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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제자들은 (눅 5: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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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경향교회)

얼마 전에 어떤 음학대학 학생 한 명과 이야기를 하다가 트럼펫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을 때, 제가 “트럼펫 부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옛날 고등학교 밴드부하면서 배운 것 아닌가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대학 다닐 즈음에는 음대 기악과에서 금관악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주로 다 밴드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다른 기악 전공 학생들보다는 평균적으로 수준이 좀 떨어진다고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 말이 요즘은 그렇지 않고 제대로 트럼펫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옛날과는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말이, 그래도 트럼펫을 전공하신 기악과 교수님들이 우리나라에서 몇 분 안 되시기 때문에, 트럼펫 부는 학생들의 연주하는 소리만 들어도, ‘아, 저 학생은 어느 교수님에게 배운 사람이구나.’하고 곧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상 꼭 기악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어떤 한 스승에게서 제대로 배운 제자라면 그 스승의 제자다운 특별한 표가 나기 마련일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사람들 앞에서 뭔가 크게 다른 표를 내고 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처럼 어떻게 보자면 좀 엉뚱해 보이기까지 했던 예수님 제자들의 행동을 사람들이 비방해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제자들을 철저히 두둔하셨습니다. 즉 그 제자들의 뭔가 달라 보이는 것들은 결코 뭐가 빗나가거나 잘못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진짜 제자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특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면 누가 보아도 “아,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인가 보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유별난 것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진짜 제자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표 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진짜 제자는 예수님 따르는 일을 자기 인생 최우선의 사명으로 여깁니다.

누가복음 5장 27절로 29절에 기록하기를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레위’란 마태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원래 직업들이 다양했지만 그 중에서도 이 레위는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세무서원은 일반인들에게 그리 호감을 주지 못하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특히 당시 유대 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로마 정부와 결탁되어 자기 동족들의 고혈을 착취했던 이들은,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문자 그대로 민족의 배신자요 사회의 거머리 같은 존재로서 가장 증오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처럼 미움 받는 직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세리 노릇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것이 돈버는 데에는 더없이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윤은 거의 자기 마음대로 남길 수 있고 경쟁 업소도 있을 수 없는, 가장 이상적인 독점 기업과도 같은 것이 바로 당시의 세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레위는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고 부르시는 순간,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즉 그 좋은 직장을 당장 팽개쳐 버리고 예수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공무원이었던 세리의 직업을 당장 하루아침에 그만 둔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의 경우처럼 어부 노릇하던 것을 그만 두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부 노릇하던 사람들이야 혹 마음이 변하면 다시 돌아갈 여유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지만, 공무원 하던 사람이 사표 내고 나왔을 때에는 다시 그 직장으로 돌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확고부동한 마음으로, ‘화끈하게’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는지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5장 28절에서 「(레위가) 일어나 좇으니라」고 해 놓고 그 다음 29절에서 「레위가…잔치를 하니」라고 했습니다. 원래 그처럼 돈 잘 버는 직장을 가지고 23있었던 레위이니까 아마도 열두 제자들 중에서는 가장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로 작정한 순간, 그것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의미에서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잔치는 바로 자기 가족과 친지와 동네 사람들에 대해서는 작별 잔치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나는 오늘 부로 예수님 따라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여러분들 안녕히 계십시오.’하면서, 마지막으로 식사 대접을 했던 것입니다. 비록 이전에는 온 동족으로부터 욕먹을 일을 하고 살던 사람이었지만, 그 레위 마태가 일단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을 때에는, 정말 다시는 후회하거나 뒤돌아설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예수님 제자의 길로 가는 첫 발걸음을 이처럼 분명하게 내디뎠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첫 출발하는 자세에서부터 판이하게 표가 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이 세상의 다른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서로 눈치 살피고 재어 보고 하는 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가르칠 코치나 레슨 교사를 구할 때에는 ‘이 선생이 좋을까, 저 선생이 좋을까?’하고 한참 저울질해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또 유명한 선생은 제자를 받아들일 때에도 ‘과연 이 학생이 키워 볼만한 가능성이 있나?’하고 이모저모로 뜸질해 보는 것이 예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 제자 사이는 그런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 될 사람을 부르실 때에 ‘이 사람 키워서 과연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을까?’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법이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를 선택하시면 그냥 “나를 좇으라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고 딱 부러지게 부르실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부름 받은 참된 제자 된 자 역시 ‘예수님이란 분 따를 가치가 있을까 없을까?’하고 이리저리 달아보면서, ‘혹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손해 없게 해야지.’