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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둘기같은 성령을 받으라!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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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신삼철 목사

시작하는 말

성경에는 은유법(Metaphors)이 있습니다. 은유법이란 표면상으로는 비유의 형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와 같다. ~와 비슷하다의 형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키 큰 사람을 “전봇대”, 사람의 귀를 “소라 껍데기”라고 말하는 표현의 형식을 말합니다.  세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말한 것은 은유법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성에는 직유법(Similes)도 있습니다. 직유법이란 두 개의 사물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비유하는 것과 비유되는 것을 따로따로 드는 형식이며 가장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를테면....”, “마치...”, “....와 같다.”, “ ...비슷하다.”의 형식으로 쓰입니다.

예를 들면 “차기가 얼음장 같다.”와 같은 형식을 말합니다. 시편을 보면은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시102:6-7)와 같은 형식으로 쓰인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상징(Symbol)적인 표현도 있습니다. 어떤 사물, 사상, 징조 등을 이것과 어떠한 의미로 상통하는 다른 사물에 의하여 연상적으로 표현하는 일 또는 그 대상물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흰색은 순결의 상징”, “붉은 색은 정열”을 상징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 오른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성경에는 예표(Types)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표를 연구하는 것을 “예표론(Typology)”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세운 놋뱀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비유(Parables)도 있습니다. 비유는 하늘의 신령한 의미를 가진 세상적인 이야기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씨뿌리는 비유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풍유(Allegory)도 있습니다. 풍유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어떤 이야기나 사물에서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비유적인 언어로 어떤 사실을 나타내는 이야기나, 어떤 사물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사기 9:1-21절에서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 나무들의 대화를 통해 그의 형제 “아비멜렉”의 행동을 비난한 것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표상(Emblem)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홀”은 통치권의 표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혹은 상징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표현하는 상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일종의 성령의 개성(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비둘기 같은 성령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F. E. Marsh는

“성령이시여 !
비둘기처럼 임하사 당신의 날개를 펴소서
평화스러운 사랑의 날개를
그리고 지상의 당신의 교회가
천상의 교회처럼 복되게 하소서”...

창1:1-2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는 말은 비둘기가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알을 품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불가타역(Vulgate, 4세기말 Jerome이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은 “수면에 운행하시다”는 말을 “incubabat ”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에서 영어 “incubator”가 나왔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32:10-12)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운행하신다는” 말을 독수리가 새끼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날개위에 새기를 업는 것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섭리 보존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보았습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은 !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성령받는 일은 의를 이룰 때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비둘기는 성품이 깨끗합니다.

아가서에서 솔로몬은 신부에게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1:15)라고 신부의 아름답고 깨끗함을 노래했습니다.

비둘기는 깨끗한 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도록 허락이 되었습니다. 새 중에 비둘기 만큼 깨끗하게 보이는 새도 없습니다.

예님께서는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고 말씀하셨습니다.

2. 비둘기는 행동이 부드럽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당부하셨습니다. 

새는 쓸개가 없습니다. 비둘기도 물론 쓸개가 없습니다. 쓸개가 없기 때문에 비둘기를 순결하다고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언제 보아도 가까이 하고 싶은 새들입니다. 모이를 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새들입니다. 친근감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9가지 열매중 하나를 “자비”(갈5:22)라고 말했습니다. 자비라는 말은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신사를 “gentleman”이라고 말합니다. 그 인격 중에서 쓸개 같은 것이 없는 자를 신사라고 합니다. “너는 쓸개도 없느냐”라는 말을 들을 때에 “비둘기 같은 신사, 성령받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순결하시고, 자비롭고, 부드러우시기 때문에 쓰디쓴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김천의 한 설렁탕집 이야기입니다. 그 집은 항상 최고의 재료를 썼습니다. 예수님이 드셔도 만족해 하실 설렁탕을 끓인다는 것이 집 주인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주재료인 뼈와 고기는 물론 양념과 무, 배추도 가장 좋은 것을 삽니다.

그런데 어느 날입니다. 국물이 뽀얗지 않고 누렇게 됐습니다. 24시간은 끓여야 되는데 큰일이다 싶어 뼈를 대주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저런 죄송합니다. 물건이 바뀌었나 봅니다. 사장님, 오늘만 크림을 타시죠,” 크림을 타면 국물이 뽀얗게 된다는 것은 설렁탕집 주인도 익히 들어온 터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크림을 타는 대신 가게 문에 글을 하나 써 붙이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설렁탕 재료가 좋지 못해서 쉽니다. 죄송합니다.” 고객을 예수님처럼 모시는 이 정직한 마음과 주인의 행동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3. 한결같은 사랑을 합니다.

솔로몬은 아가서에서 신부에게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씨은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아5:12)라고 노래했습니다.

비둘기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새끼를 까도 암수 한 쌍씩 깝니다. 언제나 암수 한 쌍씩 날아다니고 생활합니다. 어쩌다 한 마리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혼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죽음 이외에는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를 “사랑”의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사랑의 열매는 매우 귀중한 열매입니다.

사도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요4:12-13)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말하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랑은 성령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자신의 욕망 자체의 목적을 위하여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욕망을 쏟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은 욕망의 실현이 불가능하면 식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대상에게 사랑의 애정을 쏟아 사랑 자체의 목적을 위해 사랑하고, 다른 이들의 만족에서 자신의 만족을 발견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4. 비둘기는 먹이가 특이합니다.

비둘기는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썩은 고기는 물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새 중에도 고기를 먹는 새들이 있습니다. 독수리, 새매, 부엉이, 올빼미 같은 새들은 썩은 고기까지 먹습니다.

구약에서 고기를 먹는 새들은 부정한 새로 보았습니다. 곡식을 먹는 새들은 정한 새로 보았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움직이시며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순결하고 깨끗한 말씀을 떠나서는 절대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가장 좋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받기 위해 기도했지만 악신이 임했습니다.

5. 비둘기는 민첩합니다.

다윗은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시55:6-7)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시면서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를 돌보시고, 위로하시는데 민첩하게 움직이십니다.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6. 비둘기는 사회성이 강합니다.

이사야는 “저 구름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사60:8)라고 말했습니다. 비둘기는 사회성이 뚜렷합니다.

성령께서는 구속받은 자들의 모임을 사랑하십니다. 교제를 나누시고 축복하십니다. 삼위일체의 조화는 성령의 사회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령을 받아야 사회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사회성이 있어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적응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사회성이 있어야 합니다.

맹수들은 사회성이 약합니다. 보기만 하면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초식 동물들은 사회성이 강합니다. 사회성으로 자기들의 종족을 이어갑니다.

끝맺는 말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고 말했습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강림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만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해 받으신 것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비둘기 같은 성령이 열린 하늘 문을 통하여 여러 성도들에게 강림하셔서 새로운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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