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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고와 책망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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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1959년부터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1994년 병으로 더 이상 강의할 수 없을 때까지 사회학을 가르쳤던 모리 슈와르츠(Morrie Schwartz)교수는 루게릭병이라는 불치병, 즉 근위축성 측생 경화증이라는 치명적인 신경계통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영국의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도 같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1939년 미국 양키스 팀의 야구선수 루게릭이 이 병에 걸리면서 ‘루게릭병’ 병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는데 발병한지 5년이 되면 서서히 근육이 마비되는 증상이 끝내는 가슴까지 진행되어 죽게 되는 병입니다.

모리 슈와르츠 박사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까지 제자와 함께 매주 화요일 마다 수업을 했습니다. 화요일 수업의 유일한 제자였던 미치 앨봄(Mitch Albom)은 모리 슈와르츠 교수님과 나눈 대화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교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인생을 어떻게 마감하고 있는가를 진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자인 미치 앨봄에 따르면 모리교수님이 남은 생을 진지하게 살 수 있었던 계기는 ‘살아있는 장례식’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함께 강의하던 친구 교수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온 모리교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이런 부질없는 일이 어디 있담…….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멋진 말들을 해 주는데 정작 주인공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하니 말이야…….” 그러면서 아주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는데, 바로 살아있는 장례식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추운 일요일 오후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을 모아놓고 살아있는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모리 교수가 죽었다고 전제하고 모여서 죽은 모리 교수에게 각각 경의를 표했습니다. 몇 명은 울고, 몇 명은 소리 내어 웃기도 합니다. 어떤 여자 분은 시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은 모리 교수는 남은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남은 마지막 생애 동안 ‘죽어간다’는 말이 ‘쓸모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지만 최근에 들어 저도 나이를 의식하게 됩니다. 지나온 날을 돌아봅니다. 이제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기에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해 봅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이 자기 삶을 정리하며 마감하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젊은이들이 인생 목표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가 분별도 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몇 년 전부터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님을 주변 사람들이나 책을 통해 알게 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고민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은 모리 교수님처럼 ‘살아있는 장례식’을 한번 해보는데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살아온 약력을 한번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 대신 조사를 써보는 것입니다. 내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하는 말 그 뒤에 진짜 나에 대한 평가의 말을 예상해본다면 어떨까요? 적어도 우리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계기는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동안교회가 창립 된지 46주년 되는 날이자,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지 54년의 세월이 흐른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전쟁과 민족의 비극 그리고 분단의 아픔과 함께 탄생하여 사람으로 말하면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교회는 그동안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해왔고, 어려운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잘 성장해 왔습니다. 교회의 마흔 여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오늘, 교회의 살아있는 장례식을 한번 상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생일도 생일이지만, 종말을 향해 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동안 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 방황하는 많은 영혼에게 복음과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영향력 있는 공동체인가를 한번 점검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관한 말씀은 마지막 때 교회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지막 때 교회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또 어떤 특징을 갖게 될 것인가를 말씀해주는 동시에  인간적 혹은 세상적인 시각이 아닌 교회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어떻게 고치실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교회된 우리 각자와 교회가 갖춰야 할 바람직한 모습,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 앞에 나타나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실까, 오늘 우리 교회에 주님께서 나타나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교훈을 주실까. 

