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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의 열매 (약 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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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함께 복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오늘 본문 18절은 농사짓는 이야기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자란 분들에게는 이런 본문이 좀 어려울지 모르지만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좀 쉽게 이해 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또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심는 일이 나오고, 추수하는 일이 또한 나오고 있습니다. 이 농사짓는 일은 본래 인생의 근본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農者 天下 之 大本 이라고 써 붙이고 꽹과리 치고 신나게 노는데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생은 농사짓기를 싫어합니다. 그의 근본 되는 토지를 갈게 하는 주재자의 뜻을 거슬러서 될 수 있는 대로 좀 편하게 살 수 없나 궁리합니다. 그래서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게 됩니다. 도시로 몰려드는 추세는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가속화 될 것 같습니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 빠져드는 큰 성 바벨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큰 성이란 요즈음 용어로 바꾸면 대도시입니다. 농어촌 시골이 아니라 대 도시 바벨론, 메트로폴리탄 시티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지명된 것은 유념할 부분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른 아담을 향해 선고하셨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은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네가 그 속에서 취함을 얻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대 주재 하나님의 이 선고대로 저주받은 땅에서 사는 인생살이는 고달픕니다. 얼굴에 땀이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도록 되어졌습니다. 본래대로 한다면 일하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타락 이전에는 그게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니까 노동은 고통스런 것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자기 앞을 지나가는 짐승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은 신나는 작업이었습니다. 정원을 가꾸고 꽃을 심는 작업이 모두 기쁨의 대상이었는데 이제 그것들은 모두가 힘 드는 작업이 되었습니다.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땅에는 가시덤불이 돋아나고 엉겅퀴가 솟아납니다. 공업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장에 많은 물건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은 오염되게 되고 오염된 자연이 공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그렇고 장사를 해도 그렇고 공장을 차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서든지 이 세상살이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 가장 힘 드는 것이 농사짓는 일입니다. 정말 힘든 노동의 대가로 살아가는 곳이 농촌입니다.

그래서 시골 처녀들마저 떠나서 도시로 흘러들어 옵니다. 소꿉장난하던 친구들도 있었고, 가슴을 설레게 했던 총각도 있었겠지만, 한번 시골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월세방 얻어서 달동네에서 살아도 시골보다는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를 몰고 한번씩 나가보면 시골 풍경은 한가롭고, 목가적입니다. 푸른 들판을 바라보면 속이 시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살면서 일을 해 보면 이야기가 달리지는 것입니다.

씨뿌리기 위해서 땅을 다듬는 것도 땀 흘려야 하는 일이고 씨를 뿌린다고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곡식들이 잘 자라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김을 매어 줘야 합니다. 곡식보다 잡초는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돌아서면 또 김을 매어야 됩니다. 웬 종일 물 논에서 허리 굽히고 김을 매다 보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 농촌의 생활 중에도 그래도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이 있다고 하면 추수할 때일 것입니다. 수확의 기쁨은 한 해 동안 모든 수고와 땀을 보상해 주는 순간입니다. 오곡백과를 거두어 드리는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 하신 시편의 말씀처럼 단을 거두는 순간은 그래도 기쁨의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이야기가 배경입니다. 씨 뿌림이 있고 열매를 거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화평으로 심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씨를 뿌리고 의의 열매를 거두는 기쁨의 장면이 있습니다. 

