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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감사해야 할 때입니다. (요 1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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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나면 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하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죄악과 흑암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도가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신앙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능력과 권능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땅은 주지만 살아갈 수 있는 힘까지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힘을 권력에서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에서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더 사모하셔야 합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십시오. 더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이 살려면 시간마다 때마다 신령한 호흡을 해야 합니다. 육신의 사람이 호흡을 하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의 호흡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의 심령 위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능력과 권능 있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래 전에 영국에 살던 어떤 여자 성도에 의해 쓰여졌던 편지 한 부분을 읽고자 합니다.
'우리는 출발부터 도착까지 상상외의 노도광풍과 침몰의 위기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처음 항해의 출발이 결격사유로 인해서 지연된 탓에 항해 중 비축했던 양식의 거의 전부를 소모했습니다. 우리가 항해를 시작했을 때는 여름이 아닌 9월이었으며 따라서 초가을의 성난 파도와 싸워야만 했습니다. 모두 102명이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살인적인 괴혈병에 시달려야 했고, 또 여러 사람들이 이미 벌써 죽어 바다에 장사를 지내야만 하는 그런 사고가 뒤따랐습니다'

이 편지는 아메리카 신대륙의 꿈을 안고 '메이 플라워' 배에 탑승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엘리자베스 합킨스라는 한 자매가 영국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입니다.
이들은 항해 출범 2달 후 이들이 가지고 있던 식량의 거의 전부를 다 소모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더 항해를 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던 한 지도자는 하루 분의 비상식량이라도 비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금식의 날을 선포하자고 제의합니다. 하루라도 금식하면 하루 분의 비상식량을 우리가 위급할 때 준비할 수 있지 않겠느냐? 는 겁니다.

이때 다른 한 지도자가 "금식은 동의하지만 금식의 날이라는 표현은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감사의 날로 선포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제의를 합니다. 감사의 날이라니요?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대륙에 거의 가까이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대부분은 아직도 건강하고 생존하고 있다는 것,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신대륙에 대한 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은 이 지도자의 제안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하루 동안의 금식에 들어갔습니다. 정확하게 닷새 후 1620년 12월 21일 그들은 미국 프리머스 항구에 도착합니다. 미국 땅에 왔던 청교도들은 지식인들로 도시 출신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노동이나 농사를 몰랐습니다. 추운 겨울에 도착했기 때문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배고픔과 전염병과 싸우면서 도착한 사람들의 약 절반 가량이 그 해 겨울에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봄에 뜻밖에 한 사람의 인디언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지도를 따라 열심히 농사를 지었던 이 청교도들은 그 해 가을 의외의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들은 인디언 추장 매스소이트라는 사람과 90명의 인디언 식구들을 전부다 초청해서 함께 어울려 한바탕의 떠들썩한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감사의 잔치를 가졌습니다. 이것이 지구상에서 첫 번째 감사의 예배요, 감사의 잔치였습니다.

1863년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런 청교도 정신, 특별히 이런 감사의 정신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매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소위 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로 지킬 것을 국가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청교도인들의 추수감사절은 최악의 상황에서 드린 최선의 감사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런 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순간에도 감사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도 그들은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도광풍으로 하늘을 가리웠던 위급한 순간에도 그들은 마음의 하늘을 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불평과 원망이 우리의 인생에 도움을 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불평이 없어야 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불행한 사람은 물질이나 권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의 습관을 체질화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특정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마음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음의 습관의 피해자들이기도 하고, 마음의 습관의 축복자들이기도 합니다. 복을 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사랑하십시오. 자기 마음을 자꾸 학대하지 말고 마음을 늘 아름답게 지키고 사랑하고 가꾸어 나가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 내 마음에 감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곳에서 감사의 단을 쌓아야 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 행복하고 감사할 때 행복합니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합니다. 무엇을 소유하거나 세상적으로 성공했을 때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감사할 때에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5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어떻게 항상 기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항상 기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기쁘게 살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다시 말해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항상 기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감사하면 행복해 집니다. 자기도 행복해지고 그 감사를 받는 사람도 행복해 집니다. 그래서 세상이 행복해 집니다. 우리가 행복해 하지 못하고 사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이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은혜를 감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숙한 사람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작은 은혜도 큰 것으로 감사할 줄 압니다. 그러나 미숙한 사람은 큰 은혜도 놓치고 작은 불행을 큰 것으로 여겨서 늘 큰 불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하게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은혜에 늘 감격하며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면서 불평과 불만과 원망을 하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서 아주 작은 은혜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너무 값비싼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너무 큰 것에 대한 중독증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진리는 생명의 제일 아름다움은 작은 것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작은 은혜도 큰 것으로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중에 가장 가슴이 무겁고 답답했던 한 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이렇게 오빠와 두 자매가 살고 있었던 이 가정은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 가장 즐겨 찾았던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식구들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집에 방문할 때마다 예수님은 마음에 쉼과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가장격이었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33절에 보면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의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또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38절에서도 예수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 들어가기 직전에 35절에 보면 이 초상집에 찾아 오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집에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41절에 보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며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보십시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사하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감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 지경에서, 이런 상황에서, 이런 형편 속에서 감사가 가능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최악의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최악의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기도의 교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버지여!" 가장 절망적이고 가슴이 미어지는 지금, 답답하고 가슴이 아팠던 이 순간에 예수님에게는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여정에서 절망의 극한 상황에 도달했을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행복을 아십니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물을 붙들어 섭리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해서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행복을 여러분은 아시나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아주 직설적이고,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꾸며진 수식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답답한 가슴, 미어지는 가슴,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감사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이 다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즘 보면 세월이 어려워지면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살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그 분들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모든 것을 잃어 버려도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 그는 결코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저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으십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여러분은 이 행복을 아십니까?

