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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고전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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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13)

어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나 맞아 엄마! 나 맞냐구?" 그러자 "그래 맞다"
그런데도 아이는 계속해서 "엄마 정말 나 맞아 ?"하고 묻습니다.
엄마는 "그래 정말 맞다니까"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는 "이상하다 그런데 왜 내 친구들이 나보고 너래"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에게 1인칭는 "나"라고 하고 "2인칭"는 너라고 하는 것이다.
1인칭인 내가 나를 가르킬 때는 "나"라고 하지만 2인칭인 네가 나를 부를 때는 "너"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와 아닌 모든 것은 3인칭이라 한다. 3인칭 중에는 성별을 구별하는 "그이" "그녀" 또는 사람이 아닌 물건을 가리킬 때 "그것" 이라고 부른다."
이 어려운 말을 어떻게 설명하며 또 그 아이가 어떻게 그 어려운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장성해야 합니다. 장성해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쓴 가정행전이라는 책에 보면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휴 미슬다인(Hugh Missildine)박사가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어른이 되었다고 하지만 장성한 어른 속에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있다"
이를 전문 용어로는 "성인아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사람이란 세월이 흐르면 몸도 마음도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것이 자연적인 순리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람이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지만 어떤 부분은 여전히 어린 아이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장성한 사람에게서 이런 성인 아동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6가지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는 남에게 지지 않고 꼭 이기려고 하는 것, 일등을 하고자 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2등이 있으니까 1등도 있는 것이요 지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기는 사람도 있는 것인데 2등을 하게 된다든지 지는 것을 너무 너무 고통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는 성인 아동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쉽게 분노하는 것이 성인 아동의 모습이랍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잘 웃고 잘 울고 화도 잘 내는 것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고 여러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도 쉽게 분노하고 쉽게 토라지는 것은 성인 아동의 모습입니다.
셋째는 의존적인 모습이 성인 아동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남이 도와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항상 타인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이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고 의존하려고만 하는 것은 성인 아동의 한 모습입니다.
넷째는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성인 아동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먹고 싶은 것은 죽어도 먹어야 하고 가지고 싶은 것은 죽어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어릴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살 수 있습니까?
성인들은 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참고 먹고 싶은 것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죽어도 하고 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가가 하고 싶은 것을 절제 할 수 없는 사람은 성인 아동입니다.
다섯째는 고독성이 성인 아동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들 중에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혼자서 노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도 보면 이런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인사하고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예배 후에 서로가 같이 식사도하고 같이 차도 나누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도무지 남하고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인 아동 중에 하나입니다.
여섯 번째는 자학적인 모습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싫어합니다. "나는 틀렸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면서 병적인 열등감에 빠져있습니다.
자애병(自愛炳)도 문제입니다만 자학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상 6가지 성인아동의 요소들이 장성하여 성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어린아이의 상태로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수 억짜리 저금통장을 맡긴다든지 집문서를 맡기지 않습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축복을 받고 장성한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모두 어린아이의 것들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 크게 쓰임 받고 크게 축복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첫째로 어린아이의 무엇을 버리라고 했습니까?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먼저는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것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의 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의 말을 할 때 더 예쁘게 보이고 귀엽게 보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처럼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세 살 뿐이 안된 아이가 "정치가 부패해서 문제이다. 경제도 수출이 안되고 경제가 악화되어서 걱정이다" 한다면 이 아이는 예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섭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장성한 사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장성해서 결혼까지 했는데 자기 아내에게 "여보! 맘마 줘 맘마 줘" 한다든지 아니면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밥상을 올리는데 "아버님 맘마 잡수세요" 한다면 얼마나 모자란 며느리겠습니까?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말을 해야 하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장성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성한 사람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기분 나쁘게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되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아직도 어린아이의 말을 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 예를 들어서 간혹 어떤 여자들은 "남자들은 다 늑대다" 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합니다.
여자들이 "남자들은 늑대다" 라고 하면 반대로 자신이 순수하게 보여진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잘 쓰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여 성도님은 목사인 제가 앞에 있는데도 아주 스스럼없이 "남자들은 다 늑대다" 라고 합니다. 그럴 때는 제가 늑대가 된 느낌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얼마나 많은 남자하고 살았는데 저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성도들은 성도답게 말을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화가 나고 죽을 일이 생겼어도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장성한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말을 버려야 합니다.

다음은 어린아이 같이 깨닫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또 어린아이는 깨닫는 것이 더딥니다.
어린아이의 깨닫는 것은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이상을 넘을 수 없습니다.
깨달으면 자기에게 유익이요 축복이 되는데도 깨닫는 것이 더딥니다.
롯을 보면 소돔성에서 전쟁을 만나서 모든 가족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깨닫고 소돔성에서 나와야 하는데 여전히 소돔성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도 잃고 아내도 잃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임금이 되어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를 경고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패하게 하기도 하시고 질병에 들게도 했습니다.그런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 불레셋 사람들에게 자신도 죽고 사랑하는 아들도 죽고 말았습니다.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아홉의 변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눅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이들을 고쳐 주셨는데 예수님께 와서 감사의 사례를 한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9명은 무엇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가상적으로 쓴 책입니다.
아홉 명의 사람 중에 첫째 사람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문둥병에서 나았다고는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정밀 검사를 받으려 갔습니다.