하고 어중간하게 교회 출입만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는 믿기 전의 옛날 생활로 돌아갈 생각일랑 상상조차도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 뒤만 끝까지 따라가기로 굳게 결심하면서 다른 것은 다 제쳐 놓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처럼 다른 어떤 선택의 여지를 조금도 남겨 놓지 않는, ‘최종적인 결단(final com mitment)’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라는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부터 조금도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예수님 따르는 일에만 전력투구하는 진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진짜 제자는 예수님처럼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면서 그들을 전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5장 30절로부터 32절에 기록하기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아까 29절 말씀에서,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자기 집에서 마지막으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 자리에는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참석했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같은 직종에 종사하다 보니 서로 친구가 되었던 다른 ‘세리’들도 많이 왔었고, 또 ‘다른 사람이 많이’ 왔었는데, 이 ‘다른 사람’들이란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기에는 바로 ‘죄인’들이었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그런 세리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들도 역시 꽤나 악질이었을 것이니, 바리새인들이 아예 ‘죄인’이라고 부른 것도 아마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는 자기가 그런 생활을 청산하고 제자가 되면서, 그런 자기의 옛날 친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주고자 일부러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잘 어울려 즐기는 것이 그 자리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눈에는 심히 거슬렸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누구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 즉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 자기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나 그들의 제자들로서는 그런 잔치 자리에 함께 앉는 그 자체가 곧 불경건한 행위이며 자기네들의 위신과 품격을 깎아내리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이들은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왜 그리 별나게 구느냐?’라고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비난하는 그런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장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앞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감싸고 나서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대변하여 대신 응답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들과 볼 일이 있어서’ 오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죄인들을 만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즉 초청하여, ‘회개시키러’ 즉 의인이라 칭함받는 자 되도록 변화시키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스스로가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들은 이런 의원의 혜택을 누릴 도리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이 말씀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적용해 볼 때 한 가지 사실이 확실해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의원되신 예수님 앞에서 스스로를 ‘병든 자’와 ‘죄인’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앞의 누가복음 5장 8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참으로 알게 된 순간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며 무릎을 꿇게 된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죄인이라 불리었던 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으며, 그들 역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려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 별다른 자세 -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정말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신자들 곁에만 가도 더러운 것이 옮게 될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그의 제자들이 하는 위선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자리에서 불신자들을 대하더라도 결코 그들에 대하여 어떤 우월감에 빠지지 말고, 우리도 역시 본질적으로는 그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처럼 같은 죄인 되었다가 먼저 예수님께로부터 죄 용서함 받고 이런 제자의 자리에까지 이른 것을 상기하면서, 그런 불신 친구들 역시 우리처럼 주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을 수 있는 문이 열리고 이 의원으로부터 치료받을 기회를 가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불신 친구와 이웃들과 사회적인 교제를 계속 하면서, 오히려 더욱 친절하게 대해 주면서, 어찌하든지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중생 받은 성도는 결코 혼자만 천당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바로 진짜 예수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철칙입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는 비단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대할 때 뿐 아니라 교회 안의 약한 교우들을 대할 때에도 역시 이처럼 ‘세리와 죄인’들과 자기를 동격으로 여기는 자세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나보다 믿음 약한 교인, 나보다 충성 못하는 교인, 나보다 인격적으로 못한 교인, 나보다 능력 없는 교인, 어느 모로 보나 나와 교제하기는 영육 간에 수준이 낮아 보이는 교인 - 이런 교인을 만나게 될 때마다 바로 나 자신이야말로 정말 형편없는 ‘세리’요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주님께서 불러 주셨음을 생각해 낼 줄 아는 자세입니다.

그래야만이 우리는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고’ 대하는 위선적인 만남이 아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대하는 참된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자기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진정으로 깨달을 줄 아는 제자만이 이처럼 행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정과 이웃 그리고 세상 끝에 이르기까지 오직 ‘나와 꼭 같이 죄인 된’ 자들의 영혼을 사랑하며 아끼며 친구가 되어 주며 그리하여 그들 역시 주님 앞으로 인도해 내는, 예수님의 진짜 제자 된 표를 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진짜 제자는 예수님과 즐겁게 동행하는 삶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냅니다.