그러나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이 없는 사람,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저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대의 자본이 있다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기도는 역경을 수용하게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도는 역경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한 우리 인생은 다시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 가정의 가장,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어 버렸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기도가 감사로 시작될 수 있었던 비밀은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었던 두 번째 비결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얻는 최대의 유익은 하나님의 도움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인가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공통된 하나의 특성이 있습니다. 기도를 배운 사람, 기도를 체험한 사람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작은 응답이라고 할지라도 기도의 작은 응답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큰 일도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도와주신다. 지나간 날 나를 도우셨던 하나님, 오늘이 어둡고, 오늘이 답답하고, 오늘이 괴로워도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신다. 미래에도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나는 이것을 확신한다. 우리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실성입니다.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지나간 날 하나님은 내 기도를 항상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42절을 보십시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압니다." 지나간 날 나의 도움이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도움이 되십니다. 내일도 나의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내일 그리고 한결같은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성실성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게 만든 비결이었습니다.

바울이 한때 이런 절망의 극한 상황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힘에 지나도록 고생을 한 나머지 살 소망이 끊어졌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이런 절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살 소망이 다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절인 고린도후서 1장 10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가 이같이 우리 주님이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 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과거에 내가 사망에 직면했을 때에 그 안타까운 삶의 한계 상황 속에서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지금도 건져 주실 것이요, 또한 이 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한결같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의지하고 바울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벌떡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최악의 상황을 지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내 가정을, 내 교회를, 내 나라를 도와주실 것일 확실히 믿으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처럼 감사함으로 내일의 영광을 바라볼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기적을 낳는 감사의 조건 두 가지를 꼭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적을 낳는 감사의 첫 번째 조건은 믿음입니다.
묻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어둠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영광을 향해 일어서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내일을 준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나를 향한, 내 가정을 향한, 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신뢰하십시오. 신뢰하라는 말은 믿으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40절에 보면 슬퍼하고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었던 마르다에게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0절을 다같이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여기에 보면 중요한 두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믿으면 보리라."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보여주십시오. 내 앞 길이 잘 될 것 같은 것을 좀 보여주십시오. 보여 주면 믿겠습니다. 잘 되는 징조를 한 번 일으켜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믿으면 보리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미래의 영광, 내일의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어둡습니다. 캄캄한 오늘이라는 삶의 현장, 그러나 저 건너편에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 그러나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영광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믿으면 그 영광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도 절망을 거부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기의 출발점입니다. 기적을 낳는 위대한 출발점이 될 수가 있습니다.

기적을 낳는 감사의 두 번째 조건은 순종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함께 순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꿈꾸는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을 현실로 체험하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의 사건들을 연구해 보면 흥미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다 행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한 부분을 딱 남겨 놓으십니다. 그리고 "이건 네가 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에도 그런 사건이 나타납니다. 보십시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말씀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유대인들의 무덤은 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굴 앞에는 큰 돌이 막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기왕 기적을 행할 바에는, 기적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실 수도 있습니다. "돌아 굴러라. 나사로야 나와라." 그래서 돌이 싹 굴러가면서 나사로가 걸어 나오면 얼마나 드라마틱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돌을 옮겨 놓을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너희들이 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이 옮겨 놓아라. 그리고 할 수 없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 부분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을 감당할 때 그 다음에 기적은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때때로 그 순종의 부분이 고통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희생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당할 때 나머지를 책임져 주시고 부활을 주시고 기적을 주시고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제가 처음에 소개했던 그 여성의 청교도 편지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제가 또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제라도 배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은 그 대신 기도회를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하루 온 종일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기도 후에 블랙 포드 목사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뒤로 물러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앞으로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항해를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목사님의 말씀과 그리고 여러분들의 합의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흉흉했습니다. 칠흙같은 어둠, 빙하의 강추위, 풍기는 악취, 굶주림은 여전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모든 사람이 포기할 무렵 11월9일 이른 아침 항해 65일이 되는 날,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육지다. 육지다. 육지.'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신대륙에 도착한 것입니다. 선원들, 그리고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함께 어울려 자녀들과 함께 갑판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감사와 감격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브리우스트 목사님은 시편100편을 읽고 주 앞에 기도하고 찬양을 함께 제안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우리는 이제 곧 신세계에 도착할 것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한 가지, 우리의 미래가 있는 곳에 우리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짧은 시간에 미국이 위대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순종을 결단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이 위대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국제 유가는 50달러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사회 곳곳에서는 사상적인 대립으로 파열음을 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에는 접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우리 민족의 마지막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시련의 기회를 주 앞에서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삶의 길을 다시 성찰하는 진지한 회개의 기회로 삼을 수가 있다면 내일의 소망은 우리들의 것이리라고 믿습니다. 우 리가 모든 죄악을 멀리하고, 그래서 우리의 물질주의, 우리의 쾌락주의, 우리의 과소비, 우리의 부도덕, 우리의 음행, 우리의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다시금 번영의 기회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어둠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 왜 우리 교회를 세워 주셨을까요? 지나온 시간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실 우리 교회를 통한 위대한 내일의 꿈을 저는 여러분이 저와 함께 같이 꿈을 꾸어보시기를 바랍니다. 환상을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이 꿈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결심할 때,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할 때 그것이 오늘은 희생이어도, 오늘은 내 자신을 주 앞에 드리는, 그래서 나를 자르고 나를 헌신하여 바치는 희생의 결단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희생, 우리의 순종이 있는 곳에 위대한 미래는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비전은 펼쳐져 갈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 감사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에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청교도들처럼 풍성한 감사의 예배를 주 앞에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숙한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늘 원망과 불평만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은혜를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압니다. 감사할 줄 압니다. 감사가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시편 기자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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