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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를 사랑하는 자의 복 (시 8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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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사랑하는 자의 복
시편 84편 1-4절

어떤 분이 성장하는 교회를 연구했습니다.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교회를 오래 섬기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를 오래 섬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가끔 교회를 자주 옮기는 분들을 보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더 잘 믿고 더 잘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 옮기는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옮기는 사람을 무조건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오죽 하면 교회를 떠날까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떠나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실 것입니다. 그러나 떠나든지 남아 있든지 교회생활을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교회의 기둥이 되겠다는 장기적인 목표는 꼭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기둥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목회자를 좋아해야 합니다. 목회자와의 관계가 막히고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뚫리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 것입니다. 사람관계가 막히면 은혜의 통로도 막힙니다. 특히 목회자와의 관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목회자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면 교회에서도 마음이 멀어지게 됩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목회자에게 마음이 닫히면 판단할 것을 보이지만 목회자에게 마음이 열리면 비전을 품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마귀가 교회를 멀리하게 하는 제일 전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까닭 없이 목회자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때로 큰 잘못이나 지속적인 잘못이 아니면 목회자의 잘못도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도 사람입니다. 언제나 순간적인 잘못에는 노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이해가 없으면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교회의 기둥이 되려면 목회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성도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의 기둥이 되는 분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잘 노는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5-6일을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주일에 교회에 와서는 얼마나 다른 성도들과 잘 어울리는지 모릅니다. 어울림 속에 진리가 있고, 어울림 속에 행복이 있고, 어울림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울릴 줄 아는 분들이 결국 교회의 기둥이 됩니다.

셋째,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교회 일이라면 끝까지 남아 처리하고, 교회 행사라면 빠짐없이 참석하고, 일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 교회의 기둥이 됩니다. 사실상 교회 일은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고, 마음에 안 들어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을 하는 분들은 자신의 판단과 상식을 떠나서 최대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과분한 정도로 일하는 사람들이 결국 교회의 기둥이 됩니다.

넷째,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의 기회를 포기하면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섬겨야 합니까? 나만 혼자 일하는 느낌이 들어서 억울할 정도로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억울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억울함을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특히 헌신의 순간에 앞장서야 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문제 해결을 위해서 잠잠히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반드시 교회의 기둥이 될 것입니다.

다섯째, 가정을 공개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가정을 잘 공개하지 못할 환경이 있습니다. 배우자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경우에 가정을 개방하기 쉽지 않습니다.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운 경우에도 가정을 개방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형편 중에서도 힘써 가정을 개방하려고 하는 사람이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의 기둥이 되는 꿈도 꾸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대로 살아도 잘 사는데 교회의 기둥이 되어서 부담을 지나?"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기둥이 되는 축복은 이 세상의 어떤 축복보다 소중한 축복이고, 어떤 기쁨보다 기쁨입니다. 교회를 힘써 사랑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그만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요?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본문의 시편을 지은 고라 자손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신 교회도 자연히 사랑했습니다. 가끔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짜 사랑하면 교회도 사랑할 것입니다.

교회를 싫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교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 교회는 사기업이 아닌데 유산 물려주듯이 교회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모습을 보고 분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교회 역사의 불행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원래 카톨릭 교회가 신부의 독신제도를 채택한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 교회에서 초대 교황으로 여기는 베드로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예수님이 고쳐준 이야기(막 1:30-31)에서 볼 수 있듯이 독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직매매와 성직세습으로 교회의 타락상이 극심하게 되자 1139년의 라테란(Lateran) 회의에서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채택한 것입니다. 그 중세기 때의 모습이 지금 우리 나라에 재연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딸만 둘이 있습니다. 요새 교회 세습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딸만 둘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사위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분들도 있는 것을 보고 이 문제에 대해서 결코 자만해서도 안되고 안심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목회를 마감할 때쯤 보니까 그때까지의 목회가 하나님의 사명을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한 목회만이 아니었고, 목회자의 명예욕과 출세욕의 한 방편이었음을 세습을 통해서 그 마음이 발가벗겨졌으니 그런 모습을 보고 일부 성도들이 교회에 실망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를 싫어하는 분들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나쁜 면만 생각합니까? 부모가 물려주어야 할 것은 유산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유산 물려주지 않기 운동'을 하는데 수많은 교인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산을 남기기는커녕 자기의 몸의 일부까지 남에게 주고 가기 위해 '장기 기증 운동'을 하는 데에도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수많은 교인들이 그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을 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교회가 희망임을 자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싫어진 가장 큰 이유는 결국 교회의 문제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의 약점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교회를 더 사랑하고, 바른 교회를 만들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어떤 부인이 광고를 냈습니다. "남편 염가로 급히 양도함. 남편의 골프채와 사냥도구, 그리고 개도 함께 끼워줌." 그 광고를 보고 전국 각지에서 문의전화가 불티나게 왔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남편이 싫어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사랑해 보세요." 얼마 전, 이 글을 보면서 교회가 싫다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때로 교회가 잘못된 모습을 보여도 희망을 잃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바른 교회의 바른 교인이 되기 위해 힘쓰고 교회를 더욱 사모하고, 교회를 위해서 더욱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 마음을 다해 교회를 사모하는 삶 >

