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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청춘 (시 9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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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수하기를 소원한다. 또한 누구나 늙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두 가지 말은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이 되는 내용입니다. 장수하려면 당연히 나이가 많아지고 늙어야 되는데, 장수하는 것은 원하면서도 늙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장수하면서 늙지 않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한 마디로 가당치도 않습니다. 달리는 기차는 혹시 붙잡아둘 수 있어도, 흐르는 세월은 결코 붙잡아 두지 못합니다. 누구라도 늙어짐에서 예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나이가 적고 젊다고 할지라도 잠시 잠깐 그럴 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늙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드립니다. 하나는 중년의 여자분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소 책도 쓰고 신문에 자주 기고하는 분입니다. 한번은 지방에 갔는데 한 젊은 여자가 자기를 알아보더랍니다. 기분이 좋았겠죠. 그런데 그가 건넨 인사말이 마음에 탁 걸렸습니다. 그 인사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머, 어쩌면 그렇게 곱게 늙으셨나요? 직접 뵈니까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더 고우시네요.” 자신은 여태껏 한번도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늙었다는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생각할수록 괘씸했습니다. 그냥 곱다고 하면 될 것이지 왜 늙었다는 말을 붙이는지 생각할수록 심통이 나더랍니다.

또 하나는 60대의 남자분의 이야기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선 채로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뒤에서 청년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요즘에도 저런 기특한 청년이 있구나 싶어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가오면서 다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저쪽에 가서 앉으세요.”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다가 그 말을 듣고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야, 내가 왜 할아버지냐?” 하면서 고개를 홱 돌리고 못 들은 척했다는 겁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공감이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연령이 높아지는 반면, 사람들은 나이 드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고 나이가 들지 않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분명히 나이는 들어갑니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저런 변화들이 생기게 됩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도 생기고, 예기치 못한 어려움도 생기고 ... 이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나의 무게에 짓눌려 살다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세월이 흐르면서 어떤 일이 생겨도 항상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입니다. 항상 청년의 모습처럼 푸르고 청청한 인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은 생물학적인 나이를 초월합니다. 물론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100% 초월한다고 말 할 수야 없지만, 인생의 어느 시기이든, 나이가 적든 많든 활기차게 기쁨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생을 가리켜 이름을 붙여 봅니다. 영원한 청춘! 정말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우리 모두가 소원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이 그런 인생을 소개해 줍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문자 그대로 영원한 청춘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의인의 인생 : 궁극적 승리

시편 92편은 구약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즐겨 부르던 찬송시입니다. 그 주제는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과 의인의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시편에서 의인과 악인은 각각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킵니다. 도덕적적인 의인, 악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완전한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참조)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고백하고 인생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 즉 신자가 의인(以信稱義 교리)인 것입니다. 즉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의인이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악인인 것입니다.

의인의 일생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반면에 악인의 일생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면서 중간 중간의 모습은 때때로 악인이 잘 되고, 오히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아도 나중에 가서 보면 결국은 의인의 인생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런 사실을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 시편(1편, 37편 등)에서 동일한 주제가 반복되는데, 그 중에 특히 시편 92편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대조적인 비유법을 통해 설명합니다.

7절 보면, “악인은 풀 같이 생장하고 ... ” 그랬습니다. 말하자면 악인은 ‘무성한 잡초’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름날에 비가 오면 잡초가 무성해집니다. 그러나 며칠 후면 다 시들고 사라집니다. 악인의 인생이 그와 같다는 겁니다.(시37:1~2 참조) 떵떵거리고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멸망이요 심판입니다.

반면에 12절 보면 의인이 어떻다고 말씀합니까?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고,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나무들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것이라 잘 이해가 안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나무인지 좀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그 키가 20~30 미터나 되는 큰 나무입니다. 잎도 2~3미터나 됩니다. 나무의 수명도 깁니다. 30년이 되면 큰 나무가 되는데 그 후에도 계속 열매를 맺으며 100년, 200년, 심지어 그 이상도 산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하는 데 쓰이며, 승리와 환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손에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승리의 왕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 보좌 앞에서 흰 옷 입은 성도들이 역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찬양을 드립니다. 백향목은 ‘나무의 황제’ ‘수목의 왕’이라 불리는 나무 중의 나무로, 주로 레바논 산맥의 해발 1,000~1,500 미터 지점에서 서식합니다. 눈 덮인 산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데, 높이가 40 미터 줄기의 지름이 3 미터의 큰 나무입니다. 그리고 수령은 2천~3천 년이나 됩니다. 엄청나죠. 게다가 얼마나 아름답고 수려한지 모릅니다. 목질은 단단하고 향기가 나서 1등 건축재가 됩니다.

의인은 이처럼 멋지게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종려나무처럼, 백향목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의인을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해야 됩니다. 종려나무나 백향목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게 아닙니다. 사막, 무더운 곳, 높은 산, 추운 곳, 바람 부는 곳, ... 그러나 그 모든 역경을 헤치며 곧게 자라는 겁니다. 의인도 이 세상 살면서 환란과 풍파를 겪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승리한다는 겁니다. 필승입니다!

