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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들 시리즈 설교 ⑩>실패한 제자 가룟 유다 (행 1: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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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실패한 인생, 실패한 제자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인생의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성공한 인생과 실패한 인생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한 인생이 되기 원하지 실패한 인생 되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하기를 원하는데도 실패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어떤 목표점에 도달했느냐 못 했느냐로 결정합니다. 즉, 법대에 간 학생이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나 검사가 되면 성공했다고 하고 법대를 졸업했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다른 직업을 선택하면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사업가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성공이요 별 볼일 없는 사업가로 머물면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기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what’이고 또 하나는 ‘how’라는 것입니다. ‘what’이란 무엇이 되느냐 하는 문제이고 ‘how’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전자, 즉 ‘무엇이 되느냐’에만 관심이 있고 ‘어떻게 사느냐’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은 목사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기준에 의하면 신학교 나와서 목사가 되고 또 기왕 목사가 되었다면 안정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면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성공의 기준으로만 따진다면 저는 지금 효자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으니 성공한 것입니다. 위임도 받았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되 어떤 목사가 되느냐? 담임목사가 되되 어떤 담임목사가 되느냐, 이 ‘어떻게’의 문제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의사만 되면, 판사만 되면, 부자만 되면 성공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사가 되고, 어떤 판사가 되고, 어떤 부자가 되느냐가 진정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셨습니까? 자신이 바라던 직업을 갖고 원하던 자리를 얻으셨습니까? 가기 원하던 학교에 입학했습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진정 성공한 삶을 누리기 원한다면 ‘어떻게’의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동안 함께 살펴본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마지막 사람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유다가 오늘 설교 제목처럼 실패한 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엇에 실패한 것일까요?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는 성공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인생의 목표에는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 중에도 두뇌가 명석하고 계산이 빠른 것이 인정되어 돈주머니를 맡은 회계까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제자, 실패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라는 눈에 보이는 목표에 도달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어도 어떤 제자가 되느냐가 중요함을 가르쳐 줍니다. 아무리 주님의 제자가 된다 해도 성공한 제자와 실패한 제자는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가 실패한 제자였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주님 자신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과 마가복음 14장 21절에 주님은 자신을 팔아넘길 그 제자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인생이 철저하게 실패한 인생이고, 그 삶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임을 공표하신 것입니다. 정말 비참한 말 아닙니까?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너 자신에게 더 좋았을텐데..” 이 비참한 말은 철저하게 실패한 인생을 산 제자 유다의 모습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면서 우리는 결코 실패한 신앙인, 실패한 제자가 되지 말아야 함을 말씀해 줍니다.




