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통의 환경에서 / 룻 1:19-22

  • 잡초 잡초
  • 315
  • 0

첨부 1



 
고통의 환경에서 <룻 1:19-22> 

□ 고통의 환경에서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 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룻기 1장 19-22절>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의 현상이 극에 달한 것
같습니다. 가진 자들은 어디에다 투자할지를 몰라서 엄청난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가 하면, 없는 사람들은 더욱더 어려워져 심지어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살하는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1. 인생살이에서 고통의 환경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고통이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대부분의 경우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잘못 생각하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가 쉽습니다.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사람들은 좌절하거나, 절망하기 쉽습니다.
머리로 아는 고통과 생활에서 느끼는 고통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을 때는 없는 사람들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또 있을 때는 고통이 어쩌구, 인생의 고난이 어쩌구 말들은 잘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그런 경우를 당하면 모두 당황해집니다.
저는 요즘 그런 형편에 처한 교우들의 가정을 보면서 아침마다 대도의 기도를 드립니다. 저들이 낙심하지 않고, 신앙으로 재기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의 환경에서 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인다'고 한 성경의 말씀처럼,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흘린 눈물은 신앙으로 극복할 때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로운 힘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하고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신앙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재물이 떨어지면 그런 것이 정작 고통스러운 환경으로 주어질 때 좌절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믿다가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30대 주부가 빚을 지고 가출한 남편 없는 가정을 꾸려나가려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빚을 갚을 길이 없고 삼남매를 키울 힘이 없어, "나 안 죽을
래, 나 죽기 싫어" 하는 어린 것들을 밀쳐 떨어뜨린 그 심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뉴스를 들으면서 마음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지난 날의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 여자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신앙적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아닙니다.
과학적 지식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어진 신비로운 위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즉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의 힘' 입니다.

2. 고통의 환경에서 문제를 해결한 대표적인 여인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 이름의 뜻처럼 '불행한 여인' 이었습니다.
<나오미>처럼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약속의 땅인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경제적 문제로 남편을 따라 '모압'으로 이민 갔으나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앞세운 고통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남편 죽고, 아들 둘 장가들였는데, 손자들도 없이 다 죽었으니 이렇게 복 없는 여인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도 이런 여인이라면 박복한 여인, 불행한 여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절망스러운 환경에서 신앙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오미>의 신앙을 우리가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는 어떻게 고통스러운 환경을 극복하였을까?

1) 그는 고통의 원인을 신앙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나의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를 신앙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의 환경에서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비관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의 자기 반성을 보게 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라는 말을 보면, 그때야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남편 있겠다, 두 아들이 있겠다, 무슨 걱정이 있었겠습니까? 사실 모압 땅으로 간 것은 흉년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풍족한 삶을 꿈 꾸면서,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미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 중에는 신앙적 문제로 가는 것 보다는 더 풍요로운 꿈을 그리면서 즉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 보려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꿈도 이루지 못하고 남편 죽고 두 아들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나오미>의 형편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빨리 깨달아야 할 일이 이것입니다.
고통이 왔을 때 말씀을 떠나 내 생각대로 무엇인가 해보려다가 당한 고통이 아닌가 하는 것을 빨리 발견해 내야 합니다.
<요나>도 풍랑 중에 이것을 얼른 깨달았습니다.
이 풍랑은 나로 인한 풍랑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바다에 던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또 다른 길을 예비해 두었습니다.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습니다.

2) 그는 처음 자리로 되돌아왔습니다.
깨달았으면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는 데는 회개와 함께 새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회개>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제 자리로 되돌아가는 행위인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 인간적인 계획과 이성(理性)적인 판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로 되돌아왔습니다.
경제적 문제로 떠났던 자리에서 다시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습니다.

신앙인이 신앙을 떠났던 자리에서 되돌아오는 행위가 회개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긍휼하신 하나님이기에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당신의 아들을 죽는데 까지 내어 준 사랑이었습니다.

요즘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출산하는 모습을 TV로 방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니 이제는 아버지 될 남자들도 함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내의 산고를 함께 하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산의 고통을 함께 한 자식이기에 얼마나 귀여워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자식을 내어주는 심정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것과 비교될 수 없지만,
만인의 죄악을 대신하여 독생자 외아들을 이렇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죄, 죄 합니다마는 제일 큰 죄가 무엇이겠습니까?
회개하지 않는 죄일 것입니다. 하나님 모른다고 하는 불신앙일 것입니다.
<나오미>는 바로 이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3) 돌아온 그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복을 내렸습니다.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온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복을 내렸습니다.
남편 없이 따라온 며느리 룻을 통하여 인생의 기쁨과 풍요로움의 만족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보아스>를 만나게 하였고, <보아스>에게 은혜를 주어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세상으로 나가지 말고, 예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십시오.
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죽음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그 절망스러움을 갖고 나아왔습니다.
②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그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줄 믿었습니다.
그 절망스러운 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③ 중풍 병으로 누워있는 친구를 침상채 메고 와서 지붕을 뚫고라도 주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이것이 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통의 자리에서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도 인생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도 신앙의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없이 나간 길에서는 풍랑이요, 좌절이요, 절망스러움이지만, 다시 돌아오면 생각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영국의 한 여성은 종신 금고형을 받아 평생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 속에서 예수를 믿고 거룩해져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하늘을 날지 못하게 하시었네.
나는 이 좁은 새장의 한 마리 새, 주님이 나를 가두셨네.
하여 나 할 일 없기에 종일 노래하노라. 찬송하노라.
찬송 외에 달리 할 것 없네.
찬송하라고 나 여기 가두셨으므로 나의 영은 주를 향해 종일 찬송하네.
십 배로 찬송 부르네. 백 배로 찬송 부르네.
찬송하며 눈을 떠 찬송하며 잠들고 찬송하며
숨지리라.'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대강 이런 내용의 시입니다.

누가 그를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까?
신앙인에게는 불행이 없습니다.
신앙의 사람에게는 비극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은 예술입니다.
삶의 예술가이고 삶의 창조자입니다.
어디에서나 그는 환경의 노예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6)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도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5)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3:17)

고통스러운 환경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