정말 심은 대로 거두는 진실한 현장이 농사짓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씨를 어떻게 뿌리는지 현장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벌써 어떤 추수가 이루어 질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1. 우리의 삶에 어떻게 씨를 뿌려야 합니까?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라고 합니다. 새 번역에는 심은 씨가 바로 화평인 것처럼 말을 했는데 그것보다는 화평한 가운데서 씨를 뿌렸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평화스러운 가운데 씨를 뿌리는 자가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본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혜는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남의 의견을 꺾고, 자기 의견이 꺾이면 화를 내고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펼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지혜는 평화 가운데 그 씨를 뿌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의논할 때는 거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시기와 다툼 가운데서 심는 씨앗은 요란과 모든 악한 일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내일 어떤 추수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씨를 뿌리는 오늘에 결정됩니다. 기독교는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꿩 잡는 게 매”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지금 씨를 뿌리는 순간순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말을 하고 행동하는 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온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있는지 그것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일하는 과정은 내일의 결과만큼 중요합니다. 우리가 큰일을 할 때는 한 사람이 다 완수하지 못할 때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 속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가운데서 일을 하면 그 일은 능률도 오르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고 하나님도 흡족히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서로 비난하고 서로에 대해서 상처를 주고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큰일은 당대에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일도 그렇고 큰 건물을 세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이런 건물 하나 지으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리지 않습니까? 유럽에 있는 큰 사원들을 보면 70년, 80년도 좋고 심하면 100년 200년도 가면서 대를 걸쳐가면서 세워가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성경 공부교재 가운데 “약속 그리고 구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본래 그 책을 쓴 분을 ‘더 그라프’라는 목사님인데 목사님이 그 책을 쓰게 된 것은 자기가 자랄 때에 자기를 가르쳐준 목사님이 그런 식으로 성경을 쭉 설명해 주는 것이 너무 감동이 되어서 뒤에 목사가 된 다음에는 자기도 그렇게 가르치기 위해서 책을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씨’는 앞의 목사님이 뿌렸고 ‘추수’는 뒤의 목사님이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권의 책도 영양가 있는 책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화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공립학교를 세웠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일주일에 엿새 동안 학교 가서 세속적인 가치관을 배우다가 주일날 한 시간 그것도 교역자가 30분 설교하고 나머지 30분은 완전히 도떼기 시장같은데서 분반공부 한다고 그렇게 해서 기독교 교육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우리는 참 믿음이 큰 사람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고 변함없이 줄기차게 그 자갈치시장을 운영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화란의 신앙의 부모들은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세속적인 철학에 따라서 아이들이 1주일 내내 공부를 하고 게다가 텔레비전이다 컴퓨터다, 요즘 같으면 그렇게 하다가 주일날 반짝하는 한 시간 그 교육에 의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자녀들이 믿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화란의 신자들은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이라고 인식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자녀 교육의 책임을 국가에게 명한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명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누웠을 때든지 앉았을 때든지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언제나 하나님을 가르치도록 그렇게 명령을 했습니다.

학교는 우리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위탁한 기관입니다. 학교가 우리 아이의 교육을 책임지는 기관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부모를 대신해서 우리 자녀의 교육을 맡아서 수고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교육에 대한 마지막 책임은 부모가 져야 합니다.

요즘 그런 뉴스 보셨지요? 수업 중 교실에서 동급생 간에 발생한 살해 사건에 대해서 막지 못한 학교 측에 피해 학생에 대한 배상책임을 묻는 어처구니 없는 판결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교사와 교장은 (학생들에 대한 교육활동에서 학부모 대신 학생들을 보호 감독할 의무가 있다”며 “가해 학생은 감정조절이 힘들 정도로 자주 밖으로 분노를 표출했고, 피해학생은 평소급우들을 괴롭혀 많은 학생들이 불안과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는데도 교사들은 형식적인 지도에 그친 잘못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판결한 이유입니다.

그러면 그 판결 이유대로 받아들여서 가해 학생이나 피해 학생이나 문제아들 아니었습니까? 그 문제아에 대한 책임을 그렇게 키운 부모의 책임은 어디가고 교사와 교장에게 사고발생의 60%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교육에 대한 책임주체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한 둘 낳아서 제 자식도 바로 못 키우는 세상에서 30명, 40명을 갖다 맡겨 놓고 사고 났다고 60% 책임을 학교와 교사에게 지운다고 하는 게 맞는 일입니까? 우리의 자녀가 일으키는 문제의 주된 책임은 부모인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란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자기들이 믿는 신앙에 입각하여 교육시키기 위해서 투쟁을 했습니다. 국가에 세금을 다 내어놓고 기독교 교육을 하기 위해 몇 배되는 교육비를 부담을 했습니다. 과외 수업 비 부담하는 이상으로 기독교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돈을 따로 내어서 교육 시키면서 나중에는 국가를 향해서 그렇게 요청했습니다.

