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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살아가기 (잠언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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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믿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분을 살리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복된 자리로 나아오신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믿음이란 말은 교회에 오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믿음이란 어떻게 역사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어떻게 서로 다릅니까?

믿음이란 너무 큰 의미를 담고 있어서 한 아름으로는 다 안을 수 없는 거목과도 같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믿음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우리가 살아가는데 믿음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했는지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관점에서 말하느냐에 따라서 뜻이 아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단순히 적극적인 태도를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 하나님을 생각하고 날마다 성경을 읽으면 믿음이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의지해서 믿음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5-6)

믿음이란 마음을 다해서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다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에 역사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정의뿐 아니라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도록 도와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셔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든지 아니면 새로 신앙생활을 출발한 사람이든지 본문말씀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니면 믿음의 생활을 활기차게 하고 계신 분이라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구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을 살펴봅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라” 의뢰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믿고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4월 15일 총선 때에 한 분을 선택해서 그 분에게 중구와 나라 살림에 대해서 믿고 의탁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말씀은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긴다는 뜻입니다.

신뢰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분께 내 인생 전부를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마치 한 여인이 한 남자에게 자기 삶을 맡기는 것과 같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자기 인생에 데리고 오는 것과 같습니다. 남, 여 누구든지 인생은 누구를 배우자로 맞아들이느냐에 따라서 한 평생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의 영원한 운명은 누구를 자기 신으로 섬기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겁니다.

배우자는 한평생 영향을 줄 수가 있지만 누구를 하나님으로 모시냐는 것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우리의 숨이 끊어진 후의 영원한 세계에 까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일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 무엇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쩌면 전부를 얻든지, 아니면 전부를 잃든지가 달린 문제로 보일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생각하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면 전부를 얻는 것이지만 믿지 않는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하나님이 없다면 신앙생활 한다고 이 화창한 날에 예배의 장소에 나온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보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12:30) 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 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시고 영원한 역사의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하죠. “죽어봐야 알지, 천당이 있는지 내세가 있는지는 죽어봐야 알지” 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어보면 이미 늦습니다. 그때는 개표가 끝난 뒤나 마찬가집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숨쉬며 살아 있을 때에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는 데는 그냥 안전한 것이 좋지’ 하며 그냥 되는대로 살다보면 여러분의 인생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험이긴 하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면 여러분은 바라는 모든 것을 얻는 동시에 여러분이 생각하지도 않은, 상상해 본적도 없는, 기도 해 본적도 없는 엄청난 것을 여러분은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말씀을 했어요. 주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준비한 것은 아무도 생각해 본적이 없고 아무 눈이 본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는 것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의외로 성경책을 읽어보면 천국에 대한 묘사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세상에서 쓰는 우리들의 언어로는 그 영광을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그리스도의 수난)를 봤는데 보고 난 느낌은 ‘역시 영화구나’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깐 우리 교회에서 제일 잘 생긴 목사님께서 하는 말씀이 “마음이 강팍한 사람은 할 수 없다”고 하더래요. 제가 마음이 강팍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저는 예수의 영화는 제대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일단 주연 배우를 고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나이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고 하죠.

어떤 배우도 내가 사모하고 내가 칭송하며 내가 모시는 그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리한 것이거든요. 천국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성령께서도 자세하게 묘사하지도 않은 것을 사람이 하려고 하면 그것은 너무 유치한 천국이 되고 맙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그려 놓은 천국 같으면 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내용도 있다고 합니다. 천국가면 전도한 사람 숫자만큼 아파트 평수를 나눠 준다고 하는데 난 그런 천국이라면 관심이 없습니다. 전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예수 믿고 보니깐 좋아서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하고 평수하고 관련이 있으면 난 세상에서 한판하고 말겠습니다.