똑똑한 실패자

이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지난주 살펴본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구분하기 위해 ‘가룟 유다’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온 제자들의 목록을 보면 이 ‘가룟 유다’라는 이름에 꼭 ‘예수를 판 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닙니다(마 10:4). 이 부끄러운 수식어는 가룟 유다가 죽은 후에도, 아니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한은 계속해서 그를 따라 다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어떤 수식어가 따라 다닐 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은 물론이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를 영원히 따라 다닐 수식어는 무엇일까요? 부자 아무개, 무슨 벼슬을 지낸 아무개, 출세한 아무개, 이런 수식어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남을 영원한 수식어는 ‘주님의 사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룟 유다’라는 말은 희랍어로 ‘유다스 이스카리오트’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가룟 사람 유다’라는 뜻입니다. 이 가룟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학설이 여러 가지인데 어떤 이들은 ‘케리오트’라는 지명을 뜻하므로 그곳 출신이라는 말로 해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지난주 소개했던 열심당원 중 품에 칼을 품고 다닌 테러리스트 전문 암살단인 시카리우스를 뜻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는 이 가룟 유다가 어떻게 부름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안 나와 있습니다. 다만 추측하기를 본디 시몬처럼 열심당원이었던 유다가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가룟 유다에 대한 성경의 묘사 중 가장 많이 나오는 부분이 바로 그가 제자들 중에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공동체 중에서 돈 관리를 맡은, 즉 요즈음으로 치면 회계를 맡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각종 단체에서 회계 맡은 분이 있겠습니다만 회계는 아무나 합니까? 돈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도 모르고, 내 돈이 니 돈이고 니 돈이 내 돈이고, 주머니 돈이 쌈짓돈이고 이런 사람은 절대 회계 시키면 안 됩니다. 계산이 정확하고 빠른 사람, 똑똑한 사람을 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룟 유다는 제자들 중에도 비교적 똑똑한 사람, 계산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살펴봤지만 예수님의 제자 중에 계산 제일 빠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마 오병이어 사건 때 순식간에 머릿속에 오백 데나리온이라는 계산이 나온 빌립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제자 중에는 세리 출신인 마태(레위)도 있었습니다. 돈 계산에 세리보다 빠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마 가룟 유다는 이 빌립이나 마태보다 더 계산이 빠르고 정확했나 봅니다. 하지만 빌립에게 계산적인 능력과 차가운 이성은 있었는지 모르나 믿음이 없었던 것처럼 이 가룟 유다에게도 계산적인 능력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사랑과 은혜는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을 때 가룟 유다는 “왜 이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 차라리 저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은 나올 텐데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돕지 말이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향유의 종류와 양만 척 봐도 ‘삼백 데나리온 어치’하고 계산이 나오는 가룟 유다의 놀라운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정말 가난한 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가 맡은 돈 궤에서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라고 증거합니다. 타고난 계산능력은 있고 입으로는 말로는 그럴듯하게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듯 말하는지는 몰라도 그는 이미 욕심과 죄악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온전히 드리는 마리아의 신앙을 평가절하하고 그것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에게 이성은 있는지 모르지만 사랑은 없었고, 그에게 계산능력은 있는지 모르지만 믿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믿음도 없고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다닐 수 있었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가룟 유다가 열심당원이었고 테러리스트였는데 예수님의 유대인의 왕으로 로마를 쳐부수고 독립을 쟁취할 분이라 여기고 추종하여 따라 다니다가 결국 나중에 실망해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의 타고난 계산 능력은 오히려 그를 타락시키고 죄를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성과 계산에 의지해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예수님을 계속 따름으로서 과연 이익이 있을까, 손해를 볼까 재빠르게 계산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산이 다 끝난 후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의미하고 손해 보는 일이니 은돈 삼십 냥을 받고 팔아넘긴 것입니다. 결국 똑똑한 그의 두뇌와 계산능력이 그를 실패하고 파멸한 인생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타고난 두뇌와 능력, 좋은 환경으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데 오히려 그 능력 때문에 망하고 실패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두뇌를 주고 능력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주신 이유는 너 자신만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 쓰라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능력만 과신하여 교만한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직분이나 지위도 마차가지입니다. 사회에서 존경받고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때, 또는 남들이 우러러보는 지위에 올랐을 때 그 지위는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라는 자리인데 자신의 성공에 도취해서 결국 파멸의 길로 가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공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자리에 오르느냐가 아니라 정작 그 직업과 자리에 올라 어떻게 사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 성도들에게 바로 이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가룟 유다가 실패한 인생을 살고 비참하게 죽었으니 그 비어있는 사도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그런데 이 ‘직무’라는 말이 희랍어로 ‘디아코니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디아코니아’는 우리말로 ‘섬김’과 ‘봉사’를 뜻합니다. 참 중요한 말입니다. 주님이 제자 삼고 사도로 임명하신 것은 제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라고 세우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자신의 판단력과 계산에 의지해 결국 그 직분을 저버리고, 그 사명을 잃어버리고 파멸의 길, 실패한 인생으로 달려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기대에 맞지 않는다며 팔아넘긴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먼저 앞세우고 자기 판단에 의해 얼마든지 배신하고 팔아넘길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유다야 말로 똑똑한 실패자요 ‘헛똑똑이’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헛똑똑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어에도 직업을 voc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원학적으로 보면 이 말은 ‘부르다’는 뜻을 가진 ‘vocare’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직업이란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직업은 내가 선택하고 내 맘대로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직업은 ‘부를 소’(召) 자를 써서 소명(召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막힌 말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직업과 지위는 다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은 것이며 그 직업과 지위를 통해 반드시 내 이익,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갖고 높은 위치에 올라도 실패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바로 이 점에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비록 제자는 되었지만, 또 머리를 인정받아 회계는 맡았지만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이해하지 못해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직업인이 되고, 어떤 소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볼 대목입니다.




비참한 최후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와 요한만 제외하고 모두 순교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예수를 위해 예수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요한도 비록 순교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복음을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하여 순교 못지않은 귀한 역할을 했습니다. 요한을 비롯해 다른 제자들 모두가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부족하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바뀌고 삶의 목표와 가는 길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가룟 유다만은 끝까지 변화되지 않다가 더럽고 부끄러운 죽음을 맞고, 그 불의한 삯으로 더러운 유산을 남겼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서 받은 은돈 삼십은 유다가 자살하기 직전 다시 제사장들에게 돌려주었는데 그가 비참하게 죽은 뒤 사람들은 이 불의한 돈을 다시 성전 창고에 들여놓을 수 없다 하여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 18~19절에 보면 그 밭의 이름을 ‘아겔다마’ 즉 아람어로 ‘피밭’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예수님을 위해 죽는 영광스러운 제자들이 되었는데 유다만은 욕심을 따라 부끄럽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고 결국 더러운 유산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도 중요합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느냐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직업을 갖고, 그 위치에 올라 어떻게 사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죽어 어떤 유산을 남기느냐도 중요합니다. 내 삶이 끝난 후에도 영원히 남을 나에 대한 평가, 하나님의 평가, 사람들의 평가, 후손들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내 이름에 영원히 붙을 수식어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내 자리를 빼앗기지 말라!

오늘이 제자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오늘의 결론이 되는 말은 우리도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공한 제자가 있는가 하면 실패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께 늘 쓰임 받은 A급제자가 있었는가 하면 B급과 C급도 있었습니다. 기왕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반드시 성공한 제자가 되어야 하며, 더욱 귀히 쓰임 받는 A급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부터 보면 베드로는 시편 69편 25절을 인용하면서 가룟 유다가 실패한 그 사도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과 맛디아라는 두 사람을 추천해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25절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이는 가룟 유다가 제자요 사도라는 귀중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저버리고 파멸과 실패의 실로 갔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것은 다 양보하고 다 내어주더라도 절대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귀하고 영광스러운 제자의 자리, 그 귀한 사명을 그 누구도 대신하지 말게 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귀한 영광을 욕심이나 잘못된 판단으로 다 빼앗기고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은 다 내어주더라도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는 영광스러운 사명과 그 대가로 받을 찬란한 면류관은 절대 내주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사람 되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인정받아도 주님 앞에서 실패하고 버림 받은 인생 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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