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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리필되는 향기 (빌 4: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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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소사구 역곡에 가면 승리제단이란 곳이 있습니다. 승리제단은 지난 6 월에 죽은 영생교 교주 조희성씨가 세웠습니다. 조희성은 사람이 죽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죽지 않고 영생할 것이라고 장담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가 신도들을 현혹하며 떠벌인 말들은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승리제단은 아직도 있습니다. 조희성씨의 부인이 교주가 되어 여전히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추적 60 분이란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최근의 모습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부인이 설교하는 장면이 잠간 나왔습니다. 앞으로 자기가 하는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여겨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조희성은 몇 년 후에 부활한답니다. 많은 신도들은 재산을 바쳤기 때문에 집에도 못 돌아가고 여전히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단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신도들의 재산을 노리는 것입니다. 이단 교주들은 엄포와 저주를 섞어가면서 어떻게 해서든 재산을 바치게 만듭니다. 이단 교주들은 돈 이야기를 능숙하게 잘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가 되기 십상입니다. 정통 교단의 목사들은 이런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기를 껄끄러워합니다. 자칫 설교를 오해하면서 듣게 될까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에도 바울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물질에 대한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말씀의 삼분의 일이 물질과 연관이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도 물질에 대한 교훈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사실 헌금을 강조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미 헌금한 빌립보교인들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빌립보서를 쓰게 된 동기 가운데 가장 큰 동기가 바로 바울이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입니다. 빌립보교회는 감옥에 갇힌 바울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를 지나치게 하다보면 오해의 소지가 생깁니다. “아! 이 사람이 선물을 좋아하는구나. 더 달라는 이야기인가?”

그래서 바울은 오해가 없도록 이점을 분명히 해둡니다.
17 절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그리고 바울은 18 절에서 자신은 모든 것이 있고 또 풍족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의 의도가 결코 물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정말 모든 것이 있었을까요? 정말 풍족하게 지냈을까요? 실제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풍족하다는 고백은 마음의 풍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11 절에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 자족의 비결로 지금 풍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광고를 냈습니다. 누구든지 이 자족을 터득한 사람에게 일만 달러를 상금으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고를 보고 찾아왔습니다. 저마다 만족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하는 것이 즐겁고 만족스럽습니다.” “저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훌륭한 부모님과 예쁜 아내를 두고 있어 행복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저는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되어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상금을 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자의 마지막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족한 삶을 산다면 왜 상금 일 만 달러가 필요합니까?”

사람의 욕심엔 끝이 없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어도 ‘조금만 더’를 외치며 삽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미 자족의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주든지 안 주든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물질에 자유를 누렸습니다.

바울은 물질을 받는 일에 익숙한 사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철저히 자비량 선교를 해왔습니다. 어디서든지 사례를 받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선교지 사정 때문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는 특별한 상급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이 사례비 문제로 시끄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사례비를 받는데 왜 바울은 사례비를 받지 않는가?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 선교지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걸식전도가 선교의 원칙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 전통을 따르지 않는가? 바울이 사도가 아니란 말인가?

바울의 자비량 선교의 원칙은 결국 사도직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번졌습니다. 고린도전서 9 장 전체는 바울이 이 문제를 변호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초청 강사비를 받지 않습니다. 사례비를 드려도 극구 사양합니다. 이런 분을 뵈면 물질에 초연한 듯 보입니다.

저는 어떨 것 같습니까? 다른 교회에 초빙을 받아 강연이나 설교를 하면 사례비를 줍니다. 받을까요, 사양할까요? 저는 돈을 밝히지는 않지만 싫어하지 않습니다. 주시면 받아 좋은데 씁니다.

바울이 자비량 선교의 원칙에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본문 15 절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바울은 소아시아지역과 유럽 지역을 폭넓게 전도했습니다.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곳에서도 사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빌립보교회는 예외였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사례를 받은 것은 여러 차례입니다.

16 절에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바울이 왜 빌립보교회에서만 사례를 받았을까요? 자비량 선교의 원칙을 깰만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밝혀내려면 먼저 바울이 사례를 받지 않는 이유부터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12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사례를 받을 충분한 권한이 있었지만 그 권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참은 까닭은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려고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이 끼어들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헌금 때문에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교회 가면 돈을 바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신자에게는 헌금에 대한 부담을 주지 말아야합니다. 헌금보다는 복음이 먼저입니다. 먼저 복음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헌금은 믿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헌금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헌금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은 복음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습니다. 물질 문제에 민감하기 때문에 조금만 이상해도 시빗거리가 생깁니다.