둘째 사람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이 문둥병이 이 순간에는 나은 것 같지만 몇 칠 후에는 재발할지도 모르고 확실히 알려면 몇 일을 기다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셋째 사람은 자신의 병이 너무 쉽게 나은 것을 보고 "내 병이 문둥병이 아니었나? 그동안 피부병을 문둥병으로 잘못 알고 있었지 않았나?" 하면서 자기의 병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려고 간 사람입니다.
넷째 사람은 "내 병은 나을 때가 되어서 나은 거야"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를 자연현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보면 병 낫기 위해 열심히 기도해 놓고 병이 나으면 때가 되어서 나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섯째 사람은 이런 일은 예수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선지자나 랍비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보면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고 축복 받은 것이 아니라 석가나 공자 모하멧트를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섯째 사람은 지나치게 예의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사례를 해야 되겠는데 지금은 빈손이지 않는가 다음에 드릴 것을 준비한 다음에 찾아가자 하는 사람입니다.
일곱째 사람은 전답과 부동산을 그대로 있는가 확인하려 간 사람입니다.
여덟째 사람은 헤어졌던 가족들 자녀들과 아내 부모를 만나야 하겠다고 간 사람입니다.
마지막 아홉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역사를 수고한 것으로 평가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해 준 일 이 무엇인가 특효약을 준 것도 아니고 손을 데고 안수 해 준 것도 아닌데 그러니 예수께 감사할 것도 없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마라아 사람만 예수께 달려와서 감사의 사례를 했습니다.
이 아홉명의 사람은 모두 더디 깨닫거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깨닫는 것이 없는 사람은 천하없는 축복과 은혜를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먼저 깨닫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고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생각의 특징은 넓게 생각하지 못하고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멀리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바로 코앞에 있는 것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 생각합니다.
생각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택시 기사가 한 밤중에 사람이 한적한 길을 운행하다가 여자 승객을 태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여자가 타니까 택시 안에 으스스 한 한기가 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하얀 소복에 입은 아주 예쁘게 생긴 여인인데 아무 표정이 없고 눈동자는 한 곳에 정지되어 있는 체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택시 기사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백 미러로 이 여인을 뒤를 보는데 이 여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고개를 돌려서 뒤를 보면 여인이 있는데 거울로 보면 여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귀신은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만 거울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빈성이 없고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음산하게 웃으면서 "흐흐흐 나는 귀신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 때 보통 택시 기사라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택시 기사가 무엇이라고 한 줄 아세요?
"누가 물어 보았어? 누가 물어 보았냐구?"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것은 관심도 없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관계된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희생이라든지 봉사라든지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이 되어야 남을 생각할 줄 압니다. 자기가 아닌 부모를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만 아는 어린아이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성도들은 어린아이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깨닫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 어린아이의 것들을 버려야 장성한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2,그러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에 보면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무엇을 강제적으로 빼앗으려고 하면 죽어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면 가진 것은 그냥 내 놓습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생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장성한 사람이 되면 저절로 어린아이의 일은 버리게 됩니다.
왜 영적인 어린아이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날마다 이런 시험 저런 시험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장성하지 못해서 입니다.
엡4:13-14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함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분량"이라고 하는 말과 또 하나는 "요동"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연결하면 장성한 분량의 정도에 따라서 요동의 정도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한 예를 들어서 몇 년 정도뿐이 되지 않은 나무는 작은 바람만 불어도 요동합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자라나는 것에 따라서 요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10년을 자랐으면 그 자란 만큼 흔들림이 덜 하고 30년을 자랐으면 30년을 자란 만큼 흔들림이 덜합니다.
장성한 만큼 요동치 않는 것이 자연적 법칙이요 영적 세계에서의 법칙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주안에서 장성한 성도들이 되었다고 한다면 장성한 만큼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가 쓴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란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흑인인 빌 킹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친구 백인과 어떤 길을 가고 있었는데 흑인 빌 킹은 공군 대령으로 독수리 마크가 있는 대령 복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백인 두 명이 나타나서 빌 킹이라는 사람에게 달려들어 발로 걷어차고 어깨에 달린 독수리 훈장을 잡아채어 길바닥에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넌 사기꾼이야 미 공군에서는 검둥이에게 대령 계급을 준 적이 없어" 하면서 갖은 행패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빌 킹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행동을 이해는 합니다만 나는 결코 사기꾼이 아닙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는 것같이 우리 흑인들도 사랑합니다." 하고 차분하게 알려 줍니다.
그래도 이 백인들은 갖은 행패를 다 부리고 돌아갔습니다.
혼자 남은 그는 눈물을 주르룩 흘리면서 길바닥에 내 던져진 독수리 계급장 마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백인 친구에게 "자네가 이 계급장을 다시 달아주게"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계급장을 달아준 친구는 그 후에 고백하기를
"그 때 나는 내 친구에게 계급장을 달라 주는 것만큼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 없었다"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화가 나고 분노가 솟구쳐 오릅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장성한 사람은 참습니다. 요동함이 없습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함을 받은 백성들을 넘어뜨리려고 갖은 미혹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첫 단계가 성도들을 요동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성한 분량에 있는 성도들은 마귀의 시험과 유혹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도 당합니다만 절대로 요동치는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남아 있겠습니까?
언제까지나 돌보아 주어야 하고 보살펴 주어야 하고 언제까지나 투정만 하면서 살겠습니까?
이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어린 아이로 남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께 절대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축복을 달라고 소원만 말하지 말고 먼저 내가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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