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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자를 찾으신다 / 요 4:16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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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요 4:16 - 26
제목 : 예배자를 찾으신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교회의 다섯 가지 기본사역은 전도, 교육, 친교, 섬김, 예배입니다. 천국에 가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없으니 전도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니 교육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현실화 되었으니 믿음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소망도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망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시작하여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계속하는 것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게 뭘까요? 찬양과 예배입니다. 계시록의 천국 예배 광경을 보면, 천군 천사들이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무수한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배는 교회와 신앙의 중심이며 모든 활력의 원천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행위입니다. 영어로는 "worship"인데 “worth”와 “ship”의 합성어입니다. "worth"란 “가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가치를 내 입술로 고백하고 만방에 드러내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또는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하여 우리가 기쁨과 감사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종종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합니다. 누가 왔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목사님이 무슨 설교를 할지, 오늘 어떤 은혜를 받을지... 뿐만 아니라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요 나머지는 준비과정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성가대의 찬양은 그 자체가 예배입니다. 반주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큰 소리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예배에 대하여 처음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앞에서가 아니라 한 여자를 만나서 예배를 가르쳐주십니다. 유대여자도 아니고 사마리아여자입니다. 정상적인 가정을 이룬 여자도 아니고 남자를 다섯 명이나 두었던 인생의 실패자요 비천한 여인입니다. 그 여자에게 예수님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잘못된 예배의 모습들을 먼저 가르쳐주십니다.

첫째로, 우선순위가 바뀐 예배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초점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라” 하셨더니 “남편이 없습니다” 합니다. 예수님이 “네 말이 옳다.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지만 다 네 남편이 아니다” 하시자 그 여자는 예수님이 자기의 과거를 꿰뚫어보시는 것을 알고 말합니다. “제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요, 하나님의 종이군요.” 그 여자는 예수님의 선지자적인 모습을 본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분이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고 했는데...”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의 모든 것이 노출될까봐 두려워 화제를 바꿔버립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고 우리 조상들을 이곳 사마리아의 게르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즉 예배장소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비신자들과의 신학적 논쟁은 백해무익합니다. 논쟁을 해서는 이기는 법이 없습니다. 이기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논쟁을 하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이 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철학적으로 이길지는 몰라도 사람을 잃어버립니다. 진 사람이 다음부터는 대화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논쟁을 하자고 하면 그저 한 마디만 하고 넘어가야지 끝까지 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배 장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는가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왔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어디에서나 드릴 수 있지만 누구에게 드리는지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초점은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우리 삶의 중심이신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고 그분에게 죄 사함 받고 그분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이 초점이 없이 지엽적인 것을 갖고 아옹다옹하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중요한 것은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예배드릴 때는 목사에게 초점을 두지 말고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어라.”

둘째로,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어떤 예배를 어떤 방법으로 드려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무식하게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하여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쓰인 큰 제단을 보고 안타까워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예배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평목원에서 이번 학기에 성경적 예배학을 공부할 예정입니다. 제가 성경을 구석구석 보면서 성경적 예배가 무엇인지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보며 노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3월 첫 주부터 개강합니다.

