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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의 마음으로 생각하기 (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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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동안교회)

여러분 옆에 앉아 계신 분이 혹시 노인은 아닌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저를 보십시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미네소타 주 의학협회에서 노인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늙었다고 느낀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느낀다.
이 나이에 그깟 일은 뭐하려고 해 라고 말하곤 한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느낀다.
젊은이들의 활동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좋다.
좋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위의 정의를 듣고 나서 다시 옆 사람을 보면 20대 노인네, 30대 노인네를 제법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늙어가는 이유는 목적과 이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할뿐이나, 무관심은 영혼마저 주름지게 한다. 머리를 숙여 성장하는 영혼을 흙으로 되돌리는 것은 긴 세월이 아니라 근심, 의심, 자신감의 결여, 두려움, 절망과 같은 것들이다. 당신은 믿는 만큼 젊고 의심하는 만큼 늙는다. 자신감을 갖는 만큼 젊고 두려워하는 만큼 늙으며 희망하는 만큼 젊고 절망하는 만큼 늙는다.’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말해주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느냐, 오늘 현실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느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진실성도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 혹은 교회에서 어떤 위치를 맞고 있는가 보다, 마음에 무엇을 품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읽었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무엇이냐? 곧 종의 형체를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종이 되는 마음이다.’

오늘날 종이라고 하면, 알렉스 헤일리 원작을 영화로 만든 ‘뿌리’에서 보았던 쿤타킨테와 추수기마다 미국 전역에 농경지를 채우는 수천 명의 이름 없는 떠돌이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인간 노새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가족과는 헤어져 자유도 없이 일만하며 비참하게 사는 모습, 행복도 기쁨도 주권도 없이 사는 모습이 예수 믿는 삶의 본질적인 것이라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 다니며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좀더 가치 있고 의미 있으며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오히려 종의 삶을 살라하니 그 동안 무언가 착각하고 신앙생활해 온 것은 아니었던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년전에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이 실험은 160마리 정도의 쥐를 안락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210㎤의 네모상자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물과 음식을 충분히 주고 쥐가 늙어죽는 것을 제하고는 죽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한 지상천국이었습니다. 2년 반 만에 8마리의 쥐는 2,200마리로 늘어났습니다. 상자 안에 더 이상 번식할 수 없는 상황, 스트레스가 쌓일 만큼 쌓인 상황에 쥐들을 그대로 두고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을 실험심리학자인 존 칼훈(John Calhoun) 박사는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쥐의 숫자가 절정에 달하면서 쥐 사회는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쥐 중에 12마리 정도가 배타적인 집단을 형성하며 특별한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하고, 지도적 위치에 있던 수컷들이 자기 역할을 중단하고 수동적으로 변하는 대신 암컷들이 사나워졌습니다. 암컷들은 새끼들을 내몰고, 새끼들은 자기 역할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며 마음대로 먹고 마셨습니다. 어린 쥐들은 사회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해 제멋대로 행동했고 정상적인 활력도 찾지 못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먹을 것이 계속 공급되는 등 다른 조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쥐들은 결국 5년 만에 다 죽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칼훈 박사가 발견한 것은 쥐들의 강한 독립성과 극단적 고립증후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쥐들에게 가장 복잡하고 강렬한 행위인 구애와 교접행위가 맨 먼저 중단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접근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고립시키고 고독을 즐기다 혼자 죽는 것입니다. 칼훈 박사는 쥐 실험으로 얻은 관찰 결과를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발표하기를, 사람도 마찬가지로 탈출할 수 없고 스트레스 요인을 동반한 과밀한 상태에서는 먼저 사고가 중단되고 목표와 이상 그리고 가치기준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자 사람들은 모든 것이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감싸고 고립시킵니다. 그러다 각자 외로워하며 죽게 됩니다. 여러분 요즘 세상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여자들의 힘이 점점 세져, 드라마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시대는 지나가고 여자가 남자를 때리는 시대가 왔습니다. 남자가 한 대를 때리면 여자는 두 대를 때리고, 남자가 두 대를 때리면 여자는 세 대를 때리면서 발로 찹니다. 여자에게 쩔쩔매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남자들은 점점 기가 죽습니다. 현실적으로 남자들이 50세가 넘으면 여자들에게 맥을 못 춥니다. 갈수록 더 합니다. 따라서 남자들의 지도력이 점점 약해집니다. 어디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여자들의 진출이 괄목할 만큼 두드러집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붕괴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은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멋대로 자라고,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찾지 못해 사회 문젯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물질생활은 풍요로워지고, 사람이 즐겁고 재미있게 지낼 여건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외로워 못살겠다고 합니다. 전부 고독합니다. 인터넷, 포르노, 도박, 알코올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기소외현상도 날로 늘어갑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신 한마디 말씀이 상당히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섬기러 왔던 현장, 우리를 섬기러 왔던 삶의 모습 속에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소망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굳어지고 강퍅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과 섬김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곧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섬김과 사랑이 부부 사이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 부부 간에도 새로운 사랑의 관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섬김과 사랑이 가정 속에 들어갈 때 부모와 자녀가 모두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섬김과 사랑이 국가와 사회 속에 들어갈 때, 그 민족과 국가가 회복되고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용서가 나타나고, 화해가 나타납니다.

