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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하보다 귀한 생명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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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보다 귀한 생명(마태복음 16:21-28)

<15분>이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장래가 유망한 30세의 한 청년이 박사논문을 제출해 놓고 그만 폐병이 들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의사의 진찰결과 그는 15분후면 죽을 것이라고 진단을 했습니다. 시간은 흘러갑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몇 분 남았습니까?”하고 묻습니다. 11분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우편 배달부가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억만장자인 그의 삼촌이 아무런 유족없이 죽었으므로 와서 전 재산을 상속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계속 시간이 흘러갑니다. 환자는 또 묻습니다. “몇 분 남았습니까?” 예, 9분 남았습니다. 두 번째 편지가 왔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연이어서 애인에게서 결혼을 승낙하는 편지도 도착을 했습니다. 평생을 노력해도 얻기 어려운 것을 다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그에게 조금도 위로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억만장자의 재산 상속권도, 박사 학위도, 결혼 승낙서도 모두 휴지 조각처럼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자기의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고 천하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천하를 소유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1.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은 귀합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생명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셀 수 없는 수많은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생명의 가치를 이렇게 크게 부여하고 있습니까?
사실 인간의 육체적인 기능을 보면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뛰기를 하면 치타보다 못합니다. 수영을 하면 물고기보다 못합니다. 새처럼 하늘을 날지도 못합니다. 냄새를 맡는데는 개보다 못합니다. 개가 얼마나 후각이 발달되어 있는지 마약을 발견한다든지, 총포를 발견한다든지, 숨어있는 사람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까 암에 걸린 사람도 냄새를 맡아서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개의 후각이 사람보다 1만 배나 발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청력은 토끼만도 못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어도 꽃 하나만 못합니다. 수명에 있어서는 거북이만도 못하고 힘에 있어서는 소나 코끼리만도 못한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마음인 이성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 외의 모든 존재는 본능적으로 살아갑니다. 이성(理性)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100년 전의 까치집을 보세요. 지금하고 꼭 같습니다. 1000년 전의 제비의 집을 보세요. 지금하고 꼭 같습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전혀 문화가 발달된다든지 보다 나은 삶을 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성을 주셔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과학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합니다. 날마다 문화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어제보다도 오늘, 오늘보다도 내일, 우리의 삶이 얼마나 향상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새처럼 날 수 없지만 비행기를 만들어서, 로켓트를 만들어서 새보다도 더 빠르게 하늘을 납니다. 달나라 뿐만 아니라 우주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물고기처럼 헤엄을 칠 수 없지만 배를 만들고 잠수함을 만들어서 물 속을 얼마나 빨리 왕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동물보다 빠르지 못하지만 기차를 만들고 자동차를 만들어서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짐승보다도 밝지 못하지만 현미경을 만들고 망원경을 만들어서 보다 작은 것을 보고 보다 멀리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소처럼 뿔이 없습니다. 뱀처럼 독이 없습니다. 사자나 호랑이처럼 강한 발톱과 이빨이 없지만 총을 만들어서 맹수들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성의 힘입니다. 어느 동물에게도 주지 않았던 이성을 우리에게 주어서 더 복되게 살아갈 수 있고 온 세계 만물을 다스리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여 보다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도덕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어느 동물이 보다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고민하거나 자살하는 짐승을 보았습니까? 어느 개가 개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을까 고민하거나 남의 음식을 훔쳐먹고 그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고민하고 얼굴을 가리는 개를 본적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보다 가치있게 살기 위해서, 보다 바르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서 철학을 논하고 윤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이 다 귀하지만 특별히 자기 자식을 귀하게 여깁니다. 왜 그렇게 귀하게 여깁니까? 자기의 핏줄을 타고 나서, 자기의 모양을 닮은 자식이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귀한가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하나님의 모양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의 분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로 삼아서 이 온 자연만물을 다스리며 지배하며 살아갈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실 인간에게 이런 가치를 부여해서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독교가 들어가면서부터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인간을 알면서부터 비로소 인간이 인간을 귀하게 여기고 내 가치를 인정하고 문화를 발달시켜 나가는 이런 일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여자의 권리나 어린아이의 인권이나 장애자의 인권이 무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존중 정신이 들어가면서 여자나 어린이나 장애자의 인권이 신장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곳마다 여자의 교육이 시작되어졌고 보육시설, 의료사업, 복지사업이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한 사람이 바로 ‘슈바이쩌’라는 사람 아닙니까? 