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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 3:11-18, 계 1:1-3, 눅 1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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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피터 로드라는 사람이 어느 날 아침 운전하며 길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교회 안에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가족에 있으니 그 가족에게 500$를 주어라 그리고 그 일을 하되 익명으로 하고 시기는 성탄절에 하여라”.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지만 피터 로드에게 500$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옛날 기드온처럼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제가 이 일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십시오”.

그러나 그로부터 3시간 동안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전혀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무시하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너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 답답한 3시간이 지나갈 무렵 드디어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들아, 왜 나의 말을 네게 확신시켜 달라고 하느냐? 너는 처음부터 그것이 내 음성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느냐?” 이 말씀을 듣고 그는 회개했으며 말씀대로 재정을 집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다시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묵상자료 「생명의 삶」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오늘 사무엘 서 본문에 보니까 사무엘이 마침내 “주여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사십니까?

오늘 대체로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그 말씀을 전달하십니다. 인간의 말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천주교와 달리 교회의 권위를 성경에 두고 있습니다. 예배에서도 설교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교회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매개하는 거의 독점적인 채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설교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설교자와의 인간관계에 따라 그 사람과 함께 설교까지 거부하게 됩니다. 아니면 설교의 내용이나 설교자의 테크닉에 의해서도 설교듣기를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인간의 말에 담아 전달한다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아우구스티누스가 회개할 때 위대한 설교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옆집에서 놀고 있던 어린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 “들고 읽어 보라”는 단순한 소리를 듣고 들어가서 성경을 읽었고 거기서 그는 말씀에 의하여 녹아졌습니다. 그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말씀에 대한 어떤 거부감이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엄청난 불행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사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시기 바랍니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나이 어린 사무엘, 전혀 대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사무엘을 택하여 말씀을 주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그 일을 감당해야할 엘리와 그 자녀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말씀 전하셔야 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찾은 사람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전하실 일이 매우 급하고 중했던 모양입니다. 그랬으니 아직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면서 까지 말씀을 전하시게 되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비록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포기해도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엘리와 그 아들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버렸어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 사무엘을 준비하셨고 그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궐이 나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1:에 보면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보선했습니다. 시편에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교회를 위하여 이런 저런 직분과 역할을 맡겨 주신 것을 감사하며 감격하며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교회가 힘을 얻고, 그리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복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일을 포기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대신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것이 사무엘처럼 아직 제대로 준비 되지 못했어도 대신할 사람을 반드시 세우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직분을 버리고도, 사명을 포기하고도 형통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 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도록 버리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3. 욥기에 보면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 하신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듣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또 사안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여기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쩐지 같은 말씀이 자주 들리거든 반드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엘리는 하나님께서 자주 말씀을 하셨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사무엘을 들어서 또 다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무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그 말씀이 다름 아니라 엘리가의 멸망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무엘로서는 이 엄청나고 두려운 말씀을 그대로 엘리에게 전한다고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선생님 면전에서 망한다는 말을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최근에 「대한 기독교 서회」에서 지금 우리나라 교게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16분의 설교를 비판하는 심포지움을 열었고 그 내용을 책으로 엮어냈습니다. 그 책 머리말에 출판국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 서고, 듣는 이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기 앞에서는 일입니다. 설교자는 그래서 두려움을 가집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하는데 오늘 대부분의 설교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 앞에도 제대로 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문제의 원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4. 아침에 엘리가 사무엘에게 간밤에 하나님께 무슨 말씀을 받았는지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사무엘이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받은 말씀이 하늘같은 선생님이신 엘리와 그 가족이 멸망한다고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그런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하시기는 했지만 어떻게 엘리 면전에서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일에 사무엘의 고민이 전혀 없었다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선뜻 말 할 수 없어서 주저했기 때문에 엘리는 “만일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18절에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결코 입맛 따라 사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 맞고, 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말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것이 바로 옛날 사사시대 같은 혼란을 야기하게 됩니다. 설교자들은 이런 교인들의 입맛을 맞추어 주려고 하다보니 온갖 비성경적인 이야기들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교회는 본질에서 떠나게 되고 사명을 망각한 채 탈 역사적이고 기복적인 종교로 전락했다는 비판입니다.

기독교는 입맛 따라 사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분에 맞는 설교에만 귀 기울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설교를 선호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정치적인 성향이나 삶의 스타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 다소 진보적인 설교가 있어서 그것이 내 보수적인 성향과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하는 것이라면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편향된 보수주의는 말씀에 의하여 교정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 다소 보수적인 설교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선포라면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진 지나친 진보주의도 역시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시정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나 말씀을 듣는 이들이 다 함께 사무엘의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설교자가 겸허하게 엎드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할 때 그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듣는 이들이 자기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주여,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귀를 기울인다면 그는 사람의 어떤 설교 테크닉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생명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향하여 지금도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대림절 신앙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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