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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의 / 롬 3: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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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롬 3:20-28)

지 지난 주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지난주에는 두 번째 말씀으로 '하나님 중심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 절대주권'을 믿는 자는 성부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그러한 성부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본론으로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기 전에 이와 대조되는 '자기의 의'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 대해서는 로마서 9-11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10:2-3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에게는 굉장한 열심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른 열정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달음박질합니다. 그러나 이 때 달음박질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의로부터는 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지식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달리는 코스를 벗어나서 열심히 뛰는 것은 뛰는 만큼 잘못된 곳으로 가는 것이다. 차라리 바른 코스에서 절뚝절뚝하고 걸어가는 것이 다른 코스에서 몸부림치는 것보다 낫다." 칼빈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를 이루려는 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의'란 자기의 능력에 만족하고, 그 능력을 가지고 애를 써서 세우는 의를 말합니다. 칼빈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만큼 하나님의 호의를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스려 자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자기의 의에 대해 절망한 만큼 하나님의 의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무력과 무능, 그리고 연약함을 인식하는 자입니다.

여기에 반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얻는 의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특권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한 것은 그들만이 율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을 하였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였으며, 자신들이 세운 자기의 의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나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대해서 누가복음 18:9절에서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저 사람이 하는 것을 나는 안 합니다'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행위적인 '의'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의'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떠한 일을 하려고 주어졌습니까? 그것이 성취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순히 나에게 사죄를 주고, 지옥에 가지 않도록 나를 건져 주는 일만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순히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어떤 난제들이나 고통들이나 염려들을 삶 속에서 없애 버리거나, 또는 나를 끌어 잡아당기는 어떤 일에 대하여 상당량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 계획된 것입니까? 물론 그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정한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것 때문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구원 방식의 참된 의도와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욥의 친구가 욥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해답을 만족시키려 왔습니다. 욥기 25:4-6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복음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만족시키러 왔습니다. 복음의 임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 열납되고, 우리가 하나님 면전에 설 수 있게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별들도, 달들도, 천사도 그 앞에서는 감히 깨끗하다고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천사들이 그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들도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에 가리우는 것입니다. 감히 쳐다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편 130:3에서도 여호와 앞에 아무도 설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조금만 바라보더라도 우리의 눈을 뜰 수가 없고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어찌 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런 분 앞에서 인간의 숨은 의도까지도 다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내가 왕자인 꿈을 꾸었다고 하더라도 그 꿈에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의롭게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는, 돼지우리 안에 있는 돼지들이 '누가 똥이 덜 묻었는가'하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에게 큰 딸이 있는데, 이 딸이 힘이 조금 쎔니다. 이 애가 유치원에 다닐 때, 그 유치원에서 가장 팔씨름을 잘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딸이 집에 와서 "아빠 나는 팔 힘이 무지 쎄서 누구든지 내가 팔씨름하면 이길 수 있어! 아빠 나하고 한번 해볼래요?"했다고 합시다. 그 때 누가 이깁니까? 한 손가락으로 해도 내가 이깁니다. 결국 이렇게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의를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가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들통이 납니다. 그러니 누가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모습에서 이러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의 경우 그는 참으로 의로운 자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욥이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잃어버리고 또한 자신의 몸에 심한 병이 걸리므로 그의 부인은 욥에게 말하길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욥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언뜻 '야! 욥은 그 많은 시험 속에서도 참고 인내함으로 결국 하나님께 갑절의 복을 받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욥기를 자세히 보면 욥이 하나님을 원망은 안 했지만 그가 한편으로는 얼마나 자신의 신앙생활을 자신하며 교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식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고통에 처해 있을 때, 욥의 세 친구가 와서 욥을 위로하면서 그에게 권면을 합니다. 엘리바스가 권면하기를 욥기 4:7에서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하면서 욥이 당하는 고통이 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한 욥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욥 6:28).
빌닷이 권면 합니다. 8:2-7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의 대답 9:17-19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꺽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 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욥보다 힘이 쎄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고 심판을 하면 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고는 10:2에서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라고 항의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세번째 친구 소발이 권면합니다. 11:2-4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 구나." 이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죽을 수 밖에 없지만 그렇지만 의로운 내가 왜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야 하는 지 따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 "내가 스스로 의로운줄 아노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욥의 친구들이 와서 네 일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의탁하라는 충고에 욥이 항변하면서 31장에서도 자신의 무죄함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언제 내 행위가 허탄했던가?
내가 언제 내 마음에 음란을 품었던가?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았던가?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망을 막았던가?
내가 언제 원수의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고소해 했던가?

