 성경은 더 실감나게 번역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늘 여러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벧전5:7 현대어성경)

여러분 연애를 해 보셨습니까? 연애도 할 때는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잘 이해를 할 수가 있어요. 연애를 해 보시면 그 사람 생각에 항상 사로 잡혀 있습니다. 늘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 하신다니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만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무슨 일이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세상을 살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과 저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더 더욱 염려할 것이 아주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서는 지금도 힘들어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날 좀 건져주십시오. 절망 가운데 있습니다. 문제와 고통이 너무 큽니다. 살림이 너무 어렵고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 곁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돕기에 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베푸시길 기뻐하시는 분이시라고 지난 주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에 능하신 분이시오 도와주길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인은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주의 자비하심을 나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십시오.”(시40:11) 다른 번역은 이렇게 마지막 구절을 표현합니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당신의 사랑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시인의 처지와 비슷합니까?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재앙이 나를 에워쌌고, 나의 죄가 나를 덮쳤습니다. 눈앞이 캄캄합니다. 나의 죄가 내 머리털보다도 더 많기에, 내가 낙심하였습니다.”(시40:12 표준새번역)

여러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재앙이 나를 덮치고 내 죄가 나를 휩싸고 있어도, 눈앞이 캄캄하고 죄가 머리털보다도 더 많아도 희망을 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당신의 사랑에 있습니다. “옛부터 하나님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고, 그 영원한 팔로 여러분을 떠받쳐 주십니다. 여러분이 진격할 때에 여러분의 원수를 쫓아내시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신33: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 분 안에서 안전을 맛보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하신 분이 누구신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앞서 행하시고 여러분을 따라서 가십니다. 엄청난 일들이 터지는 세상에서도 안도와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그렇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3.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선한 목자처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규정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하나님의 아들의 정의가 바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인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시길 즐겨 하십니다. 여러분을 더 성숙한 수준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살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느끼십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건강한 신앙인은 하늘 아버지의 인도를 체험하면서 그것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릴 향해서 나쁜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오늘의 평안과 내일의 희망입니다.

그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자들이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사랑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셔야 됩니까?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1. 무엇보다 먼저 그 사랑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물과 같습니다. 주면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우리는 선물 받기를 참 주저하고 망설입니다. 안 받는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는 뭐 이런 것을 주느냐고 하면서 차떼기로 줘도 다 받더라고요. 나는 유교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살겁니다. 저는 기쁘면 찬양하고 어려우면 기도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저에게 선물을 주면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한번 실험해 보세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하면 그 큰 사랑을 설명하면 할수록 하는 말이 “저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반응합니다. 그 말은 맞아요. 우리 모두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소식이 바로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을 제하면 소돔과 고모라 같은 폐허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용서의 범위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난 도대체 저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다른 사람이 여러분 보고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8절은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 받아들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여러분 위해 생명을 주신 그 분을,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습니다.

주님이 자기 땅 유대나라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지금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하나님께서는 주십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시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행세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반응을 기다리십니다. 새롭게 시작해 보십시오.

신정 한번 구정 한번, 설을 두 번이나 쐬었는데 아직도 새롭게 시작하지 못합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그 성숙한 모습을 닮아서 한 걸음씩 나아가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다음 도전을 들어보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언제나 계속 채워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히 솟아나는 우물물과 같다면 우리의 사랑은 그 우물물을 퍼 담는 두레박과 같습니다. 퍼 가지고 오는 물은 금새 바닥이 나더라고요. 여러분 이번 겨울에 추워서 수돗물이 얼어붙어 며칠동안 물을 길러서 써 본 분이 있습니까?

저도 언젠가부터 방안에 있는 화장실 물이 안나오더라고요. 그때 미련하게 물이 안 나오면 사용을 안해야 되는데 왜 씁니까? 급하니깐 물이 안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는 또 사용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냄새가 나니까 물을 길러 와서 부어야 됩니다. 그러고는 또 실수하고. 그래서 나중에는 스카치테이프로 발라 버렸어요. 미련한데는 약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길러 와서 쓰는 물은 금새 바닥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주일날 한번 은혜 받은 말씀으로 한 주간 살려고 생각을 하십니까? 한 양동이의 물로 한 주간 살려고 해보세요, 되는가. 그래서 제가 매일 성경 읽으려고 합니다. 복 있는 사람 3천원이면, 하루 50원 투자하면 두 달 복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데 비타민 C보다 훨씬 싼데도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까?

주일날 한번 말씀 들은 것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엄청난 믿음을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연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데도 계속해서 잘 살기는 살더군요.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그냥 연명만 하지 마시고 성경도 통독하시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채워가야만 합니다.

