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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두 아들의 아버지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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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두 아들의 아버지
본문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칼빈대학의 모든 형제 자매들을 대표해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 여러분을 사용하시고 온누리교회에 많은 축복을 내리신 사실이 저에게는 큰 기쁨이 됩니다.
1990년대 중반에 저는 가족들과 함께 베이루트와 레바논에 살면서 중동 지방의 문명에 대해 깊은 체험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중동에 있으면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많은 비유와 예화들에 대한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비유들이 담고 있는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잃은 자를 향한 ‘대속의 사랑’
유대교와 기독교의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가 ‘대속’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시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희생시켜 제사를 드림으로써 대속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마지막 대속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 말씀에서 희생적인 대속 제물이 무엇인지 기막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두 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비유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 가족이 베이루트에 살았을 때, 무슬림 친구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오염시켰다고 말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냥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탕자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필요없는게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 와서 용서해 달라고 하니, 아버지는 그냥 용서해 줍니다. 십자가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그것을 무슬림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대속 제물이나, 희생 없이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30년 동안 중동에서 살았던 우리의 좋은 친구 켐 베일리 박사는 말하기를 ‘만약 중동 지방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는 하나님의 깊은 희생 대속 제물의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을 처음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 중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랍비였지만, 당시 종교 엘리트들이 갖고 있던 사고 방식에 젖어 있지 않았습니다.
처음 3절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가진 어떤 불만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불만에 대해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가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4절부터 7절 말씀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 헤매는 과부의 모습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의 불만에 대해 예수님이 응답으로 주신 세 번째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두 탕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1~ 32절 말씀입니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 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 당시 특유의 은유법을 사용해서 대속, 희생의 개념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했습니다. 세 가지 비유에서 보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축제를 여는 것이 주인공의 주된 행동입니다. 여기에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이 비유는 그 아버지와 그 아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저의 무슬림 친구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이야기는 희생에 관한 것이고, 대속에 관한 것이고, 자기를 버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들을 향한 ‘충격적인 사랑’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동양적 사고 방식에서 볼 때 아버지는 자신이 희생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큰 것을 버립니다. 그는 마을의 어른으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위엄, 체면, 권위를 아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짝처럼 포기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은 어린 아들(돌아온 탕자)이 유산을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에게 얼마나 무례하고 엄청난 요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산’이란 아버지가 죽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 지금 그냥 빨리 죽으십시오’라는 것과 같습니다.
유산을 상속받는다 하더라도 아들은 유지로서 그 유산을 마을을 위해 쓰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건방지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젊은이는 당장 자신의 몫을 떼어 달라고 합니다. 그는 상속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그냥 돈과 자유만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얘기를 듣고 있던 많은 무리들은 당연히 아버지가 그런 무례한 요구를 거절할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마을의 장래,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런 요구는 거절해야 한다고 여겼을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나 마을의 어른들은 ‘유산’을 달라고 요구한 아들을 가문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함으로써 사실상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있다는 것을 얘기를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음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요구를 거절하지도, 관계를 끊지도 않습니다. 바보처럼 아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면서 마을에서 자신의 권위를 실추시킵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악을 복수하거나 전수하지 않고 그대로 끌어안아 버립니다. 그의 사랑이 거부되었음에도 그는 어린 아들에게 자유를 줍니다. 아들은 이미 아들이기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비유의 후반부에는 돌아온 탕자의 형도 아들이기를 포기하고 자신을 종의 모습으로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어쨌든 탕자는 마을을 위해 써야 할 아버지의 돈을 들고 나가서 마음껏 탕진해 버립니다. 빈털털이가 되고 굶주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 배불리 먹지 못한 탕자는 아버지 집을 떠올리고 돌아가고자 결심합니다. 전통대로라면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격노해야 합니다.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와 마을의 전통을 깬 책임을 지고 꼼짝없이 대가를 치르고 사과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아들을 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돌아오기 전에 각본을 구성했습니다. 자기가 집에 오면 아들 되기를 포기하고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도저히 자기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시 마을 전통이 요구하는 엄청난 정죄 방식을 무시해 버립니다. 이것이 마을 어른으로서 한없이 지위를 격하시키는 것임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그 권리를 포기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수치를 얻고 돌아올 때 얼마나 힘들 것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때 마을의 수많은 아이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수치를 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 당하기 전에 먼저 나가서 아들을 끌어안습니다.
그러나 중동 지방에서 그 정도 나이와 지위를 갖춘 어른이 뛰어간다는 사실은 군중 앞에서 자신을 망신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먼지가 가득한 길을 마을의 원로격인 아버지가 달려나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원래 중동에서는 이십 세가 넘으면 절대로 뛰지 않습니다. 이십 세가 넘어 뛰어 다닌다면 남자로서 자신의 사회적 명예가 언제 땅에 떨어져 버릴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을의 원로인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뛴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한 문장으로 가볍게 넘어가고 있지만, 십중팔구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뛰었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 뛰기 위해 거추장스런 긴 옷을 묶었을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당시 문화권에서 뜀박질함으로써 자신을 마을의 수치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을 수치의 자리로 떨어뜨려 버린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희생해 버린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거절당하는 처절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는 자신을 완전히 땅에 추락시킴으로써 아들을 회복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탕자를 끌어안는 아버지
‘자기를 비우는 사랑’으로 아버지는 탕자 아들을 자신과 마을 공동체로 다시 회복시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돌아온 탕자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탕자의 형도 아버지와 부서진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도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형은 이때까지 자신이 한 모든 일들을 노예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자신을 대우한 것에 불만을 품고, 아버지가 동생을 지나치게 환영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불순종합니다. 그러나 탕자의 형을 다루는 과정에서도 아버지는 자신을 희생합니다. 자신을 수치의 자리에 두고 있습니다. 아마 마을의 원로들은 건방진 탕자 형의 요구에도 아버지가 벌을 주든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징벌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다시 전통을 깨고, 잃어버린 또 하나의 다른 탕자를 끌어안기 위해 나섭니다.
원본을 보면 두 탕자의 이야기는 8가지 장르로 나눠진 시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얘기는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형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끝에 한 부분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빠져 있습니다.
아버지와 탕자의 형이 대화하는 중간에 비유가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회복되어 다시 축제를 벌였는지도 모릅니다.

‘미완성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질문
이야기를 미완성으로 끝내면서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오늘 우리들에게 묻고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자기 희생의 사랑,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에 대한 너의 반응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비유란 말로써 어떤 그림을 그려 주는 것입니다.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을 그림적으로 좀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의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이 모든 것들은, 이 모든 복음의 이야기들은 하나의 비유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비유를 통해 제한되고 한정된 능력을 가진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복음이란 죄로 부서져버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삼위일체임을 믿습니다.
‘대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단순히 죄가 없는 한 존재를 인간을 위해 벌하셨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를 위한 사랑은 삼위일체가 협력해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비워내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엄청난 대가를 치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두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은 우리에게 기막힌 ‘구원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대속하신 사랑을 이해하고, 그 사랑에 젖어 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비유의 마지막 부분은 미완성으로 끝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주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부서진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한사람 한사람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크신 사랑을 보여 주는
탕자의 비유를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한 주의 삶을 시작할 때
이 비유가 주는 감동을 가슴에 안고
우리를 위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초로
힘차게 한 주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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