‘우리도 세금을 내니까 우리가 낸 세금에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 주십시오. 우리가 세금을 내었으니까 우리가 낸 세금에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월급을 지급해 주십시오.’그렇게 국가를 상대로 해서 소송을 냈습니다. 

오랜 투쟁 끝에 화란에서는 기독교 공립학교가 설립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주일날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도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가 태어났습니다.

이런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누군가 씨를 뿌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며칠 동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때문에 씨를 뿌리는 작업을 할 때 목표가 너무 멀리 있기에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습니다.

화평 중에 뿌려진 씨앗은 복된 수확을 미리 내다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사랑함으로 평화 속에서 결정해 나가면 아직까지 가을이 오지 않았지만 벌써 가을에 추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알 수 있습니다.

의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멀리 열매가 보일수록 믿음이 더 필요합니다. 손에 잡히는 열매가 지금 우리 앞에 없을 때에는 바로 눈에 보이는 일을 하는 때보다 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눈물로 씨를 뿌렸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기쁨으로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이미 1장 20절에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성내어 가지고는 하나님의 의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백번 옳아도 화내면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진다는 것입니다. 오직 화평으로 심을 때에 의의 열매가 거두어집니다.

아이들도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라 하는데 말을 안 듣습니다. 5분 뒤에 보면 또 놀고 있습니다. 10분 뒤에 시장 갔다 오니까 또 놀고 있어요. 그러면 화나죠. 그런데 또 아이들 한번 보세요. 지가 어떻게 했는지는 생각도 안합니다. 화를 내고 엄마가 야단을 치면 혼자서 돌아앉아 ‘공부할 기분 다 잡쳤다 엄마가 화내서’그럽니다. 차라리 화가 많이 날 때는 목욕탕 들어가서 혼자 우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와서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이야기를 하십시오.

화평 가운데 씨를 뿌려야 의의 열매가 거두어 집니다. 그저 그냥 어머니 소리가 집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고함치고 그런다고 그 집 아이가 잘되는 것 아닙니다. 시기와 다툼 시끄러움이 있는 곳에는 의의 열매가 거두어 질 수 없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 열매를 늘 중요하게 여깁니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열매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마지막 판가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누구보다도 구체적인 실천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좋은 열매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대합니다.

열매 없는 믿음을 멀리 했습니다. 고백만 시끄럽고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멀리했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지혜를 싫어했습니다. 제직회 모아놓으면 똑똑한 사람이 한 두 사람만 설쳐도 그날 분위기는 다 망칩니다. 당회를 모여도 시끄럽기만 하면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똑똑함은 하나님의 지혜에서부터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지혜를 모아서 의논 할 때는 시끄럽지 않습니다. 거기에 좋은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장차 일은 완성 될 것이지만 ‘의논 하는 것 보니까 하나님이 복 주시고 있구나, 하나님이 같이 하구나’ 사람들이 그걸 미리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삶에 어떤 열매를 거둘 것인가?

본문이 말하는 열매는 “의의 열매”라고 말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의 열매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맺혀진 열매가 바로 의다 하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의에서부터 시작해서 열매가 맺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의의 열매”란 의로운 열매로 볼 수도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이 이 씨를 심었죠, 그럼 화평케 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산상 보훈에 보니까 “화평케 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아무나 화평케 하지는 못합니다. 반면 아무나 소란케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화평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만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평화를 맛보고 이 평화가 우리 마음에 깃들게 되면 웬만한 일가지고 화를 내고 고함치고 그러지를 않습니다. 아이들이 조금 애를 심하게 먹이더라도 주부의 마음속에 평화가 가득 있으면 그 가정에 평화를 맺힐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의를 덧입은 사람들만이 세상에서 의의 씨를 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을 존경해야 하고 신앙 좋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만이 세상에서 유일한 소금이 될 수 있고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화평케 하는 자들은 의의 추수를 바라보고 조용히 계속 씨를 뿌립니다.’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바라보고 씨를 뿌리는 곳에는 요란의 독초가 나질 않습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뿌린 씨앗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하여 그런 평화를 만들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번 우리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자주 터져 나옵니까? 직장을, 일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의 교회  되기 위해서 누군가가 무릎 꿇고 앉아서 묵묵히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이 계속 될 때에 울산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씨 뿌리는 수고 없이 의의 열매가 맺히길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남들이 다투고 시기 할 적에, 알지도 못하고 남을 해칠 수도 있는 말을 할 때에 나도 한마디 안 거들면 마치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같이 그렇게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너희는 거기서 나와서 그들이 받을 재앙에 동참하지 말아라”주님은 그렇게 말합니다. 악한 세상에 왕따가 되어라 그래서 그 악한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때에 동참하지 않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나쁜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나쁜 말을 안 하면 여러분에게 말하던 사람이 주춤합니다. 별로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면 말하다가 주춤합니다. 엉겁결에 주워 담습니다.

