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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가 예배입니다 (시편 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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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가 예배입니다 
(시편 50:23)

지난 시간에는 예배자의 태도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감사는 예배자의 태도일 뿐 아니라 예배의 내용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없다면 당연히 예배도 없습니다. 감사는 기도,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지는 것, 모든 경건의 연습, 예배드리는 일 등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드릴 수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믿음과 감사는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는 믿음이 있는 자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자는 인간의 지고의 목적을 성취할 뿐 아니라, 만사에 있어서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렇습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라면,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감사가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사조건이 있다고 다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는 조건이나 환경보다 마음의 태도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인격여하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압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영하의 추위에 아버지와 아들거지가 육교 위에 앉아 구걸을 합니다. 그들 앞에 놓인 깡통에 행인들이 동전을 던지면 아버지거지는 “감사합니다.” 인사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바빠서 걸음만 재촉하지 돈을 넣지 않습니다. 아들은 심심해져 깡통 바닥의 동전을 주워 땡그랑 깡통에 떨어뜨립니다. 그럴 때마다 눈먼 아버지거지는 “감사합니다.”를 연발합니다.

잘 차려 입고 커다란 선물꾸러미를 든 아버지와 아들이 그 곁을 지나지만 거지를 못 본채 합니다. “아빠, 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요?” 아들이 묻습니다. “너는 왜 돕지 않았지?” 아버지가 되묻습니다. “텔레비전에도 나오지 않는데 뭘.” 아들이 서슴없이 대꾸합니다. 여전히 거지부자는 장난삼아 동전을 떨어뜨리고 연신 “감사합니다” 인사를 했습니다. 감사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거지아버지는 받았다고 생각하니 감사하다고 인사를 합니다. 반대로 지나가던 부자는 서로에게 돕지 않았다고 불평만 합니다.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이며 인격입니다.

받은 것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이 또한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날 베풀어주신 은혜를 받았다고 인정하는 게 바로 감사입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교만합니다. 그러나 인정하면 벌써 감사의 마음으로 변합니다. 감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자기 자랑이 꽃피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부모님께서 낳아주고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키우고 돌봐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불평합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많은 은사를 받았음에도 감사대신 자기 자랑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쟁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그들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때 마귀는 역사하였고, 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자기자랑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사람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자랑은 자기를 들어내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분이 가장 높다고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를 들어내는데 어찌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감사의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감사의 걸림돌은 자신입니다. 조건이나 환경, 하나님께 그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의 죄 때문에 감사를 모르게 됩니다.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존재였습니다. 즉, 예배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감사를 잃고 예배를 모르는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아내를 일러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창2:23)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저지르고는 모든 죄를 아내에게 전가시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감사의 마음이 원망과 불평의 마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에 없습니다. 그러니 영이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롬8:7-9]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아직 죄 가운데 있다면 감사는커녕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감사의 걸림돌은 바로 죄입니다. 감사는 그 사람의 마음이요 인격이지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예배를 잃게 만듭니다. 그것은 곧 인생의 목적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잃으면 어찌 됩니까

[롬1:21-23]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죄를 지은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 않습니다. 이 말은 예배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감사를 잃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합니다.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은 안 섬기고 마땅히 섬기지 말아야 할 우상을 숭배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 앞에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해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인간은 그 반대로 합니다.