슈바이쩌는 20세기가 나은 세계적인 성자입니다. 그는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23살에 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신학과 음악부분에 있어서 박사학위를 계속 받았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신앙생활 하면서 모든 생명의 신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는 흑인들을 보면서 아!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저들을 치료해 주어야 되겠다, 돌봐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박사가 되어서 아프리카 람바레네에 갔습니다. 고통받는 흑인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칩니다. 196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타임지는 그의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도 사랑하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그는 생명의 신성함을 깨달았습니다. 이 생명에 대한 존중, 생명을 사랑하는 사상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성경에서 왔습니다. 신앙에서 왔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 정말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또한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에 나 자신도 귀하게, 다른 사람도 귀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보육사업, 노인사업 복지사업이 다 기독교로부터 시작된 것 아닙니까? 반대로 유물론자, 공산주의자들 보세요. 그들은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내 생명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고 생명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 나를 보면 죄로 얼룩져 있습니다. 나의 능력은 부족합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보잘 것 없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귀하게 보시기 때문에 나는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라고, 나는 가치있는 생명이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나 자신을 인정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생명만 귀한 것이 아닙니다. 남의 생명도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생명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인줄 알고 대하게 될 때에 우리가 마음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생명의 고귀함을 인정해 주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 때에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내 생명이 귀한 줄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자기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최후의 수단인 자살을 하고, 또 남의 생명도 그렇게 보아서 동반자살을 하고 남의 생명도 짓밟아 버리고 사람이 사람을 파는 있을 수 없는 인신매매가 우리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돈 몇 푼을 위하여 사람죽이기를 아주 쉽게 생각하는 풍조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돈을 위해서는, 권세를 얻기 위해서는 목숨을 겁니다. 못할 짓이 없습니다. 인간의 의리고 인간의 윤리같은 것은 생각지 않습니다. 내 목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의 생명도 짓밟습니다. 내 생명 잃어버리고 그 돈 얻으면, 그 권력 얻으면 예수님의 표현으로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 천하는 이 세상에 있는 부귀영화, 우리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다 총칭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부귀영화를 위해서 목숨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천하를 얻고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처럼 천하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천하가 아니라 조그만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목숨을 겁니다.
사람이 천하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천하를 얻을 수 없지만 천하를 얻고도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전쟁에서 더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울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릴린 먼로는 이름없는 시골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모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돈도 명예도 다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살해 죽고 맙니다. 돈은 적당히 있으면 되는데 그 천문학적인 돈을 왜 부정한 방법으로 모았다가 감옥에 들어가고, 받았다가 지탄을 받는지 돈 맛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아닙니까? 이렇게 모으고 이렇게 얻은 것들이 귀하고 귀하지만 우리의 생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처럼 여기는데에 우리의 모순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모은 물질, 내가 죽고 나면 나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가족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나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먹지 않고 쓰지 않고 모아서 물려주는 그 재산, 자식이 그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까? 우리 자식은 실제 받았으니까 조금은 알겠지요. 그러나 손자, 그 다음 대의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손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명보험을 든다고 하지만 내 생명보험이 아닙니다. 사실은 가족을 위한 보험 아닙니까? 내가 가진 지식,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내가 가꾼 얼굴, 운동해서 단련한 체력, 죽고나면 모두 흙으로 돌아가는데 그것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고 사진들을 찍어대는데 죽고 나면 그것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자식들에게 오히려 짐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이름을 남긴들 그것이 내게 무엇이 유익합니까?