셋째로, 자기중심적인 예배입니다. 즉 인본주의적이고 주관적인 예배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기억하시지요?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거절하셨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짐승을 바쳐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가인은 자기 마음대로 곡식으로 예배드렸던 것입니다. 곡식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자기 맘대로 한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방식과 내 생각대로 드리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 지침서인 레위기와 신명기를 잘 읽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넷째로, 우상에게 드린 예배입니다. 모세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40일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죽은 줄 알고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하는 말이 “이스라엘아!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이니라”(출32:4) 합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 앞에 가서 빌고 절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잘못된 예배입니다. 돌과 나무와 금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지 그것들을 놓고 절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누구에게 어떻게 예배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신자란 누구입니까?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느 것도--하늘의 별도, 해도, 달도--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의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다섯째로, 잘못된 태도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네가 가져오는 번제는 이제 진저리가 난다”(암5:21-24). 하나님이 왜 예물을 싫다고 하십니까? “너희 삶 속에는 정의도, 진실도, 정직도, 사랑도 없다. 고아와 과부를 무시하고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기치고 교만하게 살면서 내게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번제물을 가져오니 나는 그 제물들이 지긋지긋하다. 먼저 네 마음과 삶을 고쳐라. 서로 얽힌 것이 있으면 그것부터 풀어라. 그것이 예배의 전제조건이다.” 진심으로 자기의 삶을 통해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예배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예배로 구분됩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란 신자의 삶 전체가 예배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영광과 이익을 추구하며 자기중심적으로 하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축복과 평화와 기쁨과 건강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것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단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가슴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언제 무엇을 해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넓은 의미의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모여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가정예배, 또는 혼자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손에 묻은 먼지를 닦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주일 아침에 최소한 10분 정도는 일찍 오셔서 조용히 앉아 지난 주간을 돌아보면서 “형식적 예배로 끝나지 않게 먼저 나를 깨끗하고 새롭게 해 주옵소서” 회개하며 자신을 정돈해야 합니다. 늦어서 허둥지둥 들어오면 마음의 준비도, 정성도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이 없이 그냥 주일이니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첫째로, 마음과 손이 깨끗한 자의 예배입니다. 시편기자는 “누가 성산에 올라가 예배를 드릴까?”(시24:3-6)라고 묻습니다. 깨끗한 손, 깨끗한 마음,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께서 심령에 말씀하실 때 순종하려는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성도가 제일 잘하고 영원히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성경은 신자를 “예배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신자와 예배자는 동일인입니다. 신자에게는 예배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예배를 드리든지 늘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둘째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신령으로”는 영어로 “in the spirit,” 즉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므로 예배를 드려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소경이 눈 뜬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가 어떤 사람인줄 알고 네가 그를 선지자로 보느냐?” 하니까 눈 뜬 사람이 “거 참 이상하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경건하게 예배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했는데, 나를 고친 것을 보면 그 사람은 분명히 죄인이 아닐 텐데”라고 했습니다. 죄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죄인이 누구입니까? 성령이 없고 예수가 없고 죄성만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성령이 속에 거하는 사람은 예배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혹시라도 성령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모르는 분이 있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진정으로”는 영어로 “in truth,” 즉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을 모셨을 때 우리는 진리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또 “당신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대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참된 예배입니다.

셋째로, 성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오자마자 엎드려 아기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고 예수님이 구주시요 삶의 소망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어떤 나병 환자도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어떤 지도자도 예수님께 와서 경배했습니다(마9:18).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마14:33). 가나안 여자도 예수님께 엎드려 “주여, 나를 도우소서”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능력 있는 구원자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주님을 알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드리는데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드린다” 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누구이며 천국과 십자가의 소망이 무엇이며 예배가 무엇인지 알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배워서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을 알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다섯째로, 예배는 주님이 오시는 때부터 시작입니다. “예배할 때가 곧 이 때라.” 하나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래서 이제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배자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지옥에 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것은 사실 결과입니다.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그것도 결과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인생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바로 그것입니다.

예배 시작 때 성가대가 먼저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도신경을 줄줄 외우고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습니다. 거룩한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 사함과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하나하나 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신경이 예배에 방해된다고 하는데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제 소원이 하나 있는데요. 저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아멘!”까지 하고 죽고 싶습니다. 그 때까지 시간을 주실지는 모르나 얼마나 멋진 마무리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겠어요? 그리고는 “주여, 제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한 마디 한 마디를 여러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에는 모두 일어나 첫 찬송을 부릅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이니까 일어나는 것입니다. 첫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을 힘차게 높이는 것으로 합니다. 저는 이 첫 찬송을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아까는 성가대가, 이제는 우리가 찬양합니다. 그리고는 한 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대표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리고, 죄 사함과 우리의 모든 필요를 구합니다. 광고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를 보며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성경봉독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독을 참 좋아합니다. 죄인인 내 입술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올라가는 것은 참 귀한 일이므로 저 혼자 하고도 싶지만, 이 축복을 함께 나누고자 여러분과 함께 교독하자고 합니다. 헌금은 그냥 돈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헌금과 함께 우리의 마음과 인생과 가족과 직장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면서 “제 삶에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기 원합니다” 하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김상복 목사를 통해 알리시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들으십시오. 들으면 살고 순종하면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나타납니다. 듣지 않으면 불행이요 죽음이요 실패입니다. 설교를 마치면 기도하면서 마음에 결심을 하고 우리를 다시 주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른 후 축도를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고는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이요,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시간이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시간이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고쳐주시는 시간이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고 저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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