이렇게 자신의 신앙 생활을 자신했던 욥도 결국 자신에게 닥쳤던 일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욥기 23:3-5에서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이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늘 법정에 가서 하나님과 한번 변론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십니까?'하고 하나님과 변론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욥기의 줄거리인데, 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입니까? 결국 32:2절에서 엘리후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욥에게 노를 발하는데, 그 이유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이 변론하자고 한 내용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38장부터 41장까지 나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몇 군데 살펴보면, 38:4-6에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느니라."38:16-18에서는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느냐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상의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우주 만물의 기초를 누가 놓았느냐? 누가 창조했느냐? 또 그가운데 있는 것을 누가 운행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의 뜻을 네가 어찌 다 안다고 내 뜻에 대해서 불평하며 변론해 보겠다고 하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40:15절에서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찌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하시면서 40장 41절에서 하마와 악어와 같은 동물들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징그럽게 보이고 우리의 생각에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동물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듯이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욥아 네가 당하는 고통이 네게 무익하게 보이고 불필요하게 보일지라도 내가 너에게 고통을 준 것은 내가 오묘한 지혜를 가지고 네게 허락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후에 결국 욥이 깨닫고 교만했던 마음을 돌이키고 42:5-6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의로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 의가 우리에게 주어져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의를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의로울 수 있기 전에 그는 먼저 율법을 지켰어야 합니다. 그는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어야 합니다. 또 율법이 위협하는 모든 형벌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물든 인생은 그러한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로 그 의를 제공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한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마련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제공된 의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완전하게 모든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는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율법 아래 들어오신 후 율법에 대하여 완전한 순종을 드렸습니다. 그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지키셨습니다. 그는 완전하고 철저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이행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죄와, 모든 죄악들에 대해서 선고하는 율법의 모든 형벌을 다 처리하셨습니다. 그는 여러분과 저의 죄책을 스스로 짊어지시고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율법의 형벌이 그에게 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그 모든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일을 하라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공표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의를 지금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서 "전가하십니다(* 믿음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의롭게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 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정반대입니다. 믿음은 사람 안에 있는 어떠한 공로적인 모든 것과 상충됩니다. 믿음은, 내 공로면 충분하다고 말하도록 하는 사람 속에 있는 모든 성향을 부정하고 기각합니다. 사실 참된 믿음의 가치를 밝히려면 자기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도구요, 통로이지 수단이 아닙니다. 여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주어지는 통로란 말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서 나는 그 의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나타낸 것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믿음'에 대한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부르는 믿음을 믿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행위의 반대로 여깁니다. 그러나 행위의 반대가 믿음이 아닙니다. 행위의 반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행위로 자신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대조해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위'의 반대는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치는 의가 행위의 반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믿음은 율법의 반대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을 때 율법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서 성취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마지막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한 성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발견됩니다. 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믿음은 첫째로 믿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거기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1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라는 말씀을 통하여서, 믿음은 알고 믿을 뿐만 아니라 "확신한다(개역성경에서는 '환영한다'로 표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것들을 확신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고백)하였으니"라는 말을 통해 볼 때 믿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는 자칫 '신앙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주의는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 진정으로 관심도 없으면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느냐?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면전에 우리를 인도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의 목적입니다. 참된 믿음은 마음이 수반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에서 증거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인도되고, 움직임을 유발시키고, 변화와 고백을 유발시켜야 합니다. 입술로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4:19에 보면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죽은 것 같다고 하였는데 원문에 보면 이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아브라함의 몸은 이미 죽었습니다. 사라의 태도 이미 죽었습니다. 약속이 성취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는 끝장이 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단계에 왔습니다. 자기의 의가 완전히 죽음을 나타냅니다.

죽은 시체가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지하거나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전폭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으로 바뀝니다. 나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주 싫어하십니다. 자기에게 아무 것도 의지하거나, 자랑 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자기에게 아무 것도 의지하거나, 자랑 할 것이 없는데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의를 바라는 자들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신학자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1그램의 능력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1톤의 박식보다 낫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

역대하 14장부터 16장에 이런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왕 아사왕 때의 일입니다. 유다의 군사는 모두가 58만명이었는데, 이 때, 구스 사람 세라가 군사 100만명과 병거 삼백승을 이끌고 유다를 침략합니다. 58만명대 100만명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겠습니까? 요즈음은 최신식 무기가 많아서 최신식 무기를 가진 국가가 전쟁에 이기는데, 그 때는 그러한 무기가 없었고, 창과 방패로만 전쟁을 하기 때문에 수가 많은 쪽이 승리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유다 아사왕이 이것을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유다의 58만명의 군사로는 구스 대군 100만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때 아사왕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역대하 14:10-11절에 보면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는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으로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스 대군을 물리칩니다. 역대하 14:12-13에 보면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 지라, 아사와 그 좇는 자가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고 철저한 승리의 모습을 기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체험한 아사왕이 16장에 가보면,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대를 치러 올라 올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제는 아람왕을 의지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선견자 하나니를 보내어서 이런 말을 전합니다. 역대하 16:7-9절에 보면,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 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결국 이 말씀대로 전쟁이 있었고, 아사왕은 병들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높이고 나타내야지, 내 의를 높이고 나타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지,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별처럼 하늘 높이 떠야지 내가 별처럼 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높임 받게 되려고 할 때에,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이렇게 물러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선행 중에서 칭찬할 만한 것이 그 무엇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한 방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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