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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사람 바나바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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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강국 목사 (신시내티교회)

우리 모두는 너나할 것 없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에 나오시는 여러분들을 성령 충만한 분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 동안 성령 충만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하는 주제를 가지고 지난 몇 주를 지내왔습니다. 기도를 하고, 성경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되,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는 삶을 늘 지속적으로 가질 때에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해질 수 있는 비결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러면, 이렇게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님이야 성령이 충만하셨던 분이라고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좀 편한 대상 중에서 성령 충만했던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나 초대 교회의 초석을 닦아 놓았던 사도 바울을 예로 들면, "그들은 다 사도 혹은 목회자가 아니냐?" 하며 여러분들께서 항의 하실까봐 사도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닌 우리 식대로 이야기하면 '평신도'라 할까 하는 분으로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나바라는 초대 교회의 한 인물을 생각해 봄으로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인물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나바는 바나바이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나바와 같지 않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바나바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혹은 성령 충만한 바나바에게서 어떤 모습이 발견되는가?  이런 점에서 내가 성령 충만한 모습이 된다면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바를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의 말씀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중요한 바를 시사해 주고 있는 점에서 특이한 본문입니다. 그것은 최초로 시작되는 몇 가지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최초로 이방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최초로 선교사 파송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장차 이방인의 사도로 등장하게 될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란 말이 최초로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최초의 사건들의 중심에 바나바가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한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무언가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언가 새로움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바나바의 모습은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울의 역할이 아버지의 역할이었다면, 바나바는 말없이 순종하며 헌신한 그러면서도 이러한 새로운 일들을 탄생시키는 수고를 감당한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폭스 잭슨(Fox Jackson)이라는 신학자는 이러한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나바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매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의 장기를 찾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재능으로는 바울보다 못했을지 모르나, 크리스천의 덕으로는 우월하였다. 그는 질투를 모르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며, 장점을 보기에 빨랐으며, 형제간의 평화를 위해 타협에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상 바울은 세계 교회 진보에 공헌한 바 컸지만, 바나바는 세상에 살맛 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바울의 위대함을 잊지 못함과 동시에 바나바는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진출하는데 개척자였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바나바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으로 성령의 충만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함으로 오늘날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바나바는 전도 받은 신앙인이었다.

바나바는 전도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또 같이 일했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처럼 누군가의 전도에 의해 신앙에 입문하게 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시작부터 분명한 신앙의 자세를 간직한 것으로 성경은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행 4:32이하에 초대교회와 바나바의 모습이 소개된 내용이 나오는데 이렇습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로부터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여기에서 증거하는 것처럼 바나바는 그의 전 재산을 바침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점이 바나바에게 있어서 독특한 점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전도를 받은 평범한 모습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 시작을 분명히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도 "첫 단추를 바로 꿰지 않으면 모든 단추를 다 잘못 꿰게 된다"는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나바의 모습은 우리의 시작과 처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오래 다녀도 성령의 충만한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처음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 여사가 쓴 글인데, 자기가 세례 받고자 준비하면서 지녔던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서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 여사가 세례를 받기 위해 그렇게 몸이 아픈 가운데에서도 기도와 성경 읽기와 회개를 아주 힘쓴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나는 너무 쉽게 세례 받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바나바는 시작이 분명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나바였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령의 충만함도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2. 바나바는 새로운 상황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나바 뿐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의 충만하다는 것은 경직된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적합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러한 능력을 지혜라고도 말하지만,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는 이러한 지혜와 더불어 신뢰가 함께 따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1. 바나바는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신뢰하였기에 안디옥 교회에 선교사로 파송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도 그를 잘 따른 것을 보면 신뢰를 받았던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위로는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아래로는 성도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바나바의 모습을 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충만한 사람의 모습 속에는 이러한 신뢰받는 모습이 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2-2. 바나바는 신뢰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신뢰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가 멀리 다소라는 지방으로 가서 거기에 거하고 있는 사울(후에 사도 바울)을 데리고 온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바울은 비록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는 하였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행 9:26이하에 보면 "사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거기에 있는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냈는데,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주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고, 헬라파 유대 사람들과 말을 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 신도들이 이 일을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다."

그런데 바나바는 이러한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였다고 오늘 본문은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것은 신뢰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신뢰한다는 것은 본인이 신뢰받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신뢰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신뢰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우리는 바나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2-3. 신뢰받음과 신뢰함의 결과

그런데 이러한 신뢰를 받고, 신뢰를 하는 사실은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보면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로도 충분한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24절 하반절에 보면,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라고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는 바나바의 역량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멀리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사역을 합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모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자체 만족으로 끝나는 교회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행 13장부터는 바울의 선교 여행이 시작됩니다. 행 13장에는 제 1차 전도 여행, 행 16장에는 제 2차 전도 여행, 행 18장부터는 제 3차 전도 여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 1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고 이를 지원하는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이러한 안디옥 교회의 모습은 자체적인 만족에 그치는 교회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 탄력이 붙어 세계 전도를 꿈꾸고, 이를 계획하고 실행하며 주도해 나갈 수 있는 교회적 여건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되는 데에는 바로 바울이라는 지도자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은 누가 데리고 왔습니까? 바로 바나바가 데리고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충만한 자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성령이 충만해진다면, 이렇게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자세와 비젼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충만함이 없다면 자체적인 만족에 그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3.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를 소개하면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더불어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말은 그 사람의 방향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다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마 25장의 "달란트의 비유"에 보면, 예수님께서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칭찬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착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방향이 바르다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이 악하면 충성하는 만큼 해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착하다고 하는 것은 늘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는 그러한 자세를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들 주보의 "일분 지혜"를 보시면 진정한 기적이 무엇인가 나와 있습니다. 이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기적이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그걸 기적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의미로 바뀌어져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면 충만해질수록 점점 더 착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을 내 뜻에 맞추려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출 수 있기를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면서 착한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이 나온다면 그것은 성령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바나바를 통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흔히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아니면 기독교가 이방지역으로 뻗어나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도 바울은 바나바를 만난 것이 행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바울이 교회에 소개되기가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더욱 온전히 뻗어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교회 공동체에 행운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바나바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 앞에 귀한 복을 가져다주는 크리스천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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