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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로 부름 받은 베드로 /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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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5:1-11
제목 : “제자로 부름 받은 베드로“

오늘의 말씀 속에는 갈릴리의 한 어부 불학 무식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전 세계에서는 설교자의 입을 통하여 수천, 수만 교회에서 베드로에 관한 설교가 선포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베드로에 관해서 씌여진 책이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낳으면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피터,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 넘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진 베드로 성당의 그 규모와 웅장함은 모든 사람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생각하여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베드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신앙을 본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비천했던 베드로가 왜 존귀한 베드로가 되었습니까? 왜 무명의 베드로가 유명한 베드로가 되었습니까? 왜 잊혀져야 할 베드로가 영원히 기억되는 베드로가 되었습니까? 왜 갈릴리 지방의 한 베드로가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까?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변화의 모습은 하늘나라에서 완벽하게 경험할 것이지마는 그 그림자를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 내가 만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이 세상에서도 이런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는 만남은 부모님과의 만남인데 부모님을 잘 만나면 그만큼 삶의 출발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5-6절을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자식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려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고 했습니다. 좋은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내가 신앙생활 잘하여서 자식들에게 복을 물려주어서 훗날 자식들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감사에 부모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다윗 같은 사람은 신앙생활 참으로 잘하여서 천대까지 복을 물려주는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해서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나게 해주시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을 우리는 운명적인, 숙명적인 만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친구들을 만나고 스승을 만납니다. 그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런 만남을 우리는 사회적인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 그 만남을 통해서 이씨조선이 시작되어집니다. 성경에도 참 아름다운 만남이 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만남,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요나단이 없는 다윗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는 김남일 이라는 선수가 히딩크를 만나니까 무명의 선수가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생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운명적인 만남, 사회적인 만남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생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부모님을 잘못 만나고 친구와 배우자를 잘못 만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 예수님만 잘 만나게 되면 그 모든 것을 다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는데 예수님 만나면 생명을 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따라서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과 모든 보화가 다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만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집니다.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온갖 축복을 다 누리게 되어져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이 변하고, 이 예수님을 만나면 사회가 변하고, 이 예수님 만나면 크게는 국가까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 임어당(林語堂)박사가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에게 충족함을 줄 수 없었다. 지난 생애를 돌이켜볼 때에 30년 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고아처럼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인생항해에서 표류하다가 지금은 정착했다. 내가 교회에 속하게 된 그 주일 아침은 본향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면 참된 만족과 참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지만 생명의 주님을 만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빈 그물이 찢어질 만큼 채워졌습니다. 그물을 씻는 허전함이 만족과 기쁨과 감격으로 채워졌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한 어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졌고 고기 잡는 베드로가 사람을 취하는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처음 만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지 아십니까? 5절에 보면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이었습니다.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8절에 기록된대로 <주님>으로서의 예수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는 선생으로서의 예수님, 성자로서의 예수님은 다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서의 예수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은 아직도 만나지 못한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지 선생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이신 예수님은 아무리 만나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거기에 베드로와 같은 삶의 변화와 축복과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경험했던 그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2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네가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예배 속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만나려고 노력해 보세요.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 속에 거하신다고 했는데 찬송 부를 때 그 찬송 속에서 계시는 주님을 만나려고 해보세요.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는데 기도하면서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려고 애써 보세요.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이신데 말씀 속에 선포되는 주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면 이 예배동안에 생명 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2. 베드로가 제자가 되는 과정-여러차례 접촉

베드로가 한순간에 이런 베드로가 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게 될 때까지 여러 단계가 있었어요.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세례요한에게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이 두 제자와 함께 서 있는데 저쪽으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저분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죄를 속하시는 바로 메시아다”고 가르치니까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었습니다. 그러고나서 안드레는 “아! 이분이야말로 정말로 메시아구나”하고 깨닫고 형인 베드로에게 가서 “형님, 내가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십시다”해서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베드로를 보신 예수님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베드로라 하리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여전히 자기의 직업인 어부의 일을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네 사람이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고기를 잡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전에 한번 예수님을 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날 따라가서 같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자기의 집으로 자기의 직업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 보면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제자로 나서기까지는 성경에 기록된 것만 해도 요한복음 1장에 안드레의 전도를 받아서 예수님에게 가서 게바라는 이름을 받았고,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같이 가서 복음을 전했고, 누가복음 5장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제서야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전적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부르셔도 세 번째가 되어서야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부담을 가지는 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즉시, 한번 전했을 때에 예수 믿고 교회에 나와야 된다는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세 번의 부르심을 입고서야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몇 번쯤의 권유와 부름을 받고 교회 나왔습니까? 교회나온지 얼마만에 신앙이 들어갔습니까? 아마 여러 번 되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전도하는 사람이 즉각 나와야 된다는 이런 생각 때문에 전도가 어렵게 생각되어집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를 세 번 불렀을 때에 비로소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있었다고 하면 우리는 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전도해서 즉각적으로 인도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러 차례 접촉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더 자주 만나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그들은 자연적으로 교회 나오게 될 것입니다.

