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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 [고후 6: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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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고후6 : 1 - 13절 2004.4.18(일)
제 목 :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

신학박사요 의학박사이며 음악가였던
아프리카 성자 슈바이쩌 박사에게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 박사님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 ] 라고 묻자
[ 말로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요사이 말은 참 많습니다.
설교, 강연, 세미나, 각종 회의를 통해 좋은 말들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말을 실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조차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에게 "말은 잘한다"고 냉소를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실제 말보다는 행함이 앞서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로서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본래 이교도로서
남다른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체험해했지만 지상 교회가 대부분 그렇듯이 많은 문제를 앉고 있었습니다
1) 교회 안에 편파적인 감정 때문에 파당이 생겨서 교인들 간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2) 은사를 받아 신앙의 열정은 있어지마는 성숙하지 못해 교회의 질서와 덕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3) 가만히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이 선동하여 교역자의 권위에 대해 도전과 비판이 일고 있었습니다.
4) 복음의 자유를 오해하여 부도덕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듣고는 바울은 도대체 은혜를 어떻게 받았기에 문제, 문제 투성이냐? 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의 말씀 속에서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말뿐인 신앙이 아닌지 점검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합니다.
왜 이런 권면을 합니까?

1. 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할까요?(1절)

1절에 보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들이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데 필수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 은혜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넓은 의미에서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푼 모든 호의와 친절을 말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어떤 때는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시고, 자녀 삼으신 은혜 즉 복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은혜란 말은 성령의 감화력을 말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할 때 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 설교를 통한 성령의 감화력을 말합니다.
이 성령의 감화력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성도답게 살게하며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봉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구원의 확신과 구원받은 자로서의 승리의 삶과 나아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충성, 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은혜를 명사-카리스- 선물, 동사는 <카이로>라고 합니다.
그 뜻은 "유쾌하다,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유쾌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행복합니다.
은혜받으면 삶의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를 받되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약점을 들추어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습니까?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신앙의 삶의 방종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자신을 더럽히는 삶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7:1절
[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과거를 청산하고 거룩한 삶, 깨끗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면 잘 어울리는 교인 있지요?
어떤 교인은 교회 안에서 은혜도 잘 받고 세상 나가서는 할 것 다하고 교회 다니는 교인들, 심지어 직분자들도 있습니다.
왜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면 은혜를 받긴 받아도 잘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2)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로 말미암아 복음의 감격이 없어지고 율법신앙만 남아있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은혜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가슴에 복음의 감격이 넘칩니다.
삶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럴 때 신앙생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의 감동과 역사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신앙생활이 즐겁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 떨어지거나 은혜를 바로 받지 못한 교인은 신앙생활을 해도 율법의 잣대로만 가지고 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하게 됩니다.
이런 교인의 특징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비난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고전3:9절에도 바울은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 ] 라고 합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받지 못하면, 교회에 직분자가 되어 봉사하면서도 누가 무슨 말 한마디만 해도 시험들고 환경만 조금 변해도 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교회 안에 문제를 두고 그 문제의 해결점을 고린도교회가 처음부터 은혜를 바로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진단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은혜를 받는데 있어서 유념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2절 [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도왔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이 구절은 사49:8절의 인용으로서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은혜 받으면 삶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실 때 반드시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때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 은혜는 지나가는 소낙비와 같다 ] 고 하면서
[ 마귀 중에 제일 고단수 마귀는 차차 마귀 ] 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던 마귀는, 항상 인간의 본성을 통해서 유혹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합리적이며 이유가 타당하도록 만들어 은혜받을 기회를 뒤로 미루게 합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은혜의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지금 은혜를 사모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은혜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 은혜라는 것은 쇳물 같아서 식기 전에 틀에 담아야지
식고 나면 아무리 힘을 써도 소용이 없다 ] 고합니다.
영국 한 박물관에 머리는 말의 머리이고 꼬리는 새의 꼬리로 된 모형의 동물이 있는데 그 이름이 <기회>라고 합니다.
기회는 앞으로 올 때는 말의 머리와 같아서 붙잡고 올라 탈수가 있지만 한 번 뒤로 지나간 다음에는 아무리 붙잡으려고 해도 새의 꼬리와 같이 미끄럽고 잘 빠져나가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됩니다.
본문은 은혜와 구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2절에 [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구원의 때가 있듯이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자서전에서 [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지금이다 ] 라고 합니다.
지금 은혜 받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까?
3.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할까요?(3-4절)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할 이유를 3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이 직책을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
여기에 훼방을 받는다는 말은 조롱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리끼지 않는다는 말은 걸려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 직분자들 잘 들어 보세요
오늘 교회의 직분을 사람들이 존경합니까? 조롱합니까?
직분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라고 믿습니까?
아니면 직분이 되려 짐분이 되어 걸려 넘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봉사가 되려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것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현주씨의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밀가루를 싣고 빵 공장에 가는 트럭과 시멘트를 싣고 벽돌공장에 가는 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멈추어 섰습니다.
트럭 운전사들은 화장실에 갔다 와서 트럭을 탔는데 그만 서로 바꿔 타고 말았습니다.
두 운전수는 똑같이 <알게 뭐야>하고 차를 몰아 목적지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시멘트를 실은 트럭은 빵공장으로 가고 밀가루를 실은 트럭은 벽돌공장으로 간 것이지요.
공장기술자는 <알게 뭐야>라고 말하면서 빵 반죽에 시멘트를 붓고 벽돌반죽에다가 밀가루를 쏟아 부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빵이 가정에 배달되고 벽돌은 집 짖는 데로 배달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쪽에서는 집이 무너져 사람들이 깔려 죽고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이빨이 부러진 채 배를 움켜쥐어야 했습니다
물론 동화 속에 이야기이지만 오늘 교회 안에서 <알게 뭐냐> 하는 직분자들 때문에 교회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은혜 받지 못한 직분자의 특징이 바로 알게 뭐냐? 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되던 간에, 청소년들이 어디로 좇아가던 간에 주일학교가 문을 닫게 생겼어도 - 알게 뭐냐?

