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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식보다 덕입니다. (고전 10:2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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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보다 덕입니다. (고전 10:23- 24)

[고린도전서 10장 23-24절]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전서 10장 31-33절]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호주 사람과 결혼하여 시드니에 살면서 한국인 교회에 다니는 여자 집사가 있다고 합니다. 하루는 이 여집사가 남편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과 정서적으로 통하지 않는 것이 많다보니 매우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급기야 한국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야! 이 녀석아“... 말다툼을 하다말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호주인 남편이 ’지금 당신이 한 한국말이 무슨 뜻이냐? 고 묻는 것입니다. 여집사는 엉겹결에 이 말은 한국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이 정도로 끝나버렸으면 좋지 않았겠습니까? 며칠 후 한인교회 목사님이 이 가정에 심방을 오셨습니다. 목사님이 오셨다고 여집사가 남편에게 알리자 호주인 남편은 영국신사답게 정중하면서도 반갑게 맞이하면서 서투른 한국어로 ‘목사님, 안뇽하세요?”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을 덥석 포옹하면서 한 마디 더 보태는 것이었습니다. ’야 이 녀석아‘(목사님은 호주인 남편이 심방 온 것을 싫어하는 뜻인 줄로 오해하지 않았을까요?)

이 재미있는 사례는 웃으면서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 남편에게 들켰을 때 이실직고를 하고 미안하다 했으면 될 것을 그 순간 모면하고자 꾀를 썼던 것입니다. 꾀를 쓰는 것, 머리만 쓰는 것, 마음(덕)을 열지 않고 머리만 쓰면 안됩니다.

1. 오늘 우리 사회(우리나라)는 지식 과잉시대입니다. 지식 포화상태입니다.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 우는 인터넷 사용 인구가 전 인구 비례로 세계 1위입니다.
정보, 기술(IT) 반도체 산업도 세계 톱 클라스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연구소가 조사한 바 국가 단위 국민 지능 부분에서 우리 나라가 세계 1위라고 발표하였습니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참모들, 국회의원들, 장관들, 검사, 판사, 변호사, 고위 공무원들 모두 지식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니 넘칩니다. 너무 똑똑합니다. 서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말을 교묘하게 너무 잘합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잘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공연히 걱정하고 공연히 구국기도, 중보 기도, 특히 기도한다고 울부짖는 셈입니다. 순진한 국민들만 죽어나는 것입니다. 위정자들은 하나 같이 머리가 얼마나 뛰어나던지 며칠 지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번번이 우리 국민들만 우롱을 당하고 맙니다. 번번이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입니다. 덕을 갖추지 못한 채 지식만을 쌓으면 위험합니다. 무서운 함정이 동시에 자랍니다. 하나님 없는 지식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지식은 위험합니다. 인간 위주의 지식은 결국 망합니다. 바벨탑 시대가 그러하고, 노아 시대가 그러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고전8:1-11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사47:10“(처녀 딸 바벨론이여)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사47:13“ 네가 네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오늘 우리 나라의 위정자들이 너무나 이 경우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덕은 보이지 않고 지식(꾀)만 넘쳐날 때 개인과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오랜 교훈입니다. 덕이 기초되지 않고 지식만 쌓일 때 원래부터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는 우리 인간은 그 교활한 지식으로 이기심과 교만이 끝없이 팽창하게 됩니다. 즉 사악한 지식은 욕심을 낳고, 욕심은 교만을 낳고, 결국 그 교만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하와가 그러했습니다.(창3:4-7) 기독교 초기 역사시대 헤롯 아그립바왕이 그러했습니다.(행12:21-23)

*지식만 많고 덕이 무시될 때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가장 옳다고 믿습니다. 무서운 ‘자기확신’입니다. 덕이 빠진 ‘자기확신’은 정말 위험합니다. 자기를 맹신합니다. 자기를 절대화합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설교도 듣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어도 듣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자기확신입니까? 지금 고린도교회의 내부 상황이 이러합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저마다 자기가 가장 똑똑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가장 옳습니다. 세례문제, 기도, 방언, 신유, 예언, 은사, 지도자, 연애, 결혼, 제사, 음식, 소송(고소, 고발) 이혼, 빈부격차, 지도자 선호(비교, 추종), 사도권 일정여부, 음행문제, 전도자(목회자) 대우문제 등등.... 고린도교회는 중구난방, 백가쟁명, 백인백색, 자기 제일주의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지를 볼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고전10:22을 한 번 살펴보십시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 것인가? 다른 신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런 중요한 문제(파급현상)에 대해서는 심사숙고 해 보지 않고 각자 자기 지식과 자기 판단을 절대시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고린도교회는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말썽 많고 문제 많은 교회라는 오명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2. 그러면 지식보다 덕을 세워야 한다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1) 양보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바울 사도는 중요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가하나....” 쉬운 성경은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고 여러분은 말하지만... 또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고들 그러지만...” 이렇게 되어 있으며 NIV성경에는 “Everything is permissible."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양심상으로나 법률상으로 하나 꺼릴 것이 없더라도 여러 사람을 생각하여 많이 양보하고, 많이 절제하고, 많이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양보, 절제, 사양....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말)입니까?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하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단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언어를 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무슨 엄청난 것을 양보해야 그것이 양보요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바람직한 것은 아주 작은 것, 아주 사소한 것부터 양보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크고 엄청난 것을 양보해야 그것이 양보인줄로 생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좀체 양보할 마음이 안 생겼고, 양보하면 죽는 줄로 생각하고 극한 대립과 적대행위를 예사로 하는 습관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웃지 못할 역사의 희극이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 시절, 신부들이 세례를 베풀고자 물을 떠다놓고 먼저 그 물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면 그 물은 성수 즉 ‘거룩한 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파리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그 물에 빠져 죽어버렸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세례예식을 행하는 성수가 오염된 것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물에 빠져 죽은 파리가 성화된 것입니까?