저는 요즈음 기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일어나서 바로 더운 물에 온몸을 담그면 잠이 아무리 와도 뜨거운 물속에서 계속 졸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졸음을 쫓고 나서 컴퓨터에서 <내가 사랑하는 책>이라는 성경의 본문을 긁어서 내 큐티 창에다 다시 띄워놓고 한 구절 한 구절 살펴보면서 어쨌든 30분 내에 오늘 뭔가 말씀을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요 며칠 전에는 그런 말씀이 있더군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없으니 주인께 청해서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 그런 날은 기도 제목을 찾으려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면 되니깐. “주님, 정말 울산에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좋은 사람들 보내주세요” 보내 달라고 하다 보니깐 이미 있는 사람들도 지금 비실비실한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제 주위에. 그래서 “어느 교회 아무개 목사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새로운 힘으로 강건하게 세워 주십시오. 또 모 감리교회 목사님은 앞으로 동역하게 될지 어떨지 모호합니다. 하나님, 영육간 강건함으로 세워주십시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 혈당 테스트를 했더니 웬걸요, 제 혈당이 내려가 있더라고요. 말씀 쫓아서 기도하고 나가보면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금 여러분이 아는 그 삶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라니깐요. 어떤 분들은 자식들 보기 부끄러워 헤어지지 못하고 사는 그것을 부부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은 부부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셨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구역장 눈치 보여서 주일날은 빠지면 전화 올까봐서 나오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로워지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공급받아 보십시오. 찬송과 감사와 기도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 마감할 때 다시 주님과 여러분과의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하루 40분 빠른 통독테이프를 가지고 통독을 하니깐 하루 10장을 읽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작년 말부터 계속해서 새해 되면 큐티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통독은 내가 생각도 못했습니다. 한 가지도 못하는데 두개를 어떻게 합니까? 옛날 같으면 새해 되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고 한꺼번에 하지만 저도 한 30년 살았으니까 이제는 한꺼번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이제는 성경 통독은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1월 10일께부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하루 40분씩 빠른 성경 통독테이프와 같이 읽으니까 지금은 계획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저는 1월달 지나면서 목표 상향 조종했습니다. 올해는 2독 한다. 제가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나이 56살 될 때부터는 1년에 두 번씩은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몇 번 읽었느냐고 물으면 내가 교인들에게 묻듯이 물으시면 우물쭈물해 가지고 “글쎄, 안 세어 봐서 모르겠습니다” 할 수는 없잖아요. 

그 크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시렵니까?


3.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 베푸신 것은 우리가 사랑이 급해서 썩어가는 사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은 사랑이 우리 가슴에, 우리 삶 속에 들어오는 것은 그 사랑이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 다섯 살 때부터 예수님 믿는 가정에서 자랐고 그러기 때문에 50년 주님의 사랑 안에 살다 보니까 저는 정말 어떤 때는 “내가 사는 것이 황홀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문득 듭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바대로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고 자기 자식을 스스로 죽이는 비정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 내가 누리고 있는 엄청난 새로운 삶을 맛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저는 그들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길거리를 다니면서 그 일을 하기에는 제가 너무 시간이 바쁘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한번 지난 주간  지나면서 내가 어떤 일에 더 집중해서 할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어젯밤에는 12시 반까지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월요일 밤에는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을 끝내고 금요일까지는 원고를 탈고한다.’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할 것입니다. 결심한다고 바로 해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몇 달 내에 그것이 제 삶의 습관으로 삼겠습니다.

왜 공포합니까? 대로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그룹에서 만나서 새로운 삶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새로운 소원을 말하는 것은 돌아갈 길을 끊어 놓고 우리가 분명히 가야 될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으로 우리는 누굴 사랑해야 되겠습니까? 먼저 우리 구역원들을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그 사람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내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을 베풀어야 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에게는 선물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끼리는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유교 문화이기 때문에 위에 사람, 높은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은 선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선물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정근두 목사가 아니라 우리 교회에 있는 구역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 사랑으로 누굴 사랑해야 됩니까?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도다....시인은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모든 삶의 모든 즐거움이 있는 그들을 보살펴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이웃 사람들, 사랑에 굶주린 이웃들이 널부러져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조그만 사랑만 베풀어도 세상은 바뀝니다. 산불은 결코 온 산에 휘발유를 끼얹어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산을 태웁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작은 친절 하나가 세상을 바꾸어 갑니다. 여러분이 수억씩 벌어서 장학재단, 봉사재단 만들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가끔씩 나눠 드리는 사랑의 옥수수도 좋고 어린양도 좋습니다. 거기에 동전을 채우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채우는 겁니다.

“하나님, 나는 이 동전이 누구에게 혜택이 돌아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동전만 넣지 않겠습니다. 여기에 내 꿈을 심겠습니다, 내 기도를 심겠습니다. 이 동전이 가는 사람의 삶이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이 베푼 작은 사랑실천이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만들어 갑니다. 설 명절에 누구에게 여러분은 사랑을 나타내었습니까? 명절은 지나갔지만 아직도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의 실천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랑으로 우릴 사랑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숨기려고 꾸미려고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다 말해도 하나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십니다. 왜?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고백하기에 힘드셨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들으시고 하나도 놀라지 않으십니다.

다 알고, 익히 알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성도의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떻게 보답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십시오. 다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채워 가십시오. 마지막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며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세상이 갈망하는 사랑에 충족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새로 사랑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웃들을 사랑함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아직도 목숨을 끊기에는 희망이 있는 곳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직 살아 있는데 기댈 데가 없어서 마지막 생명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그런 살벌한 사회로 버려둬야 되겠습니까?

우리 울산교회는 천명, 이천명의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린 뜻을 같이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삶을 살 때 세상은 갑자기 달라질 것입니다. 그때 울산교회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이고 사람들의 칭송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평과 사람들의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 교회, 좋은 교회 울산교회를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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