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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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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기독교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나 낡은 옛 종교 사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항상 새로운 것인데, 그 이유는 복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불변성은 진리의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시간을 초월해서 새로운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구원을 받았듯이, 오늘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함이거나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구태여 기독교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옛 신화 속에 나오는 신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게시며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동일하신 능력으로 만물을 운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근거는 그 전능하심과 더불어 영원하심에 있습니다. 인간을 비롯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쇠퇴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이 불변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불변하십니다. 이 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갖고 계십니다. 풍랑이 대작하는 바다를 명하시니 즉시로 바람이 자고 물결이 잔잔해 졌습니다.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들을 명하니 쫓겨나갔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벌벌 떨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벙어리의 혀로 말하게 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을 행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신성을 갖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으나,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8절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고 하였고,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계시합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절의 앞부분에서는 말씀과 하나님을 구별하나 곧 이어서 말씀과 하나님을 일치시킵니다. 이는 말씀이신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과 위격(位格)이 구별되신 분이시나 신적 본질에서 동일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과 3절은 하나님께서 ‘말씀’ 곧 성자를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심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음을 증거합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성육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신비한 분이십니다. 어떻게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실까요?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2장 9절에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비는 우리의 이성(理性)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성으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나 신성으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이는 인류 역사상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9)…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죄 짓고 불의한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시려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어야 참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구속받은 성도의 관계는 이해타산이나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영원토록 불변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이 영원토록 불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세주시며 중보자로서 영원토록 불변하심을 의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받은 구원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유동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실수에 의해서든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든, 구원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불안해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입시철에 되면, 이따금 웃지 못 할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결정된 합격이 취소되는 경우입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잘못되어 오답이 정답으로 채점된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럴 경우에, 합격 통지를 받고 기뻐하던 사람들이 낭패를 당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그런 불상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거나 무효화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로서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에게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것은 독생자께서 보혈을 흘려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에게 단순히 호의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과 성도들의 관계는 생명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고 하신 대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줄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부모인들 자식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신문을 통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장기를 이식해 준 사람들의 기사를 대할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간을 잘라주어서 살렸다든가,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한쪽 신장을 떼어 준 경우도 있고, 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을 위해서 장기를 나누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너무나 고귀한 일이고 흔치 않은 일이기에 신문에 나는 것이겠지요. 다른 사람의 장기를 받아 생명을 구한 사람으로서는 장기를 준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송두리째 희생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같은 사랑을 받을 무슨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쓰자면, 우리는 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으며(엡 2:1),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습니다(딛 3:3).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에 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 파격적이고 불가사이 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생자께서 생명을 희생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이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실인즉,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옛 사람의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욕심에 따라 살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가 너무 부끄러울 때가 적지 않습니다. 과연, 내가 구원 받은 자인가,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된 것입니다(딛 3:5). 아직도 죄를 짓고 허물이 많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성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족하고 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행실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백성들이 돌이 많고 거친 지역을 지나게 되었는데, 너무 길이 험하므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러자 또 고질적인 습성이 도졌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기를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니 불뱀에 물려 죽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제야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아났습니다(민 21:).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선량한 사람인지, 성질이 고약한 사람인지,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선한 행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고 욕심에 따라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점점 그 생활이 새롭게 변화합니다.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 짓는 자리를 피합니다. 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본받으려고 힘씁니다.

하루아침에 성자(聖者)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점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선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구원 받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으면서도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옛 사람에게 속한 우리의 성격과 욕망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화도 낼 줄 모르고 욕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날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특권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기나긴 여정을 혼자서 걸어간다면 얼마나 고독하고 힘이 들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미고, 친척들을 만나고, 동창회도 하고, 계모임도 하면서 서로 돕고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라는 것이 언제나 호의적인 것은 아니라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부모 형제라도 이해타산을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남남이 만나서 사는 부부 사이는 한층 더 심합니다. IMF 때에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급상승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사이일지라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독해 지기 쉽습니다.

그런가하면 백년도 되지 않는 인생이지만 파란만장한 일을 많이 겪게 됩니다. 나의 힘과 지혜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불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여기에다 비교의식이 작용하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맙니다.

2002년도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1년 한 해 자살한 사람이 8,631명인데, 이는 10만 명 당 19.13명으로서 교통사고 사망률 19.12명을 앞선 것이라고 합니다. 연령별로 보면, 20대가 11.8%이고, 30대가 19.1%, 40대가 20.3%, 50대가 14.7%, 60대가 14.0%, 70대가 17.3%로 나타났습니다. 30, 40대가 가장 높은 것은 그 연령대가 가장 생존경쟁이 치열해서 그만큼 좌절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70대 노인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질병과 고독과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 원인입니다. 그러면 앞날이 구만리 같은 20대의 젊은이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미래에 대한 좌절이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낙심하고 좌절했을 때 누가 곁에서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더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책임을 산 자들에게 돌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여건 가운데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성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을 적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이 그들만 남겨지는 것에 대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지내던 제자들이 문을 박차고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시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니 제자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환난과 핍박이 그들을 위축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옥에 갇히는 것이나 매를 맞는 것이나 굶고 헐벗는 것도 복음 전파를 위한 사도들의 열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이 보여준 열정적인 헌신은 세상적인 이론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기록한 그들의 고백을 통해서 그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말년에 쓴 서신인데, 그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이같이 썼습니다. “17)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때로 주님을 망각할 때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며 떠나지 아니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심으로 언제나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비록 짧은 구절이지만, 그 속에는 한없이 귀하고 은혜로운 진리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이 영원토록 불변합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무쪼록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까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활기차고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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