죄를 짓기 전의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이후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사람은 무엇인가를 예배하는 자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냐 만 다릅니다. 다시 말씀을 바꾸면, 죄를 짓기 전에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에는 잘 된 것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를 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실패하는 자들이 바로 자기를 들어냅니다. 그래서 예배와 감사는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감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자기를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여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감사의 제사를 회복하십시오. 자신이 아닌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지난시간에 감사로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놓게 되고, 감사는커녕 불평 속에 살게 됩니다. 불평을 하면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는 결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감사를 방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죄가 앞을 가리고 있을 때 자기 자랑만 늘어놓게 됩니다. 감사를 잃은 자는 창조목적인 예배자로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예배인 것입니다. 앞뒤가 바뀐 것 같지만, 오늘은 지난시간 본문인 (23절)의 앞부분인 (1-15절)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감사와 예배를 연결하는 신비한 고리가 발견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점에서 예배라고 할 수 있다는 결론이 지난시간의 메시지라면, 오늘 본문에는 어찌하여 감사가 예배가 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이 주는, 감사가 예배가 되는 과정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헌금과 감사는 다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책망한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책망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8) 제물에 대하여는 책망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통하여 다른 무엇인가는 책망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물에 대하여 책망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모든 제물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많이 드리든 적게 드리든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요? 잘 드리고 있으니까. 오늘날로 말한다면, 헌금을 적게 드리든 많이 드리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들이 드린 제물이 문제가 아니고 제물을 드리는 그들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올려진 헌금이 문제가 아니고 그 헌금을 드린 사람이 문제란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신앙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제사의식을 위하여 양을 잡고 소를 잡은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지요.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13,14)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제물과 그들의 신앙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없으면서도 때가 되면 성전에 나와 제물을 드리는 그들이 가증스러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미디로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려라!”

제물에는 문제가 없는데 마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순서에는 문제가 없는데 예배자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감사헌금 봉투에는 문제가 없는데 드리는 마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을 책망하지 않고 그 내용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헌금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감사헌금과 감사하는 마음을 별도로 관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장부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어느 장부에도 누락되면 안 됩니다.

감사의 결과와 예배의 목적은 같습니다

(13,14절)은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은 여기서 세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과, 서원을 갚으라는 것과, 환난 때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에 걸리는 말이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는 말입니다. 세 가지는 인간이 해야 할 것이고 뒷부분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앞에 것이 조건절이고 뒤에 것이 주절입니다. 사람이 명령을 순종하면 하나님은 건져주시고 자신을 영화롭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입니다. ‘네가 나를’이지 ‘내가 너를’이 아닙니다. 영화롭게 여겨지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이 시편의 결론과 일치합니다. 감사야말로 예배이며 감사야말로 옳은 행위입니다.

그럼,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입니다(22). 하나님을 잊은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찢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은혜를 알기에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 신앙인의 간증을 들어보십시오. [시69:30,31]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할렐루야!

감사의 결과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상고한 바와 같이 예배의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니까 둘은 같습니다. 감사의 결과와 예배의 목적은 같습니다. 그러기에 감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는 실패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사로 예배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로 예배드리는 자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가시다가 열 명의 문둥이를 고쳐주신 적이 있습니다(눅17:11-19). 그러나 딱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이 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10명 중에 한 명만 감사했다는 것은 그만큼 감사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고작 10%가 감사하며 산다는 뜻을 내포한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들 중 10%가 감사할 줄 압니다.

감사는 생각을 먹는다고 쉽게 되지 않습니다. 감사의 조건이 생긴다고 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감사 조건이 없어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른 생각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감사조건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적다는 말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적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감사는 신앙의 실력입니다. 신앙의 실력이 있는 사람은 감사하며 삽니다. 그러나 신앙의 실력이 없는 사람은 감사조건이 나와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실력이 무엇입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실력이 올라갑니다. 반대로 노력하지 않으면 실력이 떨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감사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사의 실력을 쌓으려면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병사는 아무리 많아도 정예훈련을 받은 병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는 바울 밑에서 훈련받은 신앙의 군병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그를 당당히 빌립보교회에 추천합니다.

10%만 감사하며 산다면 그 안에 들도록 감사를 훈련해야 합니다. 감사를 드린 자가 10%라면 예배의 성공자가 10%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배도 훈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둥이에서 병을 고친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와 한 행동을 보면 그가 예배에 훈련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눅17:15,16]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 분명한 예배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헌금 드렸다고 감사에 성공한 줄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헌금보다 우선합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적기에 감사가 더욱 값집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는 훈련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신앙훈련에 게으르지 말고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실력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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