오늘 시편을 쓴 고라 자손의 눈에도 하나님의 장막이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장막도 사랑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장막을 상사병이 걸릴 정도로 사랑하면서 그곳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얼마나 보기 좋은 모습입니까? 사람은 무엇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달라지고, 그 인격이 달라집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사모합니까? "내 영혼이 돈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고백은 한 사람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삽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여러 고상한 핑계와 변명과 이유를 대지만 거의 돈 문제 때문입니다. "내가 돈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하고 말하지만 사실 대부분 돈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걸리면 부모, 형제, 친구도 다 소용 없습니다. 사생결단을 하고 달려듭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하고,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서도 돈을 사모하여 쇠약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치관이 똑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돈을 벌려고 하고, 교인들은 하나님의 힘을 빌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제는 돈 때문에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교회에서 '손을 펼 줄 아는 삶'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보다 소중한 것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편 기자처럼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졌다고 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나깨나 교회를 생각합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교회로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거리를 초월합니다.

평양에 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경성의 배재학당에 지원했을 때 아펜젤라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평양에서 경성까지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8백 리 정도 됩니다." "아니,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배우러 왔습니까?" 그때 안창호 선생님이 되묻습니다. "선교사님! 미국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8만리 정도 됩니다." 그때 안창호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아니,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와서 선교하는데 8백 리가 무엇이 멉니까?"

여러분들의 교회 사랑은 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 되길 바랍니다. 지금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교회를 사모하여 쇠약해졌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못해도 예배 시간만은 늦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사모하는 모습은 사실 예배하는 모습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조금 일찍 와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또한 교회를 사모하는 모습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겸손한 모습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곳곳에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생겨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했지만 "내가 이런 체험을 했어! 나는 이런 은사를 받았어!"라고 간증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말씀을 받는데 시간을 더 많이 들였습니다.

또한 교회를 사모하는 모습은 교회를 향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라 자신은 자신의 마음과 육체를 다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 진실한 기도자입니다.

< 교회를 삶의 터전으로 삼으십시오 >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삶의 중심 터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고라 자손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 고라 자손은 어느 날 주의 제단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처마 밑에 참새의 둥지가 있고, 제비 보금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참새 가족과 제비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저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좋은 교회를 만나서 그곳에 내 둥지를 틀고, 내 보금자리로 삼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집은 내 육신의 보금자리이지만 교회는 내 영혼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보금자리가 없으면 사람의 영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IMF가 막 시작되었을 때 고아원에는 고아 아닌 고아들이 가득 찼습니다. 부모들이 먹고살기 힘드니까 아이를 버린 것입니다. 그중 한 아이의 모습이 TV에 나왔습니다. 기자가 6살 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니?" 아이가 대답합니다. "어느 날 엄마가 이곳에 와서 잠시 과자 사러 갔다 올 테니까 잠깐 있으라고 해서 있었는데 서른 밤이 넘도록 오지 않아요."

