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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 응답의 6가지 요건 (왕상 18: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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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신앙이 건강한 증거 >

한 사람의 신앙 건강을 진단하는 5가지 지표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이 달게 느껴지면 신앙이 건강한 증거이고, 둘째, 즐겁게 더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신앙이 건강한 증거이고, 셋째, 언제나 말과 생각이 긍정적이면 신앙이 건강한 증거이고, 넷째, 전도하고 싶은 열의가 있으면 신앙이 건강한 증거이고, 다섯째, 지금 기도생활을 하고 있으면 신앙이 건강한 증거라고 합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없다면 영혼이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진실한 기도라면 아주 작은 기도까지도 응답해 주십니다.

어느 날, 어떤 목사님이 예배 시간이 늦어 노란불에서 달리다가 경찰한테 걸렸습니다. 경찰이 딱지를 손에 들자 목사님이 그 손을 갑자기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분을 축복해주세요.” 그리고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 4시까지 설교하러 가야하는데 늦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원 별일이 다 있네. 그냥 가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음주에 목사님이 그 얘기를 교회에서 하자 아주 머리가 빠른 한 성도가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신호위반으로 걸리자 교통순경 손을 딱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분을 축복해 주세요.” 그랬더니 “원 별일이 다 있네”하더니 딱지를 두개 뗐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기도에 응답해주시지만 거짓된 기도에는 응답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는 기도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 본문은 그 문제에 대해 잘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 응답 받는 기도를 위해 필요한 것 >

아합 왕 때, 아합은 강대국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돈 왕 옛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합니다(왕상 16:31). 그때 이세벨이 이방신을 가지고 들어와 이스라엘에 이방신이 만연하자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하늘 문을 닫아 3년 6개월 동안(약 5:17) 비가 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이방 선지자들과 누가 참 신인지 대결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을 비롯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멜산으로 모아 제단 위에 송아지를 놓고 불이 떨어지는 쪽을 참 신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바알이여! 응답하소서!”하고 기도하고 단 주변에서 춤까지 췄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본문 앞 27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가 조롱을 했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봐라! 너희 신이 묵상하는지, 잠깐 나갔는지, 길을 행하는지, 혹은 잠들어서 깨워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자 바알 선지자들은 더욱 큰소리로 바알을 부르고, 피나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정오가 지나도록 아무 일도 없자 29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진언까지 했습니다. 여기에서 ‘진언’이란 ‘무속인들이 하는 열광적인 방언’을 말합니다. 그렇게 진언을 했는데도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나와 갈멜산 정상에서 기도하자 그의 제단에 불이 내렸고, 그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응답 받는 기도의 요건은 무엇일까요?

1. 예배의 회복

본문 30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엘리야가 기도할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여호와의 단을 수축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단을 수축했다”는 말은 “단을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폐허가 된 단을 수리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이세벨은 수많은 선지자를 죽이고, 수많은 여호와의 단을 헐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의 단도 폐허가 된 상태였는데, 그는 기도하기 전에 그 단부터 수리했습니다. 단을 수리하는 모습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사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내 눈에 선교지의 아픔이 환상으로 보이는 것도 축복의 기회이지만 교회에 떨어진 휴지가 잘 보이는 것도 축복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선교에 동참하기 위해 손을 내밀 때 그 손에 담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축복의 손을 내밀어주실 것이고, 우리가 떨어진 휴지를 치우려고 휴지를 손에 잡을 때 그 손에 담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기회도 잡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이 5천만 원을 들여서 집 인테리어를 화려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다니는 교회의 수리할 곳은 외면하고 전방에서 고생하는 선교사들을 외면하면서 자기 집 단장에만 심혈을 기울인다면, 그런 모습을 가지고 기도 응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솔직히 좀 거시기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제단을 수축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마음의 제단이 수축되지 않으면 예배는 형식만 남게 되고, 형식적인 예배는 자칫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명절에 부모님께 배 한 박스를 보내면서 자기 좋은 배를 먹고 부모님에게는 썩어 문드러진 배를 보낸다면 부모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까? 제사라는 형식은 있었지만 그 제사가 ‘썩어 문드러진 배’로 드려진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 하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보고 계신데,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하지 않은 썩어 문드러진 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축복 주시면 오히려 망하는 길로 가기 때문에 차라리 안 주시는 것이 그 자녀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 응답을 원하면 먼저 온전한 예배의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 10분 전에 와서 드리는 것과 10분 후에 와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분이 상당히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배를 드려야지 내가 먼저 한두 입 먹고 남은 배를 드리면 안 됩니다. 사실 예배 시간의 승리자는 결국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예배 시간의 패배자는 결국 인생의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2. 철저한 믿음

엘리야는 제단을 수축한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본문 31-35절 말씀을 보면 열두 돌로 단을 쌓고, 단 주위에 도랑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송아지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그 위에 물을 4통에 넣어 3번씩, 총 12통의 물을 붓게 했습니다. 그러자 물이 단에 가득 찼고 도랑까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불을 떨어지길 원하면 오히려 바짝 말려야 하는데 왜 물을 붓습니까? 그만큼 그는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자를 기뻐하시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엄청난 재산을 가진 것이고, 그런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이 없는 850명보다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의 힘이 더 큰 것을 잘 가르쳐줍니다. 승리는 우리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당시 이방 선지자들은 엄청난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배경으로 삼는 엘리야를 당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믿음을 가진 나’는 강합니다.