지금처럼 각박하고 절망적이며 메말라가는 우리 가슴과 사회 속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진정 회복해야 할 것은 ‘I, MY, ME, MINE', 즉 이기주의와는 정반대 입장인 다른 사람을 섬기는 주님의 섬김입니다. 섬김이 회복될 때 정작 우리가 찾던 삶의 가치와 목적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인도의 캘커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버려진 사람들이 모인 죽음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라는 한 여인의 섬김으로 캘커타는 죽음의 도시가 아닌 생명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던 마더 테레사의 죽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섬김이 있는 곳에 생명은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그 시간에 성찬식과 더불어 떡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복음이 섬김이라는 그릇에 담겨지지 않으면 복음이 복음 될 수 없기에 세숫대야 속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번 부부세미나에서도 세족식이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한번씩은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저희 집사람과 처음 해봤습니다. 아내가 제 발을 씻겨준다고 할 때 저는 무좀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데도 괜찮다며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좀 쑥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하면서 뭔가 가슴에 뭉클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내의 발을 씻겨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전에 전도사 하면서도 해봤고,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다른 부부를 보니 어색하기는 마찬가진가 봅니다. 간밤에 프로그램하면서 끄떡도 않던 남자들이 자기 아내가 씻겨줄 때 침통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아내를 씻기는데 처음에는 마지못해 했지만 나중에는 뭐라고 중얼중얼 하기에 가만히 들어보니까 ‘미안해. 미안해.’ 합니다. 남자는 연신 ‘미안해.’하면서 얼굴에 아내의 발을 대면서 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숫물인지 눈물인지 범벅이 되어 ‘시집와서 나 때문에 이 발 가지고 얼마나 고생했어.’ 합니다. 섬김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섬김이 있는 곳에 눈물과 사랑이 회복되더군요.

저와 여러분은 종의 모습으로 섬기신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얻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섬김이 없었다면 우리는 살 수 없었기에 주님은 우리를 섬기기 원하셨고, 우리 또한 종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원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의 내면은 어떻습니까?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둡니다. 즉 정말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영적인 생활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입니다. 종은 삶의 초점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신의 모든 중심을 주인의 뜻에 맞추기 위해 매순간 주인의 말과 시선에 집중합니다. 주인의 관심과 생각이 머무는 곳에 종의 몸도 항상 머물러 있습니다.

주인의 의도와 목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합니다. 소유물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크게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주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섬기는 목적을 위해서 육체와 물질을 씁니다. 지식과 권력도 자신을 나타내고 과시하는데 쓰지 않습니다. 남을 진정으로 섬기고 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남다른 지식이 있다면 돈벌이 하는데 쓰지 않고, 남을 진정으로 섬기는 일에 사용합니다. 돈은 섬기는데 따라오는 소득으로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릴 영광입니다. 돈이 목적이 되기 시작할 때부터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초점을 맞추고 사는가를 두 가지 관계에서 점검합니다. 먼저 물질입니다. 성경은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질이라는 단어는 인격체에 쓸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은 인격체가 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기쁨과 용기,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얼마나 힘이 나고 용기 납니까? 그렇듯이 돈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돈을 벌고 나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순서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사업의 목적은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목적, 학자가 되고 의사, 법관이 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남 섬기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도 섬기기 위해서 버는 사람, 공부를 해도 섬기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땅에 목적을 갖고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에 있든지 주님께서 보내신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할 때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사역에 있어서 비판이나 비난 혹은 경쟁의 문제입니다. 사역하는 동안 관계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비난 받고, 비교도 당하고 경쟁으로 인해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고 사역하는 사람들은 연연해하지 않고 자기 할일을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해나갑니다. 자기 주변의 어려운 문제들 때문에 중도하차 하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만났던 한 의사선생님은 고등학생 때 슈바이처 박사를 알게 되고 나서 의대 진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의사가 되고 나니 선교사가 되지 못할 조건들이 너무 많더랍니다. 부인과 자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약속했던 것을 좇아 나이가 벌써 40, 50세가 되었음에도 일정 기간동안 인도네시아로 가서 사역하셨습니다. 잠깐 나온 사이에 저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인데 “제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선교이기 때문에 저는 계속해서 나갑니다. 나가기 어려운 환경과 여건이 너무나 많지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이루어가기 위해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선생님에게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나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즉 현실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목적을 위해 가지치기해 나가는 그는 거인 같았습니다.