3. 베드로가 제자가 되는 과정-여러사람의 관계로

뿐만 아니라 전도할 때 부담을 느끼는 것은 나 한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도가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계속해서 접촉하고 복음 전해서 교회 나오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통계상으로 보면 여섯 명 내지 일곱 명의 사람의 영향을 받아야만 교회 나온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면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 그의 형제 안드레가 있었습니다. 요한, 야고보, 빌립, 나다나엘,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이 그의 주변에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역에서 몇 사람을 전도대상자로 정하고 여러 사람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가다오다가 계속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사랑의 인사를 하면 그분이 교회 나오기가 훨씬 더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여섯 번 전도하여서 한사람이 교회 나온다고 한번 가정을 해 보십시다. 내가 만난 어떤 사람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네 번 째 전도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두 번만 더 전도해주면 그 사람은 교회 나올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고 하면 내가 복음을 잘 전해서 나온 결과도 되겠지마는 이미 이름 모를 누군가가 다섯 번을 만나고 전도해 놓았습니다. 내가 여섯 번째 만나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이 지금 당장 안나온다고 해서 부담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뜸들이는 역할을 잘 감당했다, 누군가가 몇 번 더 전하면 나오게 될 것이다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면 우리는 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가 뜸들여 놓은 밥을 먹듯이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을 만나면 한번에라도 내가 그들을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부담을 가지는 것이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전도는 낯선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아니고 나와 관계된 사람입니다. 전도는 남을 설득해서 되기도 하지만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계를 통해서 됩니다. 복음은 내가 한번에 전해서 그가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접촉을 통해서 나오게 됩니다. 복음은 내가 혼자서 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대여섯 사람이 함께 같이 기도하고 협력하게 될 때 훨씬 더 전도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도의 이러한 오해에서 해방되어서 정말 전도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여러 차례, 여러 사람의 영향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나도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많이 들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제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듣게하고 여러 사람의 권유를 받게 되면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4. 베드로가 기적을 체험한 이유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이런 축복을 받게 된 것도 순종할 때 얻게 된 축복입니다.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내가 한번 그물을 던져 보겠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뭐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말입니까? 밤이 맞도록 수고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기는 언제 잡는다고요? 밤에 잡는다는 말입니다. 밤에 잡기 때문에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 한 마리 못 잡았는데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있는 낮인데 시간적으로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아무데나 잡히는 것이 아니라 장소가 안 맞다는 거예요. 지금은 그물을 씻어놓았습니다. 밤에 또 그물을 내리려면 낮에는 잠을 좀 자야 합니다. 그런데 낮에 또 그물을 던졌다가 씻으려면 밤에 어떻게 다시 그물을 던지겠습니까?
또 자기는 노련한 어부인데 예수님은 목수입니다. 집 짓는 일이면 몰라도 고기 잡는 일은 베드로가 선생님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순종할 수 없는 조건들이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순종했더니 엄청난 고기가 잡혔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고기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선생에서 하나님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달라지게 되어졌습니다.
신앙은 곧 ‘순종‘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내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신앙이 있다는 증거요 순종하지 아니하면 신앙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에서 순종보다 더 좋은 품성이 없고 순종보다 더 좋은 행위가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적은 순종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성경의 모든 축복은 순종을 통하여 왔습니다. 순종하면 삽니다. 축복 받습니다. 불순종하면 복이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순종할 수 없는 것도 순종했더니 그것이 복이 됐습니다.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터툴리안은 말하기를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했습니다. 합리적이면 무엇 때문에 믿겠어요? 합리적이면 그냥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불합리해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안되나 하나님 말씀에는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식에서 벗어나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여기에 축복과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보세요. 이치에 맞고 합리적인 것이 많은가 아니면 불합리하고 또 비상식적인 것이 많은가 한번 살펴보세요. 아브라함에게 네 자식 바쳐서 번제로 드리라, 그게 상식에 맞는 이야기입니까? 기드온에게 몰려 온 삼만 이천 명의 군사들을 다 돌려보내고 겨우 삼백 명을 가지고 미디안을 치라니 그게 말이 되는 말입니까? 불 뱀에 물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놋뱀 만들어 가지고 쳐다보게 하라, 그러면 낫게 된다니 그게 이치에 맞는 말입니까? 여리고 성을 여섯 바퀴 돌고 마지막에는 또 일곱 바퀴 돌아라 그러면 성이 무너진다, 그게 말이 되는 말입니까? 물 위로 걸어오너라, 그게 말이 되는 말입니까? 포도주 대신 이 물을 떠다 주어라, 말이 되는 말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치에 맞지 아니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그러나 그 이치에 맞지 아니하는 말이라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축복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맞든지 안 맞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면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부흥회의 마지막 날 안수를 받는데 아마 저녁 9시 15분쯤부터 안수를 받기 시작했을 것인데 안수를 다 끝내고 나니까 6시 15분이었어요. 