기도도 입으로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방 선지자들 850명이 큰소리로 하루 종일 고막이 떨어질 정도로 기도해도 하늘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엘리야는 믿음의 기도로 금방 하늘 문을 열렸습니다. 큰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큰 믿음이 중요합니다.

3. 헌신의 눈물

본문 33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가 수축한 제단 위에는 송아지가 각을 뜨인 채 놓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각을 떴다”는 말의 ‘각’은 한자의 ‘다리 각(脚)’자로 직역하면 “다리를 떴다”는 말인데, 이 말은 번제를 드릴 때 제물의 머리를 자르고, 네 다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서 더러운 것들을 빼내고 제단 위에 올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제단 위의 제물은 우리의 헌신을 상징합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주일 178시간 중에 예배 시간 한 시간을 딱 잘라서 178분의 1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며느리로부터 밥상을 받았는데 밥상 위에 밥과 반찬은 하나도 없고 진짜 밥상만 받았습니다. 그때 며느리를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제물이 없고, 예배를 드리는데 예물이 없으면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싶겠습니까? 예배에는 예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삭은 야곱의 별미를 받고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소중한 별미를 드려야 합니다. 그 소중한 별미와 예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어떤 것’보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축복 받고 나서 입 딱 씻고 자기 주머니만 채우는 ‘버릇과 인간성이 나쁜 성도’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기시고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헌신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과 기복주의의 차이는 헌신의 차이에 있습니다. 특별히 당시처럼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물이 귀한 때에 엘리야가 제물 위에 물을 12통이나 부었다는 것은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과 같은 믿음의 헌신을 상징합니다.

결국 엘리야의 헌신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본문 바로 다음에 있는 45절 말씀에서 하늘 문을 열어 큰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즉 물을 드리자 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고 어떤 분은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하나님께 받고 싶으면 그 받고 싶은 것을 먼저 드리라!”

물질을 원하면 물질을 드려 하나님의 거룩한 선교사역에 동참하고, 명예와 권력을 원하면 지금 가진 작은 명예와 권력을 통해 선교에 힘쓰고, 재능과 건강을 원하면 지금 가진 작은 재능과 건강을 가지고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 헌신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돈과 권력과 재능과 건강으로 엉뚱한 곳에 쓸 텐데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그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헌신이 없으면 믿음도 자랄 수 없지만 축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헌신이 없는데도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단의 미끼입니다. 나중에 보면 그 축복 받았다는 것 때문에 더 불행하게 됩니다. 저는 가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보면 안쓰럽습니다. 만약 그분이 대통령에 떨어졌으면 지금처럼 명예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몇 년 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헌신이 없어도 축복 받는다는 사단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헌신이 있어야 축복도 있습니다. 어려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다고 헌신하지 않으면 가뭄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지만 물 12통을 힘써 제단에 부어드릴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어 수천억 배의 소낙비로 그 헌신에 보답해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헌신이 인정받아 하나님께서 한번 축복의 문을 열면 감당 못할 정도로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요새 “왜 내 신앙과 마음이 이렇게 메말랐나?”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헌신의 눈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마음 밭이 좋아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헌신을 피해 3년 6개월쯤 되면 다 메마른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 말씀을 들어도 과거처럼 감동과 감사가 없이 냉랭하게 되고, 그런 냉랭한 신앙에는 응답도 없고 축복이 없습니다. 이제 다시 헌신의 눈물을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위해 많이 뿌려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산을 움직이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4. 정기적인 기도