1절 말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일곱별과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여타한 해석이 있지만, 종합해 볼 때 교회에 주인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에베소 교회가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곱별과 일곱 촛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가 본질적인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고 있는가를 계속 점검하시고 점검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간섭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하필 에베소 교회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당시 에베소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도 가장 안정감 있게 자리 잡은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들과 주변 교회에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에베소 교회를 개척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고, 3차 전도여행 시 3년간이나 직접 목회를 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오래 머물렀던 적이 없는데 3년 동안이나 에베소 교회의 여러 교인들을 가르치며 기초를 세우고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명한 성경교사였던 아볼로, 신실했던 목회자인 디모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현장에서 직접 어머니를 부탁받았던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끝까지 모시고 목회했던 곳이었습니다. 교회가 있던 지역은 무역으로 유명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한편으로 우상 숭배와 미신으로 선교가 힘든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아데미 여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 사역이 가장 힘든 곳이어서 바울사도는 두란노라고 하는 서원을 세워 말씀으로 교인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또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헌신적인 부부가 나왔던 곳이기도 하고 소아시아 교회 중에서 가장 모범이 되면서도 정통적이고 뿌리가 깊은 교회였습니다. 주변교회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는 교회, 주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얼핏 보아서는 책망 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한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에 이단이 들어오려 했을 때, 말씀의 기준이 분명하여 지혜롭고도 조용하게 분별해내었습니다. 2절 말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칭찬받을 만한 교회였지만, 에베소 교회는 자신들도 모르게 핵심은 잃고 외형만 있는 교회로 변했기 때문에 특별히 교회의 주인 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오래되었다고 자랑할 만한 것이 많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사와 전통이 오래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복음의 본질을 잃고 외형에 의존하며 형식을 강조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전통과 같은 다른 비본질적인 요소가 주인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주님이 칭찬하시는 내용에서 더 정확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에베소 교회를 비교해보면 뚜렷이 알게 되는데,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칭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두고 ‘내가 네 믿음의 역사를 아노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에베소 교회가 수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랑의 수고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행함은 많았지만 믿음에서 나온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짜여진 조직과 프로그램, 여러 활동으로 바빴지만 믿음과 사랑이 아닌 자기 명예와 맡은바 책임이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인내는 하였지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에 대한 기대와 감격 또 천국에서 누릴 상급과 소망으로 인내하며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3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긴 있었지만 하나님께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함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기초한 역사라 함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말과 행위 그리고 내면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수고와 노력은 많았지만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나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때문이었다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한다 해도 믿음으로 할 때와 책임 때문에 할 때는 결과가 다릅니다. 관계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인내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자기 의와 수고에 대한 대가를 구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는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며 어떤 어려움과 시련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어려운 문제 앞에 기도합니다. 중심이 어떠하냐에 따라 과정과 방법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교회도 역시 점검해봐야 할 점입니다. 인간관계나 책임감 때문에 혹은 성품 때문에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봉사가 아니라 중심에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하는 봉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열심 자체는 인정하실지 몰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수고라는 뜻은 내가 피곤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일을 떠맡는 것을 말하는데, 사랑에 의해 촉진된 수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와 내가 오랫동안 만났기 때문에 정이 들어서 하는 수고, 가족간이나 동기간에 피차간 끌려서 하는 수고, 강한 애착 혹은 이성간의 사랑 때문에 하는 수고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고 왕래하는 것이 정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에 근거해서 하는 사랑인지, 오래 얼굴보고 친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인지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주신 사랑이라면 처음 교회에 나온 교인들에게 자신을 헌신하여 돕고 사랑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대부분은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로 애쓰지 않습니다. 사랑을 줄 수 없는 곳에 사랑을 주고 주어도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곳에 주는 그런 사랑을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오래된 교회일수록 끼리끼리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수고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오래된 교회가 갖는 결정적인 어려움 일 수 있습니다.

소망의 인내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소망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소망이 아닙니다. 소망의 인내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어를 보면, 소망으로 인한 인내를 말합니다. 현재 억울함도 있고, 고통스러운 상황도 있지만 오실 주님과 약속의 성취를 바라며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가운데서 장차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였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도 인내합니다. 조금만 참으면 자기 인격에 손상이 가지 않으니까, 조금만 인내하면 목표하던 바를 이룰 수 있으니까 이것 때문에라도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망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정당하게 심판하시고 갚아주실 천국의 소망 때문에 오늘을 인내하고 견디며 기뻐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수고와 행위, 사랑 등 모양은 있는데 정작 내용이 빠지게 된 원인을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양과 형편 다 중요하지만 처음 사랑이 빠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하실 만큼 비중을 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쩌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을까요?

