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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 (출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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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
(출16:1-4 )
 
  흔히 우리의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마라톤은 인간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운동입니다.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호흡입니다. 아무리 체력이 있고, 기술이 있더라도 뛸 때 호흡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마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호흡에 달려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호흡한다는 것입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우리는 끝나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달리는 운동입니다. 작전타임도 없고 하프타임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어떻게 보면 달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마라톤처럼 달려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하나님앞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린다고 말했습니다. 인생도 신앙도 달리는 것이요 경주하는 것입니다. 한해로 순환되는 과정도 경주입니다. 2003년 1월에 출발한 우리가 이제 한해의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이제 골인지점을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이처럼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달려야 합니다. 낙오하지 않고, 중단하지 말고, 힘차게 달려야 합니다.

  이처럼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만약 잘 달리는 우리의 발목을 꽉 쥐고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가볍게 해서 달려도 쉽지 않은 싸움이요, 경주인데, 내 인생의 마라톤에서 갈길 바쁜 나의 발목을 잡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본문은 바로 그것에 대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잘 달려야 하는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삶에 발목을 잡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과거에 매이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속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430년동안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만 남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힘차게 발을 옮겼습니다. 고지가 바로 저기입니다. 이들이 엘림과 시내산 사이인 신 광야 이르렀습니다. 그 때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이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러면서 내뱉었던 말이 3절입니다. "우리가 애굽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지금 이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그들은 애굽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를 회상합니다. 거기에서 배불리 먹던 때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지겨운 종살이, 마음앓이를 해서 극적으로 빠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나왔는데 마음은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갈길이 천리인데, 과거에 얽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발목을 꽉 잡은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한계속에 사는 존재입니다. 개인의 인생이나 공동체나 인류역사나 모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두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입니다. 과거없이 현재가 이루어지지 않고, 현재의 발판없이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분명 과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하지만 결코 과거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화려한 과거라도 잊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 믿기 전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뼈대 있는 가문에 속했고, 박식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와 영예를 얻었고,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은 후 과거를 잊기로 했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3-14)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 신앙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더 좋은 미래를 꿈꿉니다. 그런면에서 천국은 우리에게 가장 마지막 미래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만족스러워도 천국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추한 과거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한 것으로 현재를 놓치고 살기가 쉽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야박한 종교가 아닙니다. 책임을 묻고 따지면서 물고 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아무리 죽을 죄를 지어도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것처럼 멀게 하십니다. 아무리 추한 과거라도 현재 나의 바르고 참된 삶이 모든 더러운 것을 다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순간의 실수로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앞에서 눈물과 통곡으로 침상을 적셨던 회개를 통해 과거는 다 덮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후대가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이제 화려한 과거라도 내세우지 말고 현재 나의 삶을 생각하십시오. 아무리 추한 과거라도 주눅이 들거나 문제를 삼지 마십시오. 넓고 크게 펼쳐진 미래의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원망입니다. 오늘 말씀 2절에 이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했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원망의 말과 행동이 강조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보면 수없이 '원망'이란 말이 반복됩니다. 출애굽의 여정을 한 단어로 대변하는 것이 바로 '원망'입니다. 원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치명적인 범죄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반복하여 지을 수 있는 죄입니다. 이 시간 한번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감사가 있었습니까?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원망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우선, 당면한 현실앞에 은혜를 잊기 때문입니다. 어느 성경학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망각하고 망각해야 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나오게 하신 은혜를 잊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해주신 능력을 망각했습니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신 기적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현실의 어려움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원망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들이 원망하게 된 두 번째 원인은 근본부터 그들의 마음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와 상황앞에서 그들은 한번도 긍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태도와 자세가 삐뚤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자세가 중요합니다. 태도에서부터 좋은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부정적이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긍정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구두를 만드는 회사에서 아프리카에 투자를 위해 두사람을 현지 답사하게 했습니다. 돌아와서 두사람이 보고한 보고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맨발로 다니기에 투자해도 소용이 없고 낭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들이 지금 모두 맨발로 다니기에 홍보를 잘해서 투자하면 모두가 신발을 신어 대박을 터트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일을 겪으면서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내었습니까? 바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의 태도와 자세가 원망과 감사를 결정합니다.

  또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원망의 원인은 습관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원망과 불평이 쏟아집니다. 이것은 생각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나쁘게 굳어버린 그들의 나쁜 습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40년동안 그렇게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모두 죽었습니다.

  원망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제 당면한 현실만 보지 말고, 더 깊고 넓고 높게 보고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진정 감사가 있고, 원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셋째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하나님은 과거에 매이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시험하십니다. 어떤 시험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왜 시험하시겠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고 계속해서 의심하고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든 능력과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셔서 궁극적으로 가나안까지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이요, 그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과 능력을 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 시험을 하십니다.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쯤 되면 결과가 어떠해야 할까요? 당연히 우리는 이런 사건 뒤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면서 쉽게 가나안으로 들어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40년이 지나도 안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그것은 400년, 4000년이 지나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믿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짧은 인생을 삽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는 것을 보며 더욱 허무한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어떻게 남은 생애를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리석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어리석은 것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믿지 않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이것이 결국 행복을 뺏아가고, 불안하게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일입니다. 나는 어리석은 자입니까, 아니면 지혜로운 자입니까?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요, 은혜'라고 말합니다. 기도하십시오. 믿음을 달라고, 은혜를 구하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믿음'입니다. 이해되고, 증명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과학은 증명해야 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선이고 그리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로 서 있지 않는 한 우리는 평생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지 않아도 하나님이십니다. 증명하지 않아도 영원부터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기독교와 성경의 특징은 다른 신화나 종교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성경은 문을 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역사하심을 믿으십시오. 더 이상 우리 삶에 불신으로 발목을 잡히지 마십시오. 아무리 세상에서 달리고 뛰어서 많은 것을 가져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부터 이제 다시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이런 것에서 벗어나 방향을 잡으십시오. 과거에 매이지 마시고, 원망과 불평을 멀리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으십시오. 그래서 잘 달리고 잘 싸우면서 이번 한주간도 천성을 향해 힘있게 달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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