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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릎을 꿇고 빈 기도 (엡 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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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한 스승이,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궁금해하는 제자에게 가보로 내려오는 조각품을 주면서 값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 제자는 먼저 양곡상에 들러서
[ 이 보물을 드리면 내게 무엇을 주겠소? ] 하고 물었더니
[ 쌀 한말을 주겠소. ] 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동네에 부자집 영감님에게 찾아갔습니다.
부자는 평소 소장품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 소 한 마리와 비단 한 필을 주겠다 ] 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거절하고 골동품상으로 찾아갔습니다.
조각상을 유심히 살펴본 골동품상 주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 이 물건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대로 주인을 만나면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이 말을 듣고 스승에게 돌아와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제자의 설명을 들은 스승은 말하기를
[ 사람은 배를 채우는 쌀 한 말에 자신을 팔아 넘길 수도 있고,
얼마만큼의 돈을 받고 팔아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인을 잘 만나면 자신을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 ] 고 하더랍니다.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 에 따라 우리 인생의 가치가 달라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주인의 손에 붙들려지느냐? 에 따라 값이 달라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향해 귀중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기원하는 기도한 내용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기도하는 데 세 가지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서서 기도하는 자세입니다(막11:25절).
이것은 그 당시 보통 유대 사람들이 기도 드리는 자세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눅18장13 절에 나오는 세리와 같이
엎드려 기도 드리는 자세로 이것은 보통 자복하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간절한 기도, 겸손한 기도의 자세를 말합니다(엘리야의 기도처럼)
오늘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빈다고 합니다. 왜 무릎을 꿇고 빌며 그리고 무릎을 꿇고 빈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깨닫는 귀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먼저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본문은 '이러하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엡 3:1-13절을 받는 말씀으로서
[ 하나님께서 내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하셨고, 하나님의 일군이 되게 하셔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전하게 하셨으므로 ] 라는 말입니다
나도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앉겨다 주기 위해
이렇게 너희를 위해 무릎 끓고 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14-15절에
[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 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되시는 하나님은
1) 모든 이름을 주관하시는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십니다.
2) 동시에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여기서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란 말은
이름은 존재 가치, 존재 의미를 말합니다.
지난 1998년 11월 2일에 미국 뉴욕시 맨허튼 중심가 센트럴 파크 공원에서
많은 시민과 기자들이 모여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후 1시 12분
드디어 양손에 특수 지팡이를 짚은 한 중년부인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중증 장애인 <조 코플로위츠(50세)>라는 여자였습니다.
눈물과 땀으로 뒤범벅이 된 그 여자분은 절룩거리며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98년 뉴욕시티 마라톤 대회 마지막 주자였습니다.
기록은 31시간 9분이었습니다.
그는 25세때 다발성 경화증이란 병으로 신경이 굳어지고
언어, 시력장애, 운동마비 등의 증상으로 고통받는 장애우였습니다.
그는 모든 대회 참가자 3만 1천 3백34명의 참가자가 골인한 뒤
대회가 끝나고 교통통제가 풀리고 자동차가 다시 거리에 들어찼지만
지팡이를 짚고 걷고 또 걸어서 결승선에 도착했습니다.
당뇨증세로 걷다가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걸었습니다.
모든 시민이 잠들었을 때도 걸었습니다.
그녀는 왜 이렇게 힘든 마라톤 경기에 아픈 몸으로 참가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이 마라톤에 참가했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느낍니까?
지금 무엇으로 내가 존재 가치가 있다고 느낍니까?
지금 무엇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까?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로서의 존재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빌고 있습니다.
그 존재 가치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내게 존재의미와 존재가치를 부여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 <3>
그 분은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표현은 바로 친권적인 관계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이 필수적입니다만
그 이전에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바로 내게 존재가치를 부여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바로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비는 기도의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16절 [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존재가치를 가지고 살려면
가져야 할 것 중의 하나로서
곧 강건한 능력이 있어야 함을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특히 속사람이 강건해야 함은 겉사람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겉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즉 속사람을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세상 사람들이 갖는 능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강건한 능력을 가져야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돈, 권력일 수도 있고, 학식과 명예와 각양 재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그런 세상적인 힘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능력을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 있는가?
바로 우리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에게 임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거짓된 세상에서 진실 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이기주의적 세상에서 이타주의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시고 라고 무릎 꿇고 비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고 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사탄은 항상 교회의 존재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4>
방해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약하면 흔들립니다, 힘없으면 넘어갑니다.
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하는 후계자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딤후2:1절에 내 아들아 은혜 받아 강해야 한다 라고 권면 하면서
당시 무적군대 로마 군인들을 보라고 합니다.
당시 월계관을 쓴 경기자들을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땀 흘려 수고하는 농부들을 보라고 합니다.
강건해야 만이 승리하고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라는 말은
바로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게 하라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라 는 말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담대해집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지게 됩니다.
신학자 칼 발트는 [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께 예만 하는 것이다. ] 라고 했습니다. 칼 발트 교수는
어느 날 손자가 말을 배우는 모습을 보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손자에게 말을 가르치는데“예”부터 가르쳤다고 합니다.
한번은 아이가 싫어서 고개를 흔들면서도
입으로는“예”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여러 번 되풀이한 말이라 싫어도“예”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때 칼 발트 교수의 머리 속에 성령충만한 자의 대답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생각이 성령으로 차 있는 사람이면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싫어도“예”하는 고백이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하나님께 예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이 그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앞에 두시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되
마26:39절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 내가 원치않는 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 하게 하옵소서 ] 라는 기도입니다.
이로 인해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으며,
인류의 무릎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꿇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속사람이 강건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두 번째 기도를 드립니다. <5>
17절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신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브라이언 카바노프>가 쓴 [ 마음의 정원 ] 이란 책에 보면
우리 마음은 정원과 같다고 합니다.
정원에는 잡초가 나기도 하고 좋은 꽃이 자라기도 하는데
이상하게도 잡초는 심지 아니하여도 잘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지만 좋은 꽃은 씨를 심어도 잘 나지 않고 잘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잡초와 꽃이 함께 있으면
잡초는 무성해지고 꽃은 시들시들하다가 죽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잡초를 제거하고 김을 매주어야
땅에서 오는 좋은 양분을 흡수하여 꽃이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도 못된 생각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무성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좋은 생각, 착한 마음은 보전하려고 애를 써도
어느 사이에 시들어 버려서 욕심이 들어오고 화를 내고 시기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을 예수님이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 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변장은 할 수 있어도 예수님 닮아 가는 변화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 붙들려지는 마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만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속에 예수가 없이 예수 있는 체 하는 신앙의 삶은
언젠가 급한 일 부딪치면 낭패 당할 수밖에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바울의 세 번째 기도의 내용이 무어입니까?