좋은 수의, 좋은 관, 호화스런 묘지를 갖춘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내가 죽었는데 좋은 옷을 입은들, 좋은 관에 들어간들, 좋은 묘지에 묻힌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다같이 썩을 것이요, 언젠가 내가 누웠던 묘지는 흔적도 없이 되게 될 것이고, 거기에 아파트가 세워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에게 생명이 있고서야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수님께서 힘주어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의 물질 소중히 여기지만 물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생명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2.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가장 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은 단순히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내 생명이 정말 천하보다 귀합니다. 생명과 바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아무리 이성적이고 아무리 위대한 삶을 살고 모든 것을 갖춘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 생명은 영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구원받은 영혼의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언젠가는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천하라고 할지라도 물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에게는 ‘생혼’ 이라는 혼이 있어요. 동물에게는 느끼는 ‘각혼’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혼이 없는 이런 것들은 죽음으로 다 끝납니다. 선(善)한 소가 죽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다 끝납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은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사람의 영혼은 영생합니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어서 사람이 되고 가치가 있는 것이지 영혼이 없어 보세요. 동물과 다를 바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은 부모님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일단 영혼이 떠나 보세요.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이 누워있는 방에 들어가기도 싫어하는 것이 부인들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뭐냐고 해서 한자에 사람 ‘인(人)’ 자를 쓰고 사람은 이와 같이 너하고 나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고 말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 해석 보다는 이런 해석이 더 맞는 것 같아요.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내려 온 영혼(丿)과 이 땅에서 취한 육체(乀)가 서로 조화(人)를 이룰 때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나면 거기에 갇혀있던 육체는 앞으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땅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에게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귀한 것이지 영혼이 없는 생명은 사람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는 영혼만 영생하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가는 영혼도 영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생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둘째사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천국에 가는 영혼만 영생합니다. 이 세상의 천하는 언젠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보다도 영원한 그것이 정말 귀한 것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셀 수 없는 은하계와 우주를 만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을 지불하고,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서 얻은 것이 구원받은 영혼, 우리의 생명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다면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독생자의 엄청난 피값을 지불하지 아니하고는 우리의 생명,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가 없어서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피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어 줄 만큼 가치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어 줄 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천지가 중요하겠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더 중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독생자를 죽게 하시고 나를 살리셨으니 우리는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어깨펴면서 사십시다. 내 비록 못나고, 내 비록 못 가져도, 내 비록 못 배워도, 내 비록 볼품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어 줄 만한 가치있는 존재다,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고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뿐만 아니라 너를 볼 때도 너는 하나님이 너를 위해서 죽어 줄 만한 가치있는 존재라는 눈으로 이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믿을 때에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입니다. 죄투성이인 나 자신을 보며 나 자신이 미워집니다. 그래서 자학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좀 더 하게 되면 나중에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집니다. 왜냐하면 나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나를 사랑하고, 내 건강관리를 잘 해야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을 더 잘 감당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하나님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어집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 때문에, 자기의 향락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사랑합니다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귀한 가치를 나에게 부여했으니 하나님 때문에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나 자신을 자긍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가장 귀한 것을 천한 것들과 바꾸지 않기 바랍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가치, 구원받은 영생하는 생명의 가치를 모르고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바꾸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25절을 다시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목숨은 목숨과 바꿀 것이 없을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꾸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492장을 보면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천하에 있는 물질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 물질보다 귀한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제일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이 영원한 기업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이 영원한 기업, 영생, 구원받은 영혼입니다. 