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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냉수같이 시원케 하는 사람 (잠 25: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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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같이 시원케 하는 사람(잠언 25:13-25)   

  중국 상하이가 일전에는 사스(SARS) 때문에 야단이더니 지난 29일에는 기온이 39.6도까지 올라가서 전기 소비량이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에어컨이 없는 시민은 물가나 공원에서 지내고 밤이면 열대야를 피해서 노숙을 하곤 했습니다. 기온이 하도 높다보니까 산에서는 산불이 나고 더위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 여러 명이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더울 때에 에어컨이 잘 나오는 방이라든지, 또 냉장고 보관된 시원한 얼음물 한 그릇을 먹으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본문 13절에 보면 <충성된 사자는 그 보낸 자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몇 년 전에 교회에서 속리산을 간 적이 있습니다. 속리산 주차장에서 문장대까지는 꽤 힘든 등산길이었는데 지금은 얼마할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는 물 한 병에 5백원 하더라고요. 조금 올라가니까 1천원하고, 조금 더 올라가니까 1천 5백원을 하고, 문장대 바로 아래의 매점에서는 한병에 2천원을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너무 갈증이 나고 땀을 많이 흘리니까 4배나 비싼 물도 아깝지 않게 사 마시면서 땀을 식히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다가 하갈과 함께 브엘세바 광야로 쫓겨났습니다. 그 광야는 사막입니다. 가지고 나온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목이 말라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물을 주셔서 목말라 죽어가고 있던 이스마엘에게 물을 먹여 회생(回生)시키고 그의 민족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사기 15장에 보면 삼손이 나귀 턱뼈 하나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쳐 죽입니다. 한 사람이 1천 명을 쳐 죽이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죽이다가 보니까 목이 타서 더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1천 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여 원수를 갚았는데 이제는 내가 목말라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우묵한 곳에 물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엔학고레 - 부르짖음의 샘>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다시 사사의 일을 계속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등산을 할 때나 추수를 할 때 시원한 물 한 그릇이 얼마나 기쁨이 되고 새 힘을 솟게 하는지 모릅니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물 한 그릇이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철에 우리만 물을 마시지 말고 하나님께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드릴 수 없을까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대접할 수 있는 길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가난한 자, 병든 자, 헐벗은 자, 갇힌 자들에게 가서 대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께 시원한 얼음냉수 한 그릇을 대접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26절에도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같으니라>.

<충성된 자>들이 되셔서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께 마치 얼음냉수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소식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냉수와 같이 시원한 소식, 좋은 소식을 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를 보낸 이>는 솔로몬 왕인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를 기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자(使者)>라는 히브리어 <치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나  천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신약에 와서는 <앙겔로스>라고 씌여지고 있는데 앞의 접두어 <유>를 붙여서 <유앙겔리온>이라하면 <복음>이란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소식, 기쁨의 소식, 복음의 소식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자가 충성된 사자가 되어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는 사람은 더운 추수날, 땀을 흘리는 그때에 얼음냉수처럼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충성된 사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더운 여름철에 하나님께 얼음냉수를 대접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자들입니다.

먼저 우리 모두는 <사자, 보냄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델로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오신 분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에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메시야가 어디서 올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어떤 이름으로 올 것인가>하는 사실을 자세하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신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무엇 때문에 세상에 왔다>는 의식이 아주 뚜렷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여러번 나오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도다>. 26절에는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29절에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42절에는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9장 4절에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이처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 보내셨다>, 보내셔서 이 땅에 오셨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오셨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지를 않았습니다.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를 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모든 인류가 지옥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는 고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부르짖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이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됩니까? 내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인류를 구원할 길이 없습니까?>하고 울부짖으면서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부르짖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므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다 지불하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예수님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輪回說)처럼 사람이 죽어서 소나 돼지가 되기도 하고, 쥐나 곤충이 되기도 하고, 또는 소나 돼지가 사람이 되기도 하고, 쥐나 개가 사람이 되기도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사람이라면 거기에 무슨 인간의 사명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인간의 존엄성이 있겠습니까? 인간은 그와같이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짐승이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하는 윤회(輪回)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이런 시대, 저런 시대에 태어나서 삽니다. 이 장소에 태어나기도 하고, 저 장소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이 가문에 태어나고, 저 가문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 마음대로 왔다가 내 마음대로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왔다가 그 사명이 다 끝나면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실 때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살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그 보냄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자는 보냄받은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냄받은 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사명감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보냄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한 사장이 사울에 출장을 보냈다고 합시다. 그러면 보냄받은 그 직원이 자기가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고 오겠습니까? 보냄받은 사람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를 알아야만 그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냄받은 사람이라면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국민교육헌장을 외운 때가 있었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시작합니다. 정말 우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태어났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까?