그러나 은혜 받은 성도 직분자는 다릅니다.

이렇게 은혜 받은 성도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4-5절에 [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 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
이 말은 하나님의 일군으로 주의 일하는데 환경에 메이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은혜받은 성도는 내가 알게 뭐냐? 가 아니라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충성한다는 말입니다.
7절에 바울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사용하는 의의 병기로 좌우한다고 합니다.
신학자 <위즈비>의 바울에 대한 평가의 말 기억하시죠?
[ 바울은 온도계가 아니고 온도 조절계이다 ]
그렇기 때문에 고후11:25절 이하에 [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 가운데 지내냈으며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 ]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
이렇게 은혜 받은 성도는 <알게 뭐냐?> 가 아니라오히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어 교회를 염려하는 교인이요
환경까지라도 선용하여 주의 일 하는 자라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7절 말씀같이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좌우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일군으로 충성할 수 있느냐?
6-7절 말씀 [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즉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거룩한 삶과, 성령의 감동과, 진리의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군으로 충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내일 교우여러분 !
우리는 은혜 받는데 최우선적이 되어야 하고, 은혜를 바로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아야 바른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은혜 받아야 하나님의 일군으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은혜 받아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삶이 어떻게 변할까요?

이렇게 은혜받은 성도에게 나타나는 변화의 삶이 있습니다.
8-10절까지에서 역동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우리 주위를 돌아 보면 명함과 이름은 그럴 듯 하지만 행동은 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명한 자 같으나 실상은 졸장부가 있는가 하면 부자인 것 같으나 마음은 걸베이 - 걸렁뱅이요.
모든 것을 가진 자 같으나 속이 빈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성도는 그 반대입니다.

노벨이 노년에 어느 날 아침, 신문을 펼쳐들고 깜짝 놀랐습니다.
조간신문 1면에 [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하다 ]는 제목의 큰 기사가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다이나마이트의 왕이 죽다 ]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기사는 불란서의 한 기자가 동명이인의 죽음을 잘못 알고 보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노벨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 로서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 평화와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노벨상"을 마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후대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끄럼 없이 살아서 후대에 기쁨을 주는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역동적인 삶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실 이 말씀을 [ 역설적인 진리의 수호자 ] 라는 제목으로 여러 번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진의를 다 못 깨달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무명한 자가 유명한 자가 되고
어떻게 근심하는 자가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어떻게 가난한 자가 부자 같이 살 수 있으며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 수 있느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송명희 시인의 시가 기억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였네

바로 이것입니다. 남이 없는 것 가지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남이 없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전도 간증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어떤 자매가 돈 많은 부자집 아들과 결혼을 하여 잘사니까
유명한 백화점이란 백화점을 다 돌아다니면서 유명한 브랜드의 명품을 사서 몸에 걸치고, 몸에 치장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자기 동서가 오면 그것을 내놓고 자랑을 합니다.
이것은 어느 백화점에서 얼마 주고 샀고, 이것은 어느 나라 것인데 어느 인기 스타가 입고 다니는데 하며 자랑을 널어놓을 때마다 동서는 "형님, 참 좋으시네요" 하고 대답을 합니다. 동서는 아주 가난하게 삽니다.
그런데 시골 친정에 가면 올 때마다 고춧가루랑, 마늘이랑 쌀을 가져와서는 "형님, 이것은 우리 친정에서 직접 재배한 무공해의 농산물입니다.
이것 작지만 드세요" 하고는 자주 그렇게 찾아오는데 볼 때마다 웃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몇 번 받아 본 부자 동서는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서는 가난한 집에 살면서 저렇게 인심이 후하고, 마음이 늘 기쁘게 사는데 나는 이렇게 돈으로 치장을 하고 다녀도 마음이 늘 편하지 않고 남편의 돈 한푼이라도 더 우려내려고 온갖 아양을 떨면서 살아야 하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자기가 비참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서가 보통 사람 같으면 그렇게 자랑을 하면 눈이 흘겨지고 상대를 하지 않을 텐데 전혀 그런 것을 느낄 수 없고 그럴 때마다 "형님, 그래요" 하면서 늘 밝는 표정을 하고 대하니 저 동서는 나보다 행복해 보여 하다가 어느 날 전화를 합니다.
[ 동서, 내가 동서를 생각 할 때 한가지 의문 나는 것이 있는데 어쩌면 동서는 그렇게 가진 것이 없는데도 넉넉한 마음으로 살지?]
그러자 기회는 왔다 싶어서 동서는
[ 형님, 저는 형님처럼 가진 것은 없지만 내 속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 집은 작아도 내 마음이 거할 집이 넓고, 먹는 것이 넉넉지 못해도 우리 가족은 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고살며, 비록 입은 옷이 초라해도 사랑의 주님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넉넉합니다. 형님도 예수님을 믿으시지요"
그 말에 부자 동서가 감동을 받고 그 다음 주 부터 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지금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어려운 교인들과 장애우를 섬기며 내가 왜 이 기쁨을 몰랐을까? 한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난해도 믿음으로 큰 부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입니다.
이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세상의 부자들은 물질은 가득하나 이것이 없지 않습니까?
이것? 무엇요? 나사렛 예수 말입니다.
사실 우리 예수쟁이들도 은과 금이 있어도 예수가 없으면 은과 금이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누가 무명한 자고 유명한 자입니까?
누가 가난한 자고 부요한 자입니까?
누가 아무 것도 없는 자이고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까?
바로 예수를 소유한 자가 유명한 자요 부요한 자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믿습니까?
사실 저는 믿기는 믿었지마는 실감나게 믿지를 못했습니다.
왜? 어떻게 가난한 자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고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가난한 자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습니까?