구원받은 영혼, 하늘의 기업인 영생이 제일 귀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영생을, 참된 목숨을, 생명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바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꿀만한 가치있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바꾸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련이 140여년 전에 알라스카를 720만불에 미국에 팔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720만불은 요즘 돈과 그 가치가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큰 돈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돈으로 말하면 80억 쯤 되는 상당한 돈입니다. 군사적 요충지요, 지하자원의 보고요, 우리 남한보다도 15배나 큰 엄청난 이 땅을 돈 몇푼어치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또 넓은 땅이 있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의 몇푼어치 안되는 물질과 바꾸어 버리면, 편안한 삶과 바꾸어 버리면, 기분나쁘다고 감정과 바꾸어 버리면, 마음에 드는 사람과 바꾸어 버리면, 괜찮은 직장과 바꾸어 버리면 정신나간 짓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어느 정도의 물질이면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돈 어느 정도 준다면, 물질 어느 정도 준다면 우리에게 있는 이 영적인 생명과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한 1억원 쯤 주면 바꾸겠습니까? 한 10억 쯤 주면 영생이고 뭐고 바꿔버리겠습니까? 한 1,000억 정도 주면 영원한 생명이고 천국이고 포기하고 이 땅에서 1,000억 쓰다가 죽지 하면서 바꾸겠습니까? 사단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야기합니다. 천하를 다 보여주면서 이 천하를 다 네게 줄테니까 나에게 절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하나님만 섬기라>고 단호히 사단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천하를 준다고 해도 우리가 얻은 이 생명, 이 구원받은 생명과 바꾸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생에 비하면 천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영생을 얻고서야 비로소 우리가 가진 것이 의미가 있지, 영생을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가 이 땅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몇 푼 어치 안되는 물질과 신앙을 바꾸어 버리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 복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십일조의 원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심어서 복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원리인데, 십일조 설교만 해도 실족하여서 신앙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짓는다고 하면 교회 떠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는 일이 좀 안되면 신앙에 상처받아서 신앙을 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잘 대하지 않는다고, 기분 상하게 했다고, 무시한다고 해서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기독교가 아닌 사이비 이단 종교에서 잘못한 것을 보고 종교인이 저럴 수가 있느냐고 신앙을 버리고, 이름있는 신앙인이 실수했다고 저럴 수 있느냐고 기분 상한다고 영생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기분하고 내 영원한 생명하고 바꿔버리는 사람이 있다고요. 처녀총각 때는 잘 믿다가 마음에 드는 총각이 생기거나 처녀가 생기면 그 총각, 그 처녀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그 총각 처녀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고요. 권세를 위하여서 영원한 생명을 버려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가인 헤롯을 뭐라고 했습니까? <저 여우>라고 했습니다. 정치하다 보면 여우짓을 참 많이 해요. 여우가 어떤 특색이 있습니까? 변장을 잘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이렇게 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자기를 잘 바꾸는 것을 여우라고 하는데 정치가들 한번 보세요. 절에 가면 합장을 해서 불교신자 같고, 또 교회오면 또 예수 잘 믿는 사람되고, 천주교 가면 마리아에게 절하고,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런 짓들을 한다고요.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물질을 주면 영원한 생명하고 바꾸겠습니까? 어느 정도의 권력을 주면, 어느 정도의 행복을 주면, 어느 정도의 명예를 주면 영원한 생명하고 바꾸겠습니까? 인생에서 영원한 생명과 바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영생보다도 구원보다도 더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명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생명 잃어버리고 나면 천하를 얻고도 아무 소용이 없는데,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몇 푼 어치 안되는 그것과 생명을 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의 행복과 부귀와 명예와 바꿀 수 없네>라는 찬송처럼 그 모든 것을 다 준다고 할지라도 나의 영원한 생명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이 생명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가치는 육체의 생명에 있지 않습니다. 육체의 생명도 귀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는 이 생명은 영적인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가장 귀한 이 생명, 이 영적인 생명을 일시적이고 가치없는 것들을 위하여서 바꾸어 버리는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생명 버리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생명, 가장 귀한 생명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이 생명 때문에 어깨펴고 당당하게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그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대신 죽어 줄 만한 가치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형제를 마음대로 대하지 말고 어려운 일 있을 때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귀한 생명,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줄 알고, 가장 귀한 이 생명을 지켜 나가서 참된 생명으로 인해 따라오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영락의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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