[2] 의인의 일생 : 영원한 청춘

의인의 일생이 어떤지 본문을 통해 자세히 살펴봅니다. 다음 세 가지의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지속적인 영적 성장 :

12절 다시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 ... 흥왕하리로다” 그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끊임없이 성장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14절에는 “ ... 진액이 풍성하고 빛이 청청하여 ... ”라고 말씀합니다. 항상 푸르고 싱싱하다는 겁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평생 성장해야 됩니다. 육체는 일정 나이가 되면 성장이 멈춥니다. 그 후로는 노화됩니다. 그런데 영혼은 늙지 않습니다. 갈수록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본인이 게을러서 성장이 정체될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쇠퇴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성장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닮는 것입니다. 엡4:15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 하더라도 예수님과 똑같아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평생 성화의 과정을 가는 겁니다. 항상 성장 목표가 있으므로 우리 영혼은 늘 젊고 싱싱할 수 있습니다. 고후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란 시가 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 스무 살 젊은이보다 예순 살 난 사람에게 더 청춘이 있다 ... ” 청춘이란 육체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겁니다. 우리 영혼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면 늘 청춘인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생명의 찬가를 노래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의 시 중 많은 게 노년기에 쓴 작품입니다. 그가 노년에도 건강하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니까 주변에서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때 그가 대답한 말입니다. “저 나무를 보십시오. 매우 오래된 고목이지만 올해 피운 꽃이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또 아직까지도 매년 새 가지를 뻗어 내고 있지요. 저 사과나무처럼 나도 매년 조금씩이나마 새 가지를 뻗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은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육체에는 주름살이 있어도, 영혼에는 주름살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면 갈수록 싱싱한 영혼이 됩니다.

② 끊임없는 활동 :

14절 보면, “늙어도 결실하며 ... ” 그랬습니다. 푸르고 싱싱할 뿐 아니라 열매를 계속 맺는다는 겁니다. 오래된 고목(古木)이라도 살아 있는 거목(巨木)입니다. 말라죽는 고목(枯木)이 되면 안 됩니다.

사람은 숨지는 순간까지 활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각각 형편이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형편을 핑계 대며 손을 놓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최소한(중요성이 덜하다는 것은 아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눅2:36~38 보면 안나 여선지자가 나옵니다. 그는 결혼 후 7년 만에 남편과 사별합니다. 그리고 84년이 되도록 늘 기도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구한 인생인가? 그러나 그는 늘 기도함으로 헌신하다가 아기 예수를 만나고 전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기도 하나만 하더라도 인생의 시간이 모자랍니다.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세계 만민을 위해서, ... 이렇게 생각하면 이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수14:6~15 보면 갈렙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85세였지만 쉬지 않고 새로운 일에 도전합니다. 헤브론 산지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지만 험한 지형에다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버티고 있어 장정들도 벌벌 떨고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선 겁니다. 결국 헤브론을 정복하였고, 그와 그 후손들의 몫이 됩니다.

③ 하나님 영광의 도구 :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계속 활동하다 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15절.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 ”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 권능, 공의, 신실하심 등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산 증인이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본인으로서는 자랑스러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청춘으로 사는 비결 :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

의인들이 영원한 청춘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본문은 그 비결까지 말씀해줍니다. 13절. “ ... 여호와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똑같은 나무라도 어디에 심겨지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심겨진 위치에 따라 나무의 장래는 달라집니다. 잘 자라기도 하고, 말라 죽기도 합니다.

종려나무와 백향목이 그 자체로 좋은 나무지만, 더 좋은 것은 여호와의 집에, 하나님의 궁정에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 또 하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관계를 말합니다.

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 :

나무가 잘 자라려면 물가에 심겨져야 합니다. 종려나무는 대개 오아시스 주변에 서식합니다. 그래서 대상들이 사막을 지나갈 때 멀리 종려나무 숲이 있으면 오아시스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시1:1~3 보면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뿌리를 박고 물을 흡수할 수 있으므로 가뭄이 와도 괜찮습니다. 이것은 곧 말씀을 늘 묵상함으로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향목은 높은 산 거친 바위에서 자라지만 바위 틈새로 깊이 뿌리를 박고 물을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큰 나무로 굳세게 자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환란과 핍박의 거센 풍파가 불어 닥쳐도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끊지 않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경제 잡지를 보니까. 요즘 석류가 한참 유행이라고 합니다. 중년 여성들에게 좋다고 불황인데도 불티나게 팔려서 외국에서 엄청나게 수입한다고 합니다. 음료 시장도 날이 갈수록 확장된다고 합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육체의 젊음을 유지하려고 엄청 신경 쓰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나쁜 일은 아니죠.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니까 육체도 건강하고 싱싱하면 얼만 좋습니까? 그러나 육체의 젊음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영적인 젊음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됩니다. 그럴 때 신령한 능력으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로다”

② 하나님께 계속 쓰임 받는 삶 :

여호와의 집에 심겼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쓰임 받아야 됩니다.

조지 휫필드(청교도 설교가)가 너무 열심히 일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늙어서 죽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겠소.” 맞는 말이죠. 쇠는 가만히 둬도 녹이 슬어서 없어집니다. 그러느니 쓰이면서 닳아 없어지는 게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인생의 마지막 날 이렇게 고백하기를 소원합니다.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성도 여러분! 육체의 노화가 문제가 아닙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조건 추하고 약하고 나쁜 게 아닙니다. 신앙의 노화가 문제입니다. 늙는 것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직 젊다고 방심하며 세상에서 허랑방탕하지 말고, 늙어버렸다고 낙심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늘 싱싱한 영혼을 가꾸어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 영원한 청춘으로 주님 앞에 쓰임 받고 살다가 주님 부르시면 “할렐루야!” 하면서 천국에 당당하게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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