18절은 [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 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있어서 '알아'(gnw'nai)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인격적인 지식임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묘사되었습니까? 19절에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즉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고 했는데 원문을 살펴보면
이 말은 하나의 관사 '토'(to;)에 의해서 제한되는 문장인데 <6>
그리스도의 사랑의 특성과 광대함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오점 중 하나로 지적되는 종교재판소는
이단 색출이라는 빌미로, 고발자나 재판 절차를 비밀에 붙인 채,
고문과 위조를 일삼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종교재판 중에서도 15세기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가장 악명 높습니다.
당시 스페인 종교 재판은 적어도 30만 명 이상을 화형시켰습니다.
지구가 둥글다고 했던 갈릴레오가
발언을 취소하고 살아 나온 곳도 바로 스페인 종교재판소입니다.
그러니 감옥 안 죄수들의 참상이 어떠했겠는가.
시간이 지나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을 침략했을 때,
종교재판소가 사용하던 감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신앙 때문에 투옥 당한 죄수들의 흔적이 드러난 것입니다.
특히 지하에 있는 한 감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썩어 미이라간 된 시신의 발목에는 착고와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는데, 감금 상태에서도 울부짖었다는 것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작고 음침한 감방 벽에는
한 신실한 그리스도챤 군사가 긁어서 새겨놓은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네 마디의 스페인어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십자가 위에는 “높이”, 십자가 밑에는 “깊이”,
왼쪽에는 “넓이”, 오른쪽에는 “길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현장에서도
이 죄수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았고,
그것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사랑의 범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범위는 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 세계 모든 시대,
모든 종족과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다 품고도 남음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창세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고,
현재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7>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깊이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기까지 참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바다보다 더 깊은 사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이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감당하시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직분을 감당하고 계시는 사랑입니다.
그레서 장차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야 된다고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면 알수록 강한 자가 됩니다.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면, 우리를 이길 자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인생의 짐이 무거워도 그 무거운 짐 앞에 꺾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이 고통스럽고 비참해도
그 비참한 운명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경험하는 사람은
그 사랑의 힘에 꽉 붙들려서 절대로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넉넉히 이깁니다.
롬8장35절 이하의 말씀은
이를 얼마나 웅변적으로 잘 선언하고 있습니까?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냐? ]
우리는 이런 상황을 다 당해 보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극한적인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언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의 힘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이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고 무릎 꾾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암으로 계속 투병 중에 있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그분의 병상에 가서 <에드워드 페이슨>이라는
미국 목사님의 글을 하나 읽어 드렸다고 합니다.
그분은 44세 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입니다.
그가 병상에 있을 당시 자신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 중 한 토막입니다.<8>
[ 하나님은 내가 받을 축복을 하나씩 차례로 빼앗아 가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없어졌을 때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오셔서 대신 그 자리를 채우셨습니다.
비록 지금 나는 불구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지만
내 생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합니다.
죽음의 강이 내 앞에 있을지 모르지만,
그 죽음의 강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면
한발로 뛰어 넘을 수 있는 조그마한 개울일 뿐입니다. ]
이런 사람을 누가 꺾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런 사람을 패배시킬 수 있습니까?
죽음도,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그를 패배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꽉 붙잡혀 있기 때문에 강합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까?