여러분이 내딛는 길의 종착지가 어딘지 지금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믿지 않는 분들의 눈에는 투기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봐야 알지’ 하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뢰할 만합니다. 그 분의 말씀은 천지가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 분의 말씀에 전부를 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지금 몇 차례 교회에 나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는 마음에 와 닿은 무엇이 있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그 분에 대해서 알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살피길 원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주저되는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약간의 두려움도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교회가 여러분을 보살핀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 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물러서지 마십시오. 이제 믿음의 모험을 시작하여 나선 길을 끝가지 가시길 바랍니다. 어쩌면 처음 교회에 오신 분도 그런면에서 믿음의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 해 오시던 분도 역시 믿음의 도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서 움직이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결단에 따라서 주님 앞에 서는 날, 평가될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도 있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엄청난 책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에서 이제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내 삶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행한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의 지도와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 더 이상 울타리에 걸터앉아 있지 않겠습니다. 넘어서서 주님께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전향하는 첩자처럼, 아니면 투항하는 군인처럼 주님께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해 주님 사랑하길 원합니다..는 그 결심이 여러분의 삶을 바꿔 놓을 것입니다.

믿음의 모험을 받아드리는 실제적인 원리는 80대 20의 원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80대 20이 무슨 말이냐면 성경을 통해서 다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분명한 사실들이 80%가 됩니다. 그런데 20% 정도가 애매모호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는지 80%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 수 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께 기도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 내가 무조건 순종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간다. 이렇게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이 80%에 대해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업을 할 때도 정직하게 하고 서로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80%는 분명한데 20%는 좀 뜻을 알기가 어려운게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이사를 가야할지 아니면 직장을 옮겨야 할지에 대해서는 그처럼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도 없어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80%가 있잖아요. 여러분이 아는 80%를 행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20%는 때가 되면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루는 24시간입니다. 그것을 15분 단위로 나눠서 1시간을 사용하고 있는데 한 시간을 넷으로 나눠 쓰면 하루는 96토막입니다. 이 96토막가운데서 거의 100개로 나눈 이것 중에서 단 15분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내놓지 않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이 내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100개 있는 것 중에서 한개도 주님을 위해서 드릴 수 없다면 여러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여러분 자신이 주인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주인이 되십니까? 예수님께 “주님!”이라고 했다면 그 분이 주인 노릇을 하셔야죠. 이제부터는 복 있는 사람 5,6월 책자가 나왔는데 지금까지는 못했더라도 5월달 부터는 착실하게 해 보십시다. 해보려고 마음먹으면 됩니다. 얼마를 주님을 위해서 내어 놓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에게 96토막을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 중에서 한토막이라도 내어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둘째로 (마음을 다해 주님을 신뢰하고) 여러분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잠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처음에는 옳고 바른 길인 줄 알았는데 아주 잘못된 것임을 뒤에야 깨닫게 된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가끔 살다보면 그런 일을 겪기도 하는데 깨닫고 난 후는 이미 너무 늦습니다. 왜 그런 실수를 합니까? 우리 생각과 판단은 항상 바르거나 충분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길에서 때로는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력을 내려 놔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 전부를 다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분의 판단력이 우리의 판단력보다 훨씬 더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두고 그려놓은 길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해서 그려 놓은 길이 더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실 때가 가끔 있기도 한 것입니다.

예컨대 마가복음의 주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10:43)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할 때에는 우리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대는 것입니다. 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개성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낙관적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낙관적이거나 비관적인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낙관주의자는 컵에 물이 반잔이나 남아 있다고 좋아합니다. 반면에 비관주의자는 반이나 비었다고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그 컵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굳게 들려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기로 마음먹으면 사렙다 과부의 기름병처럼 반 컵 남은 물도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사람은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결코 성격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두 번째 원리를 적용하는 법칙이 바로 90대 10의 원리입니다. 잠언 3장 9절은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축제를 앞두고 처음 데리고 나오신 분이 있는데 나오자 말자 돈 문제를 얘기해서 별로 도움이 안될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도 수입의 10분의 1을 헌금한다고 하면 이것은 완전히 기절할만한 것입니다. 맞죠, 그게 얼마나 많은 돈인데. 그러나 그 돈을 교회가 하는 게 아닙니다. 또 담임 목사가 그 돈을 가져가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얘기했을 겁니다. 저는 대학원 졸업하고 유학 가서 석사, 박사학위까지 다 받았지만 지금 제가 받는 월급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현대중공업에서 15년 근무한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난다면 교회가 제게 사택을 제공하고 있다는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10분의 1을 수입에서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 주위의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입을 다 자기 것이라고 움켜쥐면 세상은 살벌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10분의 1을 구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쓸 수 있다고 마음먹게 되면 세상은 풍성해 질수 있습니다. 세상은 달라 질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 중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좋은 대학교의 사회학과 같은 곳에서 불교, 천주교, 기독교에서 기금을 얼마나 주는지 한해 들어오는 수입이 얼마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사회적으로 얼마나 환원을 하는지 한번 연구를 해서 발표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절(사찰)하고 천주교하고 교회하고 경쟁을 시켰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내는 헌금은 사회적으로 좋은 일들을 위해서 얼마든지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지금 돈이 없지만 복지 법인을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하나님은 왜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10%만 내놔도 90%를 어떻게 쓸 수 있는 사람인지 구별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재정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한다면 그 분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첫걸음이 바로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3.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인정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친구가 방에 들어오면 손을 흔들며 반깁니다. 만약 높은 어른이 들어오신다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반깁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 될까요?

