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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간판 떼고 삽시다 (빌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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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우리나라만큼 간판을 따지는 사회도 드뭅니다. 실력보다는 학벌을 따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교육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점수 따는 요령을 배웁니다.

서울대학교가 세계 대학 가운데 학력 순위가 163 번째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법을 배우기보다 점수 따기를 배워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이 간판을 따지는 풍토가 사라져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간판을 다 떼어내고 있습니다. 가문의 영광을 내려놓았습니다. 학벌을 내려놓았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던 종교적 공력도 포기합니다. 적극적이고 열정이 가득한 성품에 대한 자부심도 내려놓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자랑거리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7 절부터 9 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7-9>

바울은 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귀한 가치들을 버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유익한 것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 밑에 둘 수 있는 권세들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루아침에 스스로 그런 것들을 버렸습니다. 이제는 도리어 해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 분을 알면 진정한 나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까지 머리에 담아 두었던 세상 것들을 버렸습니다. 세상 철학과 사상을 버렸습니다. 삶의 지표로 삼았던 윤리관을 버렸습니다.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농부가 밭에서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소작농이기 때문에 그 보물로 부자행세를 하면 밭 주인이 시비를 걸것이 뻔합니다. 농부는 자기 집과 가산을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보물을 본 농부만 알았습니다.

바람부는 날 길에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어느 것을 주울까요? 둘 다 집는다가 정답입니다. 그러나 둘 다 못 주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한 보물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이런 인생에 대한 질문은 철학의 명제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철학으로는 이 해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철학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수천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질문에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답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구나.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구나. 하나님에게서 났구나.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하나님이 들이시는 천국 백성이 되어 저 천국에 가는구나.

여러분도 이 놀라운 진리를 믿으십니까?

그 깨달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찾아옵니다. 믿는 순간 바울처럼 우리도 인생의 방황은 끝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면 세상 자랑거리는 하찮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가장 추하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세상 자랑거리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런 것들은 다 별거 아닌데······. 사람들이 날 알아주면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를 알아주길 열망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갑자기 자기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을까요?

바울을 흥분시킨 무슨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변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빌립보서는 이 에바브로디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시급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의 위기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바울의 적대자들이 침투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 내부에서 진리에 대한 시비와 유혹을 걸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극단적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으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정면 도전입니다.

이들은 빌립보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급하게 이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3 장을 씁니다.

오늘 본문 첫 문장입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 3:1>

1 절 말씀은 ‘종말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종말로’라는 말은 말할 때 ‘마지막으로’, ‘끝으로’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의 딱 중간 지점인데 ‘종말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건 그렇고 이제”라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주제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해치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생각만 해도 약이 오르고 가슴이 벌렁거릴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기쁨을 거듭 강조하는 까닭은 바울이 터득한 비법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주신 기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유대인들을 경계하도록 편지를 쓸 기회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급한 문제이지만 기쁨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권면합니다. 먼저 교회를 어지럽히는 유대인들을 고발합니다.

본문 2 절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1 절에서 기뻐하라고 외쳤던 바울의 말이 갑자기 아주 거칠어졌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반박을 합니다.

개들이란 본래 유대인들이 잘 쓰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들은 거룩한 백성인데 이에 비하면 이방인은 불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욕설을 유대인들에게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실상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지키며 사는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외식하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내막은 행악으로 가득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가면을 벗기고 거침없이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또 손할례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손할례당이란 유대인들의 할례는 단순히 손으로 살점을 떼어내는 것이라고 비하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서 거룩한 백성의 의식을 치룹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몸에 표시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할례는 단순히 살점을 떼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개들이고, 행악자고, 할례도 살점을 떼어낸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교인들은 그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빌립보교인들은 그런 유대인들과는 정반대입니다. 바울은 3 절에서 유대인들의 이런 위선적이고 모순된 모습과 반하여 빌립보교인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3>

여기서 바울은 교회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으로 봉사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예배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셋째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또는 자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은 유대인의 할례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육체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빌립보교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육체를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즉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구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표징인 할례를 참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니, 바울도 이에 대항합니다. 육신을 신뢰하기로 말한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밀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5 절부터 6 절까지는 그들이 자랑하는 육신의 요소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바울이 웬만한 유대인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5-6>

바울이 지금은 버려둔 명함을 보여줍니다.

바울도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작은 지파였지만 높이 평가되는 지파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뉩니다. 12 지파 가운데 10 지파는 북이스라엘이 됩니다. 남 유다는 오직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2 지파로만 구성됩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 삽니다. 그래서 다윗 왕조의 계보를 잇지 못합니다. 유다지파는 다윗의 신앙을 물려받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베냐민지파는 유대 사회의 핵심 지파가 됩니다. 베냐민지파는 항상 군대의 요직을 맡았습니다. 베냐민지파는 외래문화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같은 유대인이라도 베냐민지파 출신은 엘리트 계층으로 분
류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베냐민 지파에 순수 히브리인의 혈통을 지킨 집안의 출신입니다. 바울은 이런 특혜를 입고 태어났습니다.

또 그는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거기다 고향은 다소였지만 예루살렘에 유학을 갔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과 히브리적 생활방식을 익혔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 열정 때문에 바울이 처음에는 교회를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비록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것도 유대인 사회에서는 자랑거리가 됩니다.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두 가지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모가 다 히브리인이고, 모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헬라 문화에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 유대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KS 마크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나온 출신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5,6 공 때는 대구 경북 TK 출신들이 출세를 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요즘 이런 명함으로 뻐기면 눈총을 받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으로 최고의 성공의 길을 거쳤습니다. 철학, 수사학, 히브리어, 율법 어느 하나 뒤질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바울은 로마 시민권까지 있었습니다. 이 로마 시민권은 복음 전파에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기득권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습니다. 뒤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출신 배경과 세상 지식들은 버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혈통과 족보와 출신을 버린다고 바꿔지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해서 머릿속에 두었는데 버렸다고 말하는 것으로 잊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안 뒤에 그런 것들을 내세우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혹시 어떤 자리에서 툭 튀어 나올까봐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자랑은 다 배설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너무 고상한 지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얻으면 그 안에서 자기가 발견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깁니다. 믿음으로 이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의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간판을 가지고 계십니까?

돈이 좀 많이 있습니까? 돈 자랑보다 추한 것이 없습니다. 남보다 힘이 셉니까? 힘자랑하면 미련해 보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유학도 다녀오고 박사학위도 있습니까? 그런 것 자랑하면 머리에 먹물 들었다고 흉봅니다. 아는 체, 잘난 체 뽐내면 인기 떨어집니다. 뒤에서 사람들이 입을 삐쭉댑니다. 그리고 사람이 추해집니다.

여러분! 세상 자랑거리 간판들 떼어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래봬도 왕년에…….” 이런 말 하지 말고 삽시다.

헌 간판 내리고 새 간판 다시기 바랍니다. 내게는 주 예수 보다 귀한 분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 분만이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세상에서 우쭐대고 싶은 마음 이 시간 다 걷어 버리십시다. 누구나 예수님을 알면 고상해집니다. 예수 간판 새로 올리고 고상한 삶, 축복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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