9시간동안 안수를 받았는데 참 우리영락 교인들 대단합니다. 어떻게 아홉시간을 기다려서 안수를 받을까? 어떤 권사님도 안수 받기 위해서 대단한 준비를 했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잘 안수를 받기 위해서 준비했다가 때가 되어져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 받고 집에 돌아오니까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말씀도 받았습니다. 찬송도 받았습니다. 예언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가다가 궁금해서 받은 말씀을 찾아보았어요. 창세기 몇 장 27절인데 찾아보니까 27절이 성경에 없어요. 그 장은 21절까지밖에 없어요.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속은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있는가하고 가슴이 답답해서 가다가 도로 돌아와서 또 안수해 달라고 했는데 강사목사님이 안 된다고 가라고해서 사람들에게 밀려 가지고 도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 생각하니까 얼마나 화가 나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화가 막 치밀어 오르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금요일 아침 일찍 제가 권사님께 전화를 했어요. “권사님, 몹시 마음 상하시지요. 제가 몇 가지 이야기만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는 안수받을 때 교회 안에는 찬송소리가 크게 울려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혼잡한 가운데서 안수를 받고 성경구절을 받았는데 21절을 27절이라고 잘못 듣고 쓸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흥회 내내 강사가 감사하라, 말을 바꾸라, 긍정적인 말을 하라고 계속해서 말씀을 했는데 이렇게 잘못된 구절, 없는 구절을 주어도 그래도 “네가 감사하느냐, 감사합니다”하고 감사하느냐, 안하느냐 하나님께서 권사님을 시험해 보는 기회도 될 수 있습니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합격하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100% 다 맞질 않습니다. 지금은 부흥사가 많아서 수백 명의 부흥사가 있지만 30-40년 전에는 손으로 꼽을 정도의 부흥사가 있었는데 지금도 사역하시는 한 유명한 부흥사 목사님이 그 당시에 아주 대단한 부흥사였는데 포항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강사목사님께서 교회종탑 밑을 파면 기름이 나올 거라고 해서 은혜 받았던 장로님들이 자기의 사재를 털어 투자를 해서 종탑 밑을 팠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부흥사 목사님은 가짜가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씩 예언이 틀리는 것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예언이 한 번씩 틀려야 예언하는 그 분이 우쭐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않지 자기가 예언한 것이 100% 다 맞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교만해져 결국에는 망하게 되어집니다. 자기의 예언이 100%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그가 겸손하여 하나님 앞에 내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교인들이 볼 때에 절대적인 계시(啓示)는 말씀 뿐임을 알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언이 한 번씩 틀리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도 권사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복이 될 것입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권사님께서 “안 그래도 내가 오늘 아침에 일찍 목사님께 가려고 했는데 목사님이 전화해 주시니까 성령의 역사로 이렇게 통하는 것 같습니다.”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집에 와서 생각하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속은 것 아닌가 해서 잠도 안 오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어서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들려주시더랍니다. “한 목사가 너의 목사냐? 네가 지금까지 한 목사 말씀 듣고 신앙생활 했느냐? 너의 목사는 윤 목사 아니냐, 윤 목사 말씀 듣고 네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했지, 한 목사 말씀 듣고 네가 지금까지 생활했느냐, 너의 목사는 윤 목사야. 한 목사를 위해서 기도해라”는 음성을 들었어요. 그래서 새벽까지 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감사가 넘쳤어요. 은혜가 넘쳤어요. 위로하기 위해서 전화했다가 제가 오히려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것 가운데서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니 어떠한 가운데서라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꾸 말씀으로 깨우치고 깨닫게 해 주시는데, 내게 감동을 주시는데 아직까지 내가 어떤 이유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오늘 이 시간부터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데도 감사하라 했으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충성할 수 없지만은 충성하라고 했으니까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드릴 것 없어도 드리라고 했으니까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시간 없어도 기도하라고 했으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파도 봉사하라고 했으니까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종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거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풍성한 삶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하라면 전도하세요. 그러면 명령하신대로 반드시 거기에 따른 축복이 약속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그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생각만 바꾸면 쉽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는 내가 복음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계를 가지면 되는 것이다, 내가 단번에 끝내는 것이 아니고 여러 번의 접촉을 통해서 가능하다, 나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협력하면 더 효과적인 전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면 전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기도하면 반드시 영혼이 돌아오게끔 되어져 있습니다. 전도하라 하시는 이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지면 거기에 따르는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의 이와 같은 원리를 본받아서 이제부터 전도하리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리라, 전도하라고 하는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리라 다짐하여 명령에 순종하는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이, 간증이 흘러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생이신 예수가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그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적을 주님께서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축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것까지 순종하여서 베드로와 같은 이런 기적, 이런 놀라운 풍성함을 늘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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