카알 힐티(Carl Hilty)는 <잠 못 이르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왜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사명을 발견한 사람, 그 사명을 발견한 날이 가장 중요한 날이요, 그 사명을 발견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케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말했습니다. <온 세계가 다 무너질지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그것, 내가 그것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온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것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서 살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나는 무엇을 <그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그것>입니다. 타이타닉호를 보면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에 죽음의 순간에도 돈을 찾으러 들어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돈 모으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자식, 어떤 사람은 자기의 건강,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세,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정,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의 그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위해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는 여기에 모든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뀐 사람입니다. 세상사람들처럼 현세적이 아니고 내세적이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바뀐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그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밥이나 먹고, 때가 되어 결혼해서 자식이나 낳고, 그 자식을 위해서 일평생동안 살다가 오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동물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삶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어서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의 역사에 동참시켜서 장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주인공되고 상속자되라고 우리를 보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버지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쓸까 생각하다가 선비를 찾아갔습니다. “저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묘비에 무엇을 쓰면 적당하겠습니까?”했더니 “자네 부친이 어떻게 사셨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저의 부친은 이렇게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이렇게 살았습니다.”하고 이야기를 하니까 세 마디를 써 주었습니다. <나다, 먹다, 죽다>.

아들이 그 묘비명(墓碑銘)을 보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참 가관입니다. 어떻게 이런 묘비명을 써 주었느냐고하니 “자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자네 아버지는 태어나서 평생을 먹다가 죽은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써 주었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이 세상의 것은 다 불 탈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신앙의 이력서에는 뭐가 있습니까? 죽는 순간에도 내가 <그것> 붙들고, <그것> 생각하고, <그것>을 죽을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인데 <그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고 무엇을 위해 내 인생을 투자해야 되겠습니까?


3. 우리의 사명은 구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내가 이루어야 할 최고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백성 삼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목적은, 내 사명은, 내가 예수 믿어서 내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이것이요, 또한 이것이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들입니다. 모두가 선교사들입니다. 하는 일은 다 다르다고 할지라도 복음을 위한 선교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복음전파의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재능들을 주셨습니다. 이 재능들을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흩어져서 살면서 그 지역, 그 사회, 그 분위기를 복음화시키라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로 이 구원 때문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도 처음에 오셔서 바로 이 구원을 설파했습니다. 마지막 가시면서도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물으실 첫 마디가 <너, 복음 전했느냐?>고 물으실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경 전체의 총 제목이 <구원>입니다. 구원받아야 예배가 있고, 구원받아야 교육이 있고, 구원받아야 성장이 있고, 구원받아야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을 것 아닙니까? 가장 근본적인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면 성경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 이일 하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나를 나의 구원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구원을 얻게하는 유일한 방주라는 사실이 확실히 믿어지십니까?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나의 사명이요, 이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임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같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4. 충성된 사자들

팔레스타인은 추수할 때가 가장 더운 때입니다. 날씨가 더울 뿐만 아니라 추수할 때는 고된 노등으로 인하여 몸에 땀이 흐릅니다. 지칩니다. 이럴 때 얼음냉수 한 그릇은 추수하는 일꾼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이요, 새로운 힘을 줍니다.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시원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이 사명을 잘 감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자들인데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을 보면 얼음냉수같이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불이 나게 만드는 삶을 살아왔습니까? 
 
아브라함의 사자 보세요. 아브라함의 사자는 엘리에셀입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보냅니다. <내 고향, 내 친족 집에 가서 자부감을 구해오라>고 하면서 수많은 은금패물을 여러 필의 나귀에 지워서 보냅니다.
이 사자가 아브라함이 준 패물을 가지고 도망가서 다른 곳에 가서 살면 종이 아니라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또 만약에 자부감을 못 구해오면 얼마나 야단을 맞겠습니까? 수천리 밖에 있는 어느 처녀가 요즘처럼 사진도 없고, 전화도 없는데 이 늙은 노인을 보고 따라 오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단숨에 달려갑니다. 믿음으로 달려갑니다. 가서 자부감을 발견합니다. 리브가의 부모에게 딸을 데려가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리브가의 부모가 말합니다. “당신이 수천리 길을 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지쳤겠소, 그러니까 한 열흘 정도 여기서 쉬었다가 가시오.”