제단에 물을 붓고 언제 기도했습니까?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가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갈멜산 대결에서 바알 선지자들은 대결을 시작하자마자 아침부터 기도를 시작해서 응답이 없으니까 바알의 이목을 끌려고 춤까지 추고, 그것이 안 되니까 바알 신의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고 자해를 하고, 오후에는 진언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런 바알 선지자들의 모습만 보고 기도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정오가 지나고, 오후 3시가 지나도 기도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해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온도도 높고 더 불이 붙을 확률도 더 큽니다. 그래도 엘리야는 하루 종일 가만히 있다가 저녁 소제 드릴 때에야 비로소 기도하러 나섰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때 나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에 소제를 두 번 드립니다(레 6:14). 하나는 ‘아침 소제’이고 또 하나는 ‘저녁 소제’입니다. 이 소제 시간은 오늘날로 말하면 아침과 저녁의 정기기도 시간을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아무 때나 기도할 수 있었지만 저녁 소제 시간, 즉 저녁 정기기도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기도한 것은 꾸준한 정기기도의 중요성을 교훈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 때나 기도해도 좋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이고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기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이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이다!”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지키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으로 우리의 미래와 자녀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5. 하나님께 영광 돌림

본문 36-37절 말씀에 있는 엘리야의 기도 내용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모든 백성이 알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철저히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였고, 기도 응답을 원하는 것도 하나님이 높아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의 기도에는 이기적인 목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달라!”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항상 축복 받으면 그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선교에 동참하고, 선한 일에 쓰겠다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 목적이 없고 오직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한국 교회의 기도 공식이 있습니다. 입시철이 되면 기도하는 사람이 늘다가 입시가 끝나면 기도하는 사람이 또 줄어듭니다. 그런 기도에는 하나님이 관심이 없으십니다.

저도 입시생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해보았지만 부작용이 너무 많이 일어나 이제는 “평소에 꾸준히 기도하자!”고 합니다. 특별기도를 해서 원하는 점수가 나오면 좋은데, 사람은 항상 실력 이상을 기대하기 때문에 자기 실력만큼만 나와도 마치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망했다고 하면서 특별기도 후에 시험 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그렇게 시험들 줄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안 주신 것입니다. 깜빡하면 시험 드는 사람에게 축복을 주시면 얼마나 축복의 남용입니까? 그처럼 하나님은 자기 이기적 목적만 생각하는 사람의 기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어느 날, 한 기도원에서 밤 한 시쯤에 어떤 여자가 산 기도를 하는데 정상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가만 두면 그 여자가 돌 것 같아서 원목 목사님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보니까 절벽 가까운 곳에서 한 여자가 가끔 늑대처럼 큰 비명을 지르며 기도하는데, 무슨 기도를 하나 자세히 들어보니까 이런 소리였습니다. “주님! 그년은 주고, 이년은 안줘요!”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서 주먹질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주세요! 주세요! 그년! 노! 이년! 예스!”

귀신 들린 것 같아서 목사님이 그분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그년이 누구야?” 그러자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곳에서 푹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20분쯤 지나니까 그 여자가 눈을 뜨고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년’에 대해서 물어봤습니다.

사연을 들으니까 자기 교회에 믿은 지 2년도 안 된 어떤 여자가 산에 가서 무슨 예언의 능력을 받아 교회에서 ‘인기 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십여 년 교회를 다니고 열심히 충성했어도 그런 능력을 받지 못한 것이 너무 화가 나고 질투가 나서 “나도 능력 받겠다.”고 생각하고 기도원에 왔다가 그런 쇼를 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나타내고 자기를 높이려는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금식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금식기도를 합니까? 세상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깨끗한 마음으로 서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굶은 기록을 세우려고 금식하고, 자랑하려고 금식하고, 남이 하니까 나도 질 수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40일 금식기도 3번!”이라는 글귀가 있는 명함을 돌리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내일부터 3일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그 전날 11시 59분까지 마구 먹습니다. 칼로리로 따지면 며칠분의 음식을 다 먹은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도 귀엽게 봐주시겠지만 그런 모습이 지나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목적을 가진 깨끗한 기도에만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6. 응답 이후의 결단

결국 본문 38절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놀라운 응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응답 이후에 엘리야가 어떻게 합니까?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죄의 본성을 철저히 죽이는 것’을 상징합니다.

가끔 보면 다급한 문제가 해결되고 한숨 돌리면 어느새 죄에 다시 손을 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축복 받는 것보다 축복을 간직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기적보다 기적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응답 이후에 오히려 단단히 결심해서 나를 죄로 이끄는 그림, 글, 오락, 각종 우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요새 예언해준다고 하면서 속칭 ‘예수 점’이 유행합니다. 그런 엄청난 저주 받는 길에는 결코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신명기 18장 10-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자, 점치는 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를 가증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호기심으로라도 점치는 귀신에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은 한 마디도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 귀신에 현혹되면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침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응답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 이후가 중요하고, 체험 이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으면 사단은 너무 배가 아파서 파상 공세를 펼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라옵니다. 그때 깨어 경성하고, 더욱 사명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그러면 계속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곁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엘리야의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될 수 있고, 갈멜산의 하나님은 분당 샛별교회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6가지 기도 응답의 요건을 기억하며 항상 기도생활에 힘써서 위대한 기도 응답자의 길을 가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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