2) 본문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덕을 세운다는 것은 한 마디로 남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우화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양쪽 사람들 모두 팔이 굽혀지질 않는 것이 공통점입니다.(그러니 우화입니다.) 지옥은 어떤 광경일까요? 이렇게 굽혀지지 않는 팔로 억지로 밥숟갈을 자기 입에만 부어 넣으려고 합니다. 안간힘을 쓰면서 끝없이 노력하지만 그때마다 숟갈의 밥은 쏟아져 버립니다. 그럼에도 악을 쓰면서 여전히 막대기와 다를 바 없는 팔로서 밥숟가락을 자기 입으로 가져오려고 씨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어떤 광경일까요? 사람들이 둘씩둘씩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앞사람 입에 밥을 먹여 줍니다. 바로 이 차이입니다. ‘남을 먼저 생각해 주는’ 이 차이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나에게도 유익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대학의 한 원로교수가 이런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깨끗함이나 솔직함, 탈 권위주의, 그 외 주체성등의 면에서 노대통령은 큰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참으로 한탄하는 것은 그의 비상식과 경박함 때문입니다. 기자회견에서 전 국민이 지켜보는데 전 대우건설 사장의 실명을 거론하여 모욕한 것이 그 한 예입니다. 평범한 한 가정에서도 가장은 든든함을 보여 주어야 가족의 마음과 몸이 편합니다. 하물며 언행 하나가 큰 파장을 일으키는 대통령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기분과 고집과 자존심과 욕심만을 내세우고 다른 사람, 공동체, 수많은 사람들은 안중에 두지 않을 때 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고 피곤한 일입니까?
그러면 실제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적용을 해 보십시다.

* 남의 유익을 생각하여 말을 가려서 하도록 노력합시다.
삼사일언, 불평이나 빈정거리는 듯한 말 안 하기 (예;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그러나 사실 세례교인(주교교사, 찬양대원, 구역장, 집사 이상의 직보자...) 이상의 교인이라면 이런 불평을 해서는 안되지요. 본인이 교회의 주인이니까. 이것은 마치 남편(아내)이 가족들 듣는데서 ‘우리 집은 사랑이 없어’ 이렇게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급한 판단, 경솔한 비난, 경박한 무시와 멸시의 말, 무책임하고 남을 실망, 절망하게 하는 말, 확인되지 아니한 소문 무심코 퍼뜨리는 것, 험담, 내 목소리 크게 주장, 극단적인 선언‘

* 음식, 의복, 물건(사치품), 가재도구, 가옥, 돈(재정-경제), 내 힘, 내 능력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더라도 약한 사람을 생각해 보고, 덕이 될 수 있을는지를 먼저 헤아려 보는 것.

* 먼저 믿는 자로서 초신자들 보기에 덕이 안 되는 여러 경우들 주일결석, 수요예배 소홀, 새벽기도 무관심, 헌금생활 인색, 예배태도 성의부족, 구역예배 나태.

3)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고려해 보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가치관입니다. 최대 명제입니다. 우리의 말하는 것, 일하는 것, 열심 내는 것, 매일매일의 생활, 노력하고 연구하고 마음쓰고 애타하는 것,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 꿈을 이루는 것...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말 헛된 수고요, 무의미한 소란이요, 하루살이 벌레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정말 덧없는 인생에 불과할 것입니다.(시49:20) 그리고 대조할 것 잠1:7, 전12:13, 사43:21, 사1:2-4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 내용은 시작도, 과정도, 끝도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 목표가 되고 보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31절을 한 번 더 암송해 봅시다.(롬14:7-8)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덕을 세운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 같지 않는다면 그것은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에나 일에나 무엇이든지 항상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아닐까? 이것을 생각해 보고 묵상하고 기도하면 그 다음 우리가 선택하는 말이나 행동은 분명 덕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4)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전10:33)

우리가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덕은 저희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큰 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5:16과 벧전2:12이 정확하게 이 사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사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동(덕스러움)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예수를 믿게 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는 뜻임) 나의 삶, 언행, 배려등을 지켜보던 사람이 감동을 받고 교회 나올 마음이 생기고, 예수 믿을 마음이 생겨 등록을 하고 새 가족부 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덕을 세우는 것이 됩니다.

2004년, 우리 한국이 성공해야 할 과제는 온 나라가 ‘덕’을 공부하고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한국교회가 책임지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으로는 덕을 세울 자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거듭나고 성령님의 감화와 능력을 입은 사람만이 진정한 덕을 세워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국민의 19.5%를 점하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힘써 믿음의 덕을 세워나가면 우리나라는 잠간의 진통을 간단히 극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사 발전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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