제주도 새생명 마지막 날 제주도 몇 곳을 둘러보는데 아침에 기사 아저씨가 마이크를 잡고 하는 말이 제주도 설명을 해야 되는데 갑자기 제주도에 있는 국회의원들 욕한다고 열 내기 시작하는데 정말 아침부터 듣기 힘들더라고요. 할 수 없이 중단을 좀 시켰지요. 사람들이 다 자고 있다고 핑계해가지고. 아침부터 그렇게 자기보다 몇 배 나은 국회의원들 욕 할게 뭐가 있습니까?

남에게 대해서 말을 할 때는 항상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저는 울산교회 나온 지 한 달 만에, 두 달 만에 그런 수준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년, 이년, 삼년 세월 지나가서 학습 세례 다 받고 제직까지 되었는데도 모였다 하면 수군수군 거리고 이러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연초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 힘써 노력하기로 우리는 약속을 했습니다. 다른 성도들을 사랑으로 대하겠다고, 다른 성도들에 대해서 수군거리지 않겠다고. 적어도 제직들이라고 하면 이런 기준에 따라서 행동해야 됩니다.

집사는 집사끼리 권사는 권사끼리, 장로는 장로끼리 목사는 목사끼리 이야기를 할 때 좋은 이야기 하도록 결심해야 됩니다. 왜 답답한 일이 없겠습니까? 보면 답답한 일이 있으니까, 통한다 싶으니까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마는 꼭 답답하거든 지하 기도실에 가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만 속사정을 털어놓으십시오. 미주알고주알 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듣는데서 이야기 하려고 하면 골라서 좋은 말만 해야 합니다.

의의 열매가 맺힐 것을 소망하면서 씨를 뿌리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들은 의의 추수를 바라보고 계속 씨를 뿌립니다.

“의의 열매”란 의로운 행동이 산출한 열매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게 한 것이 바로 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지 않는 곳에는 어떤 화평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룬다는 것은 신기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볼 때에 그 마음에 흡족한 수준이 되어야 우리 삶에 평강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끼리 모여서 화해의 노래를 불러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민족이 하나라고 아무리 노래해도 거기에 희망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미국이 하는 일이 언제나 옳고 잘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작년에 갔다 와서 미국 안 가려고 결심하고 있고 우리 아이들도 안 보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영어 교육 시키려고 하도 많은 사람들이 신청을 해서 지금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 할 것 없이 지금 보낼 때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미국은 빼놓고 있습니다. 하지마는 6.25 동란이 터졌을 때에 미군이 파병된 것은 나쁜 일 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때 파병이 있었기 때문에 열여섯 나라가 우리를 도왔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다 공산주의 치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잘못 하는 것도 많죠? 이라크 일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만 보지 마세요. 공산주의가 지난 백년 동안 얼마나 많은 무고한 피를 흘렸는지도 봐야 됩니다. 부시 밉습니다.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어떠했으며 김일성과 김정일은 어떠한 일을 저질렀으며 지금도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왜 여러분 말하지 않습니까? 왜 보지 않습니까? 우리끼리 민족하나를 외친다고 해서 평화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균형 있게 바라봐야 됩니다. 세상의 어떤 나라도 단체도 절대 선한 나라는 없습니다. 단체도 없습니다.