저는 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보는 가운데 이 말씀이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수난과 고통과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람들을 부요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였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마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이 예수 생명을 소유하고 예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가난한 자 같으나 정말 부요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드리지 아니했더라면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한들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가 부요함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가난한 자이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이 무엇인가?
바로 남을 위해 몸바쳐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가는 것입니다.

문 복남 할머니는 젊어서 미장원을 운영하며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평소에 불상한 이웃을 수없이도 돌봐 주고도 정성껏 모은 돈 10억을 세상을 떠나면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 달라고 선듯 내놓았습니다.
문 할머니는 엄청나게 가난한 큰 부자였습니다.

부산의 권태성 할아버지는 팔순 노인이면서 암이 걸렸는데 평생 모은 재산 50억을 경성대학에 기탁하였습니다.
권태성 할아버지는 엄청나게 가난하면서도 엄청나게 큰 부자였습니다. 이 일들은 실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내일 가족 여러분 ~!
많이 가진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이 주고 간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문복남 할머니와 권태성 할아버지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주영 할아버지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유족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 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가 생전에 여러 곳에 희사한 금액이 몇 천억이 되겠지만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공한 사람이지만 위대한 사람은 아닙니다.
위대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 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육이 사람들을 성공하는 사람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정주영 회장이 죽고 난 다음에 어느 대학에서 정주영 학과를 신설할 계획이라는 내용을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정주영 할아버지를 연구하여 그 분처럼 돈 많이 버는 성공하게 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을 길러야 국가의 장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공한 분이 아니고 위대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몸도 영혼도 다 주신 분입니다.
가난한 자를 짓밟고 부자가 된 성공한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비록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는 예수처럼 위대한 삶을 살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다 줄 수 있는 사람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한 자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결국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받은 또 한가지 내적인 변화의 증거가 있습니다.

11-13절까지 보면 은혜받은 성도는 마음이 넓어집니다.
고린도 교인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은사를 받았다고 하지만 은혜와 은사를 어떻게 받았는지 다른 것하고 틀린 것하고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하고 다르면 무조건 틀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가 최고고 남이 받은 은사는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름없이 서로 용납하지 못합니다.
뭔가 은혜를 받긴 받았는데 잘못 받았습니다.
은혜는 결코 동정이나 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성장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 많이 모이면 성장이겠습니까?
사람들 많이 모이는 거냐 축구장 야구장 가면 더 많이 모이지요
그러나 교회와 축구장이 다른 것은 마치고 나오면서 오늘 참 좋았어 하는 것하고 나 오늘 은혜 받았어 하는 것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변화 중에 변화가 이렇게 마음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용서할 줄 알고, 관용할 줄 알고, 포용할 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13절 [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
은혜 받아 마음이 넓어지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빌4:5절에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관용하는 마음, 그 사람의 축복의 그릇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맘때쯤 김포 비행장에 내리면 생각나는 게 있어요
강화도 벤뎅이 회입니다.
벤뎅이란 고기는 성질이 급해서 잡히면 곧 죽습니다.
그리고 속 내장이 별로 없어요
제가 왜 벤뎅이 이야기하는고 하면 속이 좁은 사람을 벤뎅이 속 같다고 하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이 뭔가 달라야지 속이 벤뎅이 속같으면 안되지요.
벤뎅이 속 같은 사람도 은혜 받으면 부푼 복어 배같이 넓어 질 줄 믿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13절 [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 은혜 받아 마음이 넓어지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받으려는 욕구도 있고 주려는 욕구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받으려는 마음은 크지만 주려는 마음은 작습니다.
은혜 받아 주려는 마음이 커져서 주는 마음이 넓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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