알고 보니까 이 아이는 매일 달력에 표시를 하면서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잘 때는 항상 베개를 껴안고 자면서 몇 시간씩 눈물을 흘렸습니다. 원장이 가보면 자는 척 하는데 사실은 자지 않고 매일 베개가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모습처럼 불쌍하게 가련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보금자리는 육신의 보금자리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안식하고, 사랑하고, 섬길 교회가 없는 것처럼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안식하고, 섬기고, 내 삶의 터전으로 삼을 교회가 있고, 그 교회 중심적으로 사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가끔 섬기는 교회가 멀어서 멀리 교회를 다니며 충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항상 "집이 교회에서 가까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아무래도 교회는 가까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나의 삶의 일부 정도가 아니라 나의 삶의 중심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를 계획할 때 항상 교회를 생각하며 교회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시면 "네가 정말 교회를 사랑하고 생각하는구나!"하고 여기시고 하나님은 심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중심적으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누구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주시고,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1-10절을 보면 사랑하는 종이 병든 로마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로마 백부장이 종이 병든 것을 알고 유대인 장로 몇을 예수님께 보내어 종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장로들은 예수님께 와서 그 로마 백부장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 이 백부장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5절)."

이 장로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부장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백부장의 종이 병든 일까지도 자기 일처럼 나서서 예수님께 그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 것입니다(4절). 그 소리를 듣고 예수님은 백부장을 향해 몸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 곧 응답입니다. 결국 그 종은 치유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전과 회당의 개념을 다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아끼는 자에게 반드시 칭송 받게 하시고, 친구를 얻게 하시고, 치유의 문과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에도 유익이 되겠지만 자신에게 보다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서울 강남의 한 교회에서 오지 선교를 하면서 교회 지어주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때 한 사업가가 자신도 교회 하나를 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사업이 부도를 맞았습니다. 손에 남은 돈이 5백만 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돈으로 교회를 지어 바치기로 결정하고 그 돈을 선뜻 내놓았습니다. 결국 그 돈으로 파나이 섬 나무 밑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 조그만 교회를 건축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업가를 위해 파나이 섬 교회의 전 교인이 매달리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도 났던 사업가의 사업이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모든 막혔던 문제들이 하나씩 풀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는 너무 아름답게 성전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성전 이전의 은총이 우리가 도운 교회의 교인들의 기도 때문임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지만 선교에 힘을 썼고, 구제에도 힘을 썼습니다. 우리도 교회 이전을 위해서 준비할 것이 많았지만 때로는 과분할 정도로 선교를 했습니다. 매월 2백만 원 정도의 월세를 내면서 월세 교회의 부담과 고단함이 있었지만 항상 선교는 월세 이상의 비용을 지출했습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번 교회 이전 과정에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 은혜가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도움을 드렸던 선교사님과 목사님, 그리고 어려운 분들이 얼마나 감사하면서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했을까요? 몽고의 김재호 선교사님의 차량을 타는 몽고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들에게 발의 일부를 제공해준 한국의 그 교회에게 축복을 내려주세요."

황수 선교사님의 대만 교회와 황수 선교사님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도운 시골교회들,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주변의 이웃들, WCN에서 공부하는 근로자들, 안디옥 선교회와 목찬수 학생의 아버지이신 목진수 목사님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말씀에 은혜 받는 수많은 성도들과 말씀 준비에 도움을 받는 수많은 목사님들도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 기도에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저 진실함과 순수함으로 무장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 진실하고 순수한 기도가 얼마나 능력 있는 기도였겠습니까? 그 기도를 먹고 우리 교회가 어려움이 하나도 없이 교회 이전을 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자에게 반드시 꿈과 같은 축복의 열매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오늘 오후 4시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입당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후로는 더욱 교회를 사랑하여 하나님이 주신 복을 예비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저 좋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가는데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선교후원 이곳 클릭)

< 요삼일육선교회에서 드리는 말씀 >

저희 요삼일육선교회(요한복음 3장 16절, John316 Mission)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전파와 선교사역을 위해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필요합니다.
특히 한국어 말씀을 영어로 번역해주실 분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봉사하실 수 있는 분들은 이한규 목사님에게 연락 주십시오(017-705-4347).
저희 선교회의 말씀과 선교 사역이 보다 폭넓게 되도록 기도해주시고,
이 사이트의 말씀이 다른 분들에게도 널리 들려지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자발적으로 이 사이트를 다른 사이트에 소개해주시고, 링크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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