여러분은 그분께 순종함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그 분을 인정하는 방식은 바로 그 분께 순종하는 것, 그 분이 말하면 듣는 겁니다. 그 분은 우리 인생의 지배자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말합니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28:14)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면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마음을 악하게 하고 굳게 해서 그 말씀 듣기를 거부하면 비참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면 따분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신이 비참해 질 것을 두려워해서 선뜻 주님께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많습니다. 지금 누리는 자그만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길까봐 선뜻 주님 앞에 나오기를 망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해서 증인이 되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면 비참해집니까? 오히려 우리의 경험은 그 반대입니다. 순종하지 못할 때 비참해지지 순종하면 우리 안에 기쁨이 찾아오고 항상 순종하면 기쁨이 우리 마음에 자리합니다. 

생명 사랑 나눔 축제는 이 놀라운 소식을 우리의 소중한 분들에게 전하는 잔치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기쁨을 여러분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알리기 위한 범 교회적인 잔치입니다. 용서받은 기쁨을 전하고 순종하는 즐거움을 알리는 축제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교회에서 예쁜 초대장도 만들고 책자도 만들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여러분이 소중하게 여기는 분들에게 전해 줄만큼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전달해 주고 다음 주일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오전, 저녁시간까지 모두 7번 있습니다. 어느 시간이든지 모시고 나오면 됩니다. 용서받은 기쁨을 전하고 순종하는 즐거움을 알리는 새 삶을 전하는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옛날에 서울에서 조그마한 교회를 개척했을 때에 교인들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깐 누가 누구인지 다 잘 압니다. 그래서 고집 쎈 성씨들을 나열하는데 안씨가 먼저 등장하고 강씨, 최씨, 오씨, 그리고 마지막에 정씨도 넣더라고요. 여러분, 강씨가 고집을 피우는 것과 최씨가 고집을 피우는 양상이 조금 틀립니다.