데오도르 에프 목사님은 에베소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이 너무도 철저하여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와 에베소 교인들 사이를 나눌 수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을 혼돈하게 만들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데는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위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게 만들어 정작 예수님으로부터는 멀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교회 나오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인데, 성가대로, 교사로, 차량 봉사로, 예배 안내로 너무나 바쁩니다. 이런 것은 부수적입니다. 봉사 때문에 예배도 놓치는 분이 많은데 착각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서 만나고 기쁨으로 교제하기 때문에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지 교제도 없이 봉사만 하면 결국 사단이 승리하는 결과가 됩니다. 마치 남편이 결혼해서 돈 실컷 벌어 주고, 아내도 열심히 빨래하고 밥해주는데 가족으로서 만나는 시간이 없으니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깨지고 이혼하는 부부와 같습니다. 돈 벌어 주기 위해, 밥 해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의 교제와 함께하는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미국의 한 전문가는 남편이 아침에 출근할 때 부인이 ‘여보, 잘 다녀오세요!’ 라는 한마디만 하면 이혼하지 않을 가정이 많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일주일에 얼마나 갖고 있습니까? 말구유는 얼마짜리며, 예수님이 머물렀던 여관은 어느 여관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데 정작 말구유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점점 멀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5-8에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처음사랑이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랑 즉, 자아를 부인하는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비교가 없고, 아무것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제 딸이 지금 7살인데 딸아이가 자장면 먹는 것만 봐도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입 주변에 다 묻혀도 귀엽습니다. 전 딸이 자고 있으면 발에 뽀뽀도 합니다. 사랑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이 빠져나간 형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인 시몬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시는데 한 여자가 와서 비싼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머리와 발에 부으니 가롯 유다가 화를 냅니다. ‘아니 차라리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얼마나 더 귀하겠는가.’ 그때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를 책망하시며, ‘돈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여인에게는 예수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처음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도 함께 증거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순교한다 할지라도, 한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지라도 사랑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20세기 미국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에이든 토저 목사님(A.W. Tozer)은 종교가 타락하는 세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첫째 단계가 기계적 상태입니다. 아무 느낌 없이 종교적 활동을 반복합니다. 오랫동안 출석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이 드려왔던 예배며 찬양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격과 기쁨이 없이 기계적으로 종교적 행위만 반복하는 단계입니다. 놀라움이나 기대감도 전혀 없습니다. 의식 없이 찬송 부르며 가사의 의미도 모릅니다. 기도드릴 때도 그냥 눈 감고 있다가 눈 뜹니다. 

다음 단계가 습관적 상태입니다. 기계적 단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바로 이러한 기계적인 상태가 자기 영혼을 마비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사실조차 분별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단계가 부패한 단계입니다. 교회역사는 이 단어로 가득 합니다. 이 상태는 더 좋은 것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장을 향한 소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기대가 없습니다. 경쟁은 있지만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경쟁입니다. 회개도 성령의 능력도 모르며 굉장히 메말라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늘 평가와 비판이 따라 다닙니다.

이때 나타나는 세 가지 죄가 있는데, 자기 의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 없이, 늘 마음속에 이것을 봐도 혹은 저것을 봐도 잘못이고 자기 자신이 모든 것에 중심이 되어 계획하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외에 남을 비판하는 기능까지 작동하여 비판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자기는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죄의 모습은 자기만족이 최대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족하는데 스스로는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좋다고 말씀하시는데 자기 마음에 만족이 없으면 불편하고 불만스럽습니다. 무감각한 채로 바리새인처럼 형식에 매여 다른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토저 목사님의 말씀처럼 오늘 나 자신과 교회, 나아가 한국교회에 이러한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동안교회는 그냥 하나의 개교회가 아닙니다. 이미 많은 목회자들과 세계 교회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셨을 때나 지방에 가셔서 우리 교회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전통이 오래면서도 끊임없는 개혁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복음 앞에 변화하는가를 관심 있게 살피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입니다. 

불과 1-2년 새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10-20년 만에 변할 일들이 6개월 만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과 변화는 조만간 교회에도 밀려 올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물리적으로라도 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교육 현장이 변화에 따른 대책 없이 능동적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교조에 의해 어려움을 겪는 이유와 같습니다. 사회와 시대의 변화 앞에 복음으로 바로 세워져 변하지 못한다면 교회도 일그러진 모습으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제게 있습니다.

큰 변화의 소용돌이 앞에서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주신 건강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며 천국의 소망을 주는 공동체로 설 수 있는가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치관 없이 혼란 중에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과 기준을 세워주고 양육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 이상 내 인생만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겪는 혼란과 아픔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사명을 다시 돌아보고 우리 삶의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면 지금의 혼란과 어려움은 창조적인 고통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혼란을 기쁨으로 감당할 소망과 인내를 지닌 사람, 주님의 백성과 공동체로서 비전을 품은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이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살아있는 장례식을 잊지 마시고, 계속해서 자신을 점검하는 지혜를 소유하십시오. 또한 우리 수고와 노력과 행위가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지, 욕망과 책임과 환경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분명히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동안교회는 내 교회가 아닙니다. 동안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동안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성령의 열매를 얻기 원하시지 우리 육신과 생각의 열매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과 지식,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령 앞에 순종하는 새로운 결단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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