본문 누가복음 5장 33절로 35절에 기록하기를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다가 예수님께로부터 한방 얻어맞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제 조금 다른 각도에서 또 한번 시도해 왔습니다. 아까는 ‘누구와 함께’ 먹고 마신다고 시비를 걸었다가 이제는 ‘먹고 마시는 일’ 그 자체를 비방하고 나왔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너무 명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심히 못마땅했습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제자들은 항상 인상을 찡그리고 남들 앞에 심각하게 보여야 어떤 종교 문제에 몰두하는 사람답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네들과는 전혀 달리 매사에 무게 잡고 그 무언가 심각하게 인상 쓰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금식하는 것이 한 가지 예였습니다. 실제로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의무적인 금식일은 일년에 한번 ‘대 속죄일’밖에 없었지만,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랬지만, 그 외에도 한 주일에 두 번 정도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처럼 정기적으로 금식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혼인 잔치에 온 손님으로 하여금 밥 굶게 만들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라도 그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당신과 함께 동행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런 혼인 잔치의 분위기와 꼭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혼인 잔치에 넘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그대로 생산해 낸다는 말입니다.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한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무슨 별다른 이유가 없다 하더라도 그저 그 잔치의 분위기 속에서 절로 자기도 흥겨워질 수밖에 없듯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따르게 된 제자 역시 그야말로 샘솟는 듯한 기쁨을 절로 누리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스스로 금식하게 될 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랑을 빼앗기게 될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게 될 그 때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는 말은 아까 34절의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란 말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억지로 자기 제자들을 ‘금식하게 만드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 스스로 ‘금식해야 할 때 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당시는 물론 금식할 때가 아니라 먹고 마시는, 즉 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때였음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것 또한 주님의 진짜 제자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뭔가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제자들은 예수님 따라가는 그 자체를 그냥 즐거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말씀 듣는 것이 마지못해 앉아 있는 시간이 아니라 실로 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찬송하며 기도하는 것이 남 따라 대강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넘치고 힘을 얻는 시간인 것입니다.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이 인상 찡그리면서 무슨 죽지 못해 하는 일처럼 여기는 것이 결코 아니라 정말 감사함으로 즐거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입네, 장로입네.’하면서 근엄하게 무게 잡는 것이야말로 이미 진짜 제자가 아니라는 표입니다. 신랑이 있는 한 혼인 잔치에서 손님이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듯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진짜 제자는 그 표정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절로 넘치는 즐거움을 도무지 억제하려고 해야 억제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진짜 제자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기쁨의 생활, ‘매사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매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면서’ 살아갈 줄 아는, 완전히 ‘표 나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예수님의 진짜 제자들은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님 역시 당신의 제자들이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뭔가 크게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두 비유들을 통하여 바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시대의 율법주의를 예수님과 억지로 끼워 맞추어 보려는 자들은 바로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이며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묵은 것이 좋다’하면서 새 것을 아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확신 있는 결단이며, 은혜 충만한 체험이며, 기쁨 넘치는 길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이전에 예수 없이 살던 대로가 좋다.’하면서 이 정말로 좋은 ‘새 것’을 아예 마셔 보려고도 하지 않는 자들은 아직 바리새인의 제자들일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진짜 제자들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새 옷을 입고 새 포도주를 마시는, 새 시대의 제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주 표 나는, 별난, 희안한 사람들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당신의 제자들은 왜 그리 별납니까?”라고 묻는 바라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별나니까 진짜 내 제자들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왜 예수쟁이들은 몽땅 다 버리고 예수님만 따릅니까?”라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면, “내 제자가 되면 원래 저절로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라고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죄인이라 그러고 남들도 죄인이라고 부릅니까?”라고 비난하면, 우리 스승께서는 “스승한테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렇다.”라고 대신 응수해 주십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좋다고 ‘항상 기쁘다, 항상 감사하다.’고 난리를 칩니까?”라고 불신자들이 비꼬아 오면,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은 진짜 내 제자가 되어 보아야만이 알 수 있다.”라고, 당신의 참된 제자들을 이렇게 극구 두둔하시고 옹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처럼 스승이 인정해 주어야 진짜 제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진짜 제자는 세상 사람들이 제 아무리 뭐라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 인정받는 제자가 되려고, 그렇게 별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따라갈까 말까 고민은커녕 아예 뒤돌아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제자, 불신자와 약한 신자를 대할 때 자신을 더 낮추고 사귀며 전도할 줄 아는 제자, 예수님의 제자 된 그 은혜만 생각해도 항상 즐거움이 절로 넘치는 제자 - 이처럼 어디를 가도 표가 나는 예수님의 진짜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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