둘째 종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관심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긴다고 할 때, 본문의 표현을 보니 자기 마음을 비웠다고 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비울 때만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한 형제가 여기에서 ‘하나님 벌레만도 못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기도했다고 합시다. 그 후에 제가 올라와서 ‘하나님 방금 벌레만도 못한 형제가 기도하고 내려갔습니다.’ 라고 한다면 형제가 기분 좋겠습니까? 기분 나쁩니다. 왜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기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완전히 나 자신을 비우지 않는 한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 아십니까?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나’ 라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주장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죽었으니까, 죽었던 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니까 내 인생에 더 이상 주장할 것이 없고 교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완전히 비웠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몸까지 줄 수 있습니다. 몸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다시 세우셨습니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운 사람 속에 나타나는 첫째 현상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 가지는 관심입니다. 살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합니다. ‘목사님, 사랑해보세요! 오직 그녀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녀 생각도 누구를 위해서 하는지 아십니까? 나를 위해서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 생각한다고 하지만 결국 부모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 생각한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종의 모습으로 서게 될 때 다른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를 생각하는 것을 떠나서 이웃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할 때, ‘아 내가 겸손해졌구나.’ 생각하십시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열리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우시고 주님 뜻에 합당하도록 열어 가시는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순간순간을 남 섬기고 사랑하고 주의 뜻을 이루어가는 기회로 받아드립니다. 남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자기만족을 위한 기회로 바꾸어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 옆에 앉은 사람이 우연히 앉은 줄 아십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노력하지 않았어도 여러분 옆에 앉아서 섬길 기회를 준 사람들이 아닙니까? 옆에 앉아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기적입니다. 어떻게 우리교회에 오시게 되었느냐고 한번 인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작은 예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봉사의 기회를 원수 될 기회로 삼지 말고 섬김의 기회로 삼아보십시오.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웃어주십시오. 가장 아름다운 사람, 복된 사람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섬김의 기회로 삼는 사람, 나아가 기회를 만들어 섬김의 기회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제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이번 달 추천도서로 소개한 정연희씨 작, 감동적인 실화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 나오는 맹의순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실존인물로 조선신학교를 다니던 피가 뜨거운 청년이었습니다. 6.25 전쟁 당시 남하하다가 공산군 간첩으로 오인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맙니다. 맹선생은 그런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수용소 내에서 광야교회를 만들어 포로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자 맹선생의 신분이 확인되었고 수용소를 나갈 수 있었지만 자원하여 수용소에 남아 가장 열악한 형편에 있는 중공군 포로 특히, 병든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결국 자신은 중공군환자를 돌보던 어느 날 밤 병들어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맹선생의 장례식 때 낭독된 중공군포로들이 서명한 추모사입니다.

“맹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인이셨던 맹의순 선생이 가시다니…….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그의 행동은 희생과 헌신으로 한결 같았습니다. 선생의 한손에는 성경책이 다른 한손에는 물통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선생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골고루 만져주고 주물러주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기도를 듣고 있으면 기승하던 고통이 사라지고 신음과 함께 목이 타서 잠 못 이루던 육체도 편안한 잠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겨울이면 따뜻한 물로 여름이면 시원한 물로 우리의 얼굴을 씻겨주고 손을 닦아주었습니다. 때로는 발도 씻어주었습니다.

선생이 쓰러지던 마지막 날 밤 마지막 환자를 다 씻기고 선생은 일어나면서 눈물을 흘리며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않으시고 시편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 봉독하신 후에 높은 곳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도 그의 얼굴을 보며 따라 외웠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말씀과 함께 마지막 환자를 씻겨낸 물통과 대야를 들고 일어나시다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셨습니다. 우리는 통곡했습니다. 염치없는 우리가 선생을 돌아가시게 했다고 우리는 통곡합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맹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거제리 포로수용소 중공군병동에 환자일동”

이때 맹선생의 나이 불과 26세였습니다. 맹선생의 짧은 생애는 종의 몸을 입고 섬기러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섬김을 받고도 또 다시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강요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섬김을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갈등하고 반목하며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초점이 자신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 있습니까? 여러분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가족과 이웃 속에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원수가 되어 멀리하고 무시하며 멸시하는 삶을 살아가며 외로워하고 있다면, 다시금 섬김의 삶을 찾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회복하십시오. 거기에 진정한 생명의 시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교회와 민족을 다시 살리는 시작이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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