그러나 엘리에셀은 “아닙니다. 내 주인이 지금 자부감을 구해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 빨리 가야만 합니다.”하고는 잠도 자지 않고 바로 일어나서 리브가를 데리고 주인에게로 돌아 갑니다.
이렇게 빨리 자부감을 구해 데리고 오는 엘리에셀을 보고 아브라함의 마음은 마치 얼음냉수를 마신 것같이 시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일을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엘리에셀을 아브라함은 이삭이 나기 전에 하나님께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게 아들을 주시겠다고요? 아들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내 집에는 엘리에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나의 상속자로 삼기를 원합니다.” 엘리에셀은 종이었지만 그만큼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의 사자가 나옵니다. 그는 고넬료의 보냄을 받아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서 데리고 오는데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 주인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유다 온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입니다.”하고 주인을 얼마나 좋게 이야기합니까. 그 당시는 유대인돠 헬라인이 상종하지 않던 시대인데 베드로에게 강요해서 그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래서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게 되고 가이사랴의 오순절이라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의 사자가 고넬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냉수 한 그릇을 먹고 싶은 계절입니다. 얼음냉수처럼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혼자만 시원한 물 마시지 말고 하나님께도 시원한 냉수를 드리리라고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뜨뜻미지근하여 구토증을 일으키는 물이 아니라  얼음냉수처럼 시원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름은 가을의 열매를 위해서 열매를 키워나가는 계절입니다. 내가 금년에 맺어야 할 구원의 열매를 위해서 지금부터 기도하고, 작정하고, 노력해서 주님의 마음을 얼음냉수처럼 시원하게 해 드리리라고 다짐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영혼의 추수철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기독교의 성장이 좀 정체가 되었습니다. 많이 걱정합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도 일만불 시대를 뛰어 넘어야 하는데 이것을 뛰어넘지 못 하면 남미와 같은 나라로 처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앙도 한 단계 뛰어 올라야 하는데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지금 얼마나 많은 추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추수밭에서 충성된 사자들 되어서,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들 되어서 얼음냉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주님께로 데려오게 될 때 하나님은 그렇게 시원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5. 또 다른 냉수

25절에는 또 다른 냉수가 나옵니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같다>고 했습니다. 주전 490년 아테네 군과 페르시아 군이 마라톤 평원(平原)에서 전쟁을 했습니다. 아테네 군사가 절대적으로 열세(劣勢)였습니다. 이길 가망이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지면 그 백성들은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아테네 군이 극적으로 전쟁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 기쁨을 아테네 백성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필리피데스(Philippides)라는 한 군사가 이 기쁜 소식을 아테네 시민에게 전하기 위해서 뛰어갑니다. 쉬지 않고 뛰어갑니다. 백리(百里)가 넘게 뛰어갔습니다. 가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우리가 이겼소!”하고 승전의 소식을 전하고는 탈진해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여기에서 마라톤 경기가 생겨지게 되었고,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가 42.195㎞이기 때문에 마라톤의 거리가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필리피데스가 전해 준 승전의 소식을 들었을 때 얼음냉수가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시원한, 더 기쁜 맛을 맛보았습니다. 

여기에 <먼 땅>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슴에도 있고, 이 장소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만큼 먼 곳도 없습니다.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귀라는 원수를 이기고, 우리가 이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되었다, 천국 백성되었다는 이 소식 보다도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그 보다 더 시원한 소식이 없고, 냉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얼음냉수처럼 시원하게 해 드리고, 이 복음을 들어서 구원얻은 사람에게 냉수처럼 시원하게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철입니다. 여름철이 되어서 냉장고에서 시원한 얼음냉수만 마시지 말고 그 냉수를 마시면서 이것을 생각하세요.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얼음냉수처럼 시원하게 해 드리고 있는가, 사람의 마음을 냉수처럼 시원하게 해 주고 있는가를 한번 살펴 보세요. 그래서 이 여름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얼음냉수를 드리리라, 복음을 전하여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충성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과 구원얻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리라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온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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