19절에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만큼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이란? 하나님의 높으심과 완전하심을 총칭합니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 편재 등과 같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들은 인간이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갈 때 점점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여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풍요함이 넘쳐나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도록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바울이 기도하고 말씀하는 핵심입니다.
또한 교회가 세워진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인들이
이 핵심적인 것은 외면한체 종교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뭔가 핵심이 빠져있습니다.

이런 교육을 풍자한 페러디가 있습니다.
어느 장학사가 학교에 장학 지도를 나갔습니다.
과학 교재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 학생 앞에 지구본이 있었습니다. <9>
알다시피 지구본은 공전과 자전 때문에 23.5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장학사가 학생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 학생, 이 지구본이 왜 기울었지요? ]
그러자 학생이 당황하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 제가 안 그랬는데요. ]
놀란 장학사가 옆에 있는 담임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 이게 무슨 말입니까? ] [ 아~! 그건 원래부터 그랬습니다. ]
장학사는 어이가 없는 듯 곁에 있는 교감에게 물었습니다.
[ 이게 무슨 말입니까? ]
[ 그건 사올 때부터 본래 그랬다는 말입니다. ]
장학사는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화가 나서 교장에게 물었습니다.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
교장 선생도 당황해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 국산품 원래 다 그런 것 아닙니까? ]
오늘의 교육 현장을 꼬집는 풍자적인 이야기이지만 마음이 씁쓰레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 교인들이
교회가 왜 세워졌는지 모르면서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충만으로 가득 채워지고
하나님의 충만을 나타내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을!”이란 송영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말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
바울은 이제 마음 깊은 데서부터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에베소서 1-3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비밀의 계시를 다 말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
유대인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 가시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온갖 구하는 것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10>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심지어 생각하는 것까지도
더욱 넘치도록 풍성하게 행하십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하여,
그들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록,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가 기도한 것 그 이상으로,
마음에 생각했으나 기도로 표현하지 못한 것 그 이상으로
기도를 응답해 주실 하나님을 믿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로 구하거나 감히 생각하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높고 풍성하게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변화와 영적 성장을 위해 드리는 우리의 간구에 대하여 믿기 어려울 만큼 넉넉히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넘치는 은혜입니다.
딤전1:14절 [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

문제는 이런 풍성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가난뱅이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방법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무릎을 꿇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필요합니다.
[ 주님 제가 지금 제 심령이 메말라 있습니다.
온 세상을 소유하신 분 가운데 살면서 저는 가난뱅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고백하고 내 마음을 내려놓고
그분의 충만하신 것으로 내 심령을 채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 문을 열고 말씀을 갈급한 심령으로 받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고 그분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려서 내 심령을 채우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직히 여러분 자신들을 털어놓고 채워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내 삶에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나님의 그 충만하신 그 충만이
내 심령을 채우도록 무릎꿇고 그에게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넘치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무릎을 꿇고 비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일까요?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무릎 꿇고 비는 기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야 하고 <11>
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붙들어 줘야 하고
왜 그리스도의 사람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가?
바로 성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21절 [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
이것이 바로 바울의 기도의 핵심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핵심입니다.

제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데요, 좋은 교훈을 배웁니다.
핸드폰은 항상 밧데리를 충전시켜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늘 하나님 가까이 가서 그분의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를 다시 충전시키지 아니하면
절대로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빈 껍데기만 가지고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충전을 시켜야돼요.
기도로 충전시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한 세 가지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믿음으로 계시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여러분이 충만하게 되기를 위해서
우리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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