그런데 고집 안 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다 셉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 할 때는 자기주장을 안 꺾습니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또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지만 남의 말을 아예 안 들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천지가 흔들리는 일인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설교는 듣지만 쉽게 삶을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합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듣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들었으면 행동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들었습니다. 정말 정치가들 같았으면 너무 행복했을 것입니다. 빈자리 하나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찾아 모여 들었지만 말씀을 듣고는 그냥 끝나 버리는 상황이 주님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주님이 이런 수수께끼가 아닌 수수께끼를 사람들에게 내었습니다. “여러분들, 등불은 왜 켭니까? 등불은 켜서 박스 안에 넣어 두려고 켭니까? 아니면 켜서 비추기 위해서 입니까? 설교는 왜 듣습니까? 듣고는 그대로 살기 위해서 듣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교회에 나와서 아름다운 찬양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해서 누군가 하는 말을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므로 자신을 속이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일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만 삶이 변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완고함을 이제 내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 실천하십시오. 말씀의 씨가 마음 밭에 뿌려지게 하십시오. 움돋아 자라나게 하십시오. 꽃피고 열매 맺게 하십시오. 순종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삶에 하늘의 기쁨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원하는 것 할 수 있어요. 출세 할 수도 있고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도 있어요. 합격도 할 수 있고 사업이 번창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없이 안 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안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없다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우리 삶에는 결코 만족과 평안과 기쁨이 찾아 올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행동을 통해서 활성화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여기에는 100% 법칙이 있습니다. 20대 80, 10대 90이 아닌 100% 법칙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울산교회의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약 80%의 삶을 하나님께 양도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90%, 95%, 어떤 분은 99%까지 양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딱 1%를 붙들고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넘겨 드리기 어려운 영역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분은 사업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양육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나쁜 습성일 수도 있습니다. 성생활이나 인간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전부를 다 양도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기쁨을 우리에게 안겨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을 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붙잡은 것을 놔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라면 우리 삶의 그 어떤 영역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전적인 양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받으시고 당신의 좋은 것으로, 풍성한 것으로 넘치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순간적인 행복만을 바라면 언제나 찾아오는 것은 공허감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맘을 먹으면 세상은 달라집니다. 맘 먹는 순간에 바로 기쁨이 꼭 찾아오지는 않을 수 있지만 순종하는 삶을 살다 보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깊고도 지속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필 원리가 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4.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네 길을 곧게 하시리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약속은 완전한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문제없는 삶에 대한 약속이 아닙니다. 역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면 그 다음부터 건강해 지고 사업도 잘 되고 자녀들이 공부도 잘 하고.. 하는 이런 것들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시편의 약속과 일맥상통할지 모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 맛보아서 알아라 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어디가면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 하면 감동하지 않습니다. 감동하지 않으면서 늘 하는 저의 말이 있습니다. “먹어봐야 알지” 맛이라고 하는 것은 먹어봐야 압니다. 그렇게 말을 했으면 같이 가서 먹어보자고 해야지요. 내가 먹어봐야 맛을 알지 말만 들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내가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여러분이 알 도리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맛봐야 아는 겁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여러분이 맛을 보십시오. 맛을 봐야 만이 아는 겁니다. 옛날에 그런 CM송이 있었죠. “맛을 봐야 맛을 아는 00간장” 우리 하나님도 직접 맛봐야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러분, 믿음 때문에 모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포기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삶의 안전과 평화였습니까? 아니면 삶의 즐거움이었습니까? 포기하는 않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기쁨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완벽하지 못합니다. 저도 여러분 모두처럼 믿음으로 살려고 날마다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어떤 날 하루는 아주 멋지게 출발해서 기뻐한 날이 있는가 하면 사흘째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서 애쓰기도 합니다. 믿음의 모험을 통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십시오. 믿음이란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찾아 오셔서 놀랍게 나를 사용하시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신실한 것을 다 맛보아서 알았습니다. 천대까지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시편에는 이러한 우리의 심정과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서 표현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11)

여기 나오는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는 구절을 “하나님이 행동하기를 바라라”로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대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함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십자가에 수난 당하시던 그 모습을 담은 그 영화가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알게 해 주셨다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수난 당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분의 삶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말씀 맺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면에선 모험이기도 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배신당할 것까지도 수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믿어도 그렇고 한 남자에게, 한 여자에게 일생을 걸어도 거기에는 그런 불확실한 여운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데에는 일말의 불안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거짓되지만 우리 하나님은 믿을 만합니다. 그 분의 말씀은 신뢰할 만합니다.

믿음은 신뢰이고, 순종이고,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결단이 이 한 주간에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본문을 풀어쓴 성경으로 읽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얘야, 너는 또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네 잔꾀를 하나님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분을 생각하여라. 그분의 뜻을 늘 되새겨 보란 말이다. 그러면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분이 가르쳐 주시리라.”(잠언3:5-6, 현대어성경)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 되심을 감사합니다. 수 천대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신을 신뢰한 것처럼 우리도 오늘 주님을 신뢰합니다. 예수님,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에 오셔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우리를 만드시고 당신의 기쁨으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목적과 의미를 주님 안에서 발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 우리가 선뜻 신뢰하지 못함을 아십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주저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때로 쉽지 않지만 그 때마다 우리를 계속 격려하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담대한 마음을 주셔서 오늘은 경계선을 넘어서 당신의 사랑의 품에 투항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시작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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