바울이 사례비를 받지 않은 까닭은 오직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헌금에 부담을 주지 않고 복음만 전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의 형편은 다른 곳과는 달랐습니다. 그 교회에 부자가 많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빌립보교회에는 루디아 같은 여걸이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스케일이 큰 무역상을 하는 사업가였습니다. 소아시아의 두아디라에서 자주빛 옷감을 떼어다가 유럽에 있는 빌립보에 팔았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루디아의 집이 빌립보교회가 되었습니다. 루디아의 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루디아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도 그 집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고 받는 일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루디아 개인이 주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가난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 장에서는 빌립보교회의 형편을 극한 가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는 가난하지만 넘치는 연보를 했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빌립보교회의 이런 모습은 다른 교회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가난했지만 기쁨으로 드릴 줄 알았기 때문에 바울에게도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사도에게 사랑을 주는데 복음에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교회가 주는 사례는 여러 차례 받아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빌립보교회를 칭찬합니다. 그리고 축복합니다. 헌금을 하기 때문에 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향기롭게 잘하기 때문에 축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19 절 말씀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18-19>

빌립보교회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렸습니다. 사실은 바울에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 되었다고 설명해 줍니다. 빌립보교회가 바울에게 잘했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대신 갚아주십니다. 바울이 물질로 되갚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로 기도로 갚습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풍성한 대로 빌립보교회가 쓸 모든 것들을 채우실 것이라고 축복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19-21>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6:38>

이 말씀들은 축복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이 아니어도 끄떡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금을 기다리십니다. 그 헌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헌금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인해 넘치도록 다시 되돌려 주십니다. 하나님께 후히 드리는 훈련을 해 보십시오. 곧 후히 되어 주시고, 눌러 주시고, 흔들어 주시고, 넘치도록 안겨 주실 것입니다.

반면에 쩨쩨하게 드려보십시오. 그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입니다. 가난한 것과 쩨쩨한 것과는 다릅니다.

저희 아버님이 아들이 목사니까 아들 예수를 믿어 주셨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전도할 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제가 목사가 됐는데, 목사 아버지가 교회를 안 다니면 사람들이 저를 따르지 않습니다. 자가 아버지도 전도 못하면서 무슨 설교를 하냐고 핀잔합니다. 그런 소리 때문에 저는 목사가 됐지만 목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아버님은 종종 제가 교회 다니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성경을 집어 던지기도 하시고, 교회 가서 먹고 살라고 쫓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예 아들이 신학을 하고 목사까지 되고 나니 어쩌지 못하게 되었죠. 그 때부터 아들 예수를 믿어 주셨습니다. 동네 교회를 다니셨는데 예배 시간이 고문을 받는 시간이셨나 봅니다. 교회 다녀온 증거로 언제나 주보를 제게 내미셨습니다. 그러면서 목사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못 알아듣겠다고 투정을 부리셨죠. 헌금 시간이 되면 언제나 동전 하나 딸랑 넣고는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오셨서 “헌금 100 원했다. 오늘은 인심 써서 200 원 했다”며 약을 올리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은혜를 받으셨는지 500 원했다고 자랑을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은 70 세가 다 되어 교회를 찾았기 때문에 도리를 깨닫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그렇게라도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시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에야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회개를 하셨습니다. 저는 진작 복음을 진지하게 전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멋진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사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사례를 받지 않으려면 저는 다른 직업을 따로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평생 주님만을 위해 살기로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에 전념하며 여러분의 사례를 계속 받을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받는 사례를 월급 받는다고 말합니다. 정액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렇게 말해도 여러분은 저에게 월급을 준다고 말씀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은 제게 월급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헌금을 목사가 다 가져가는 걸로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이 교회를 지어 줄테니 헌금을 반반씩 나눠 갖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멋진교회는 헌금을 투명하게 관리합니다. 목사 독단으로 헌금을 유용하지 않습니다. 회의를 하고 제직회를 거쳐서 지출을 합니다. 이 헌금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쓰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관리하겠습니다.

멋진교회가 빌립보교회를 닮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풍성한 축복을 아끼지 않는 목사이고 싶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오늘 설교를 헌금을 많이 하라는 소리로 듣지 마십시오. 헌금은 정직하게 하고, 정성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헌금은 우리가 복을 받는 가장 적극적인 비결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리필 되는 향기입니다. 향기는 시간이 지나면 공중으로 날아갑니다. 계속 리필이 되어야 그 향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림으로 생기는 이 향기가 마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리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정직하게 십일조를 드려보십시오. 이 십일조가 리필이 될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헌금이 향기로운 제물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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