며칠 전에 교단일 때문에 복음병원 노조위원장 만났는데 그동안에 복음병원 역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지적해서 이야기 하고나니까 질문할게 있다고 그러면서 자기들에게 부인하더라고요. ‘노조는 그런 단체가 아니라’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당신 말 못 믿겠다” 노조뿐만 아니라 어떤 단체도 어떤 개인도 잘 못 할 수 있고 잘못 한 적도 있는거지요. “우리 노조는 절대 잘못이 없었습니다”그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이예요. 그렇게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소득 6,000불 연간 육천만원 칠천만원 일억이 넘어가면서 사회를 소란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이름으로 해도 그건 옳지 않습니다.

휴가 다녀오셔서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가보셨지만 30년, 20년 10년 전에 비해서 얼마나 우리나라가 많이 외형적으로 달라졌습니까?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하여 뚫려진 길을 달리면서 만든 사람을 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의 나라 대통령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가면서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니까 손수건을 꺼내주면서 하는 말이 “우리 독일이 도와 주겠습니다”그때 미국은 돌아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데 공과를 함께 봐야 합니다. 공은 칭송하고 과는 고쳐가고 이래야 되지 어떤 놈들이 하는 것은 다 옳고, 어떤 놈이 하는 것은 다 나쁘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그런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비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참 그 부분은 지워버리고 싶은 부분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일는 일이 먼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기반하지 않는 화해는, 통일은 물거품입니다. 화해하자면서 막걸리 한잔 마시고 화해가 되었다면 세상이 이렇게 험해져 갈 수가 없습니다. 남자 빼고 우리끼리 한잔하자고? 술 선전 잘 합니다만 그렇다고 세상이 화목이 됩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야 희망이 있습니다. 촛불을 드는 것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향연이 올라가는 거기에 민족의 내일이 있습니다.

가정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하나님의 질서가 서야 됩니다. 가장은 가장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위치를 지키게 될 때 거기에 새로운 사회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 질 때 거기 그런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지 거기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충족되지 않는 한 화평은 노력하면 할수록 기초 없이 쌓아 올리는 벽돌담과 같습니다. 올리면 올릴수록 애쓰면 애쓸수록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이 자식으로 향하고 거역하는 이의 마음이 지혜로운 자에게로 귀를 기울이게 될 때에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 일 하기 위해서 여러분과 나의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신 전능하신 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지 않고는 이 세상에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재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온갖 손에 쥘 것은 다 쥐면서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사회, 그런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가부장적인 남편 잘못이라고 말하는 여자의 입이 닫히기 전에는 그 가정에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잘난 아내가 문제라고 아내를 향해서 책임을 전가하는 남편이 있는 한 가정의 평화가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한 가정 이루고 자녀들을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희생의 제물로 자신을 내어 놓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들이 있었기에 오늘 여러분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부모가 되어야 자식들의 내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평화를 위해서 땅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을 먼저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깃들게 된 것입니다.

공의가 충족된 다음에는 세상이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니라.”(사32:15-16)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는 너무 요란하고 불안하고 악이 성행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이 선지자의 마음은 그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그때가 오면 사람 사는 동네 뿐 아니라 광야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공의가 깃들게 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긍휼과 진리가 만나고 사람 사이, 하나님 사이, 하나님과 사람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는 의가 자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습니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이런 선지자들의 비전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 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렵기 때문에 아무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그 때 우리 주님이 오심으로 이룩될 새 나라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의가 보금자리를 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비록 현실이 어둡고 춥더라도 이런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그 날을 볼 것입니다.

화평의 열매를 거두시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합니다. 그 마음속에 평화가 항상 우리를 호위할 것입니다.

평화의 추수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생애가 사람들에게 화평을 가져다  주는 생애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평화의 주님 그분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그분의 죽음이 내 죄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게 되고 그래야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고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평화를 촉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를 거둔다는 의미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의의 열매”는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작점이 의가 될 수도 있고 궁극적인 열매가 의가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열심히, 열심히 화평 가운데서 씨를 뿌려서 의의 열매를 맺는 세상 오기를 사모 해야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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