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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일을 앞에 놓고 (행 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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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필곤 목사

바울은 지금 큰 일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일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일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잡혀 죽을 지도 모르는 길이었습니다.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당시 바울의 심정을 잘 알 수 있는 말이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이와 같은 큰 일을 앞에 놓고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1. 큰일을 앞에 놓고 사실을 말하는 사람만 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5).
큰 일이 다가 오면 사실을 잘 분석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 진단을 기막히게 잘합니다. 교회를 짓자고 하면 교인이 적고 얼마의 돈이 들어가고 경제 상황이 어떻고 앞으로 내년도 경기가 불투명하고 참으로 잘 진단을 합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현실 진단을 하는 분이 대부분이고 조금 발전하면 타인의 입자에서 더 발전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진단합니다. 물론 현실을 진단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서 현실진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다섯 번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입니다. 이방인들이 모아준 구제헌금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의 앞길에는 핍박과 결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바울은 이 때 잡혀서 5년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 바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0장 23절을 보십시오. 자신이 결박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두로에 가니까 제자들이 찾아 왔습니다. 제자들이 찾아 와서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절에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어려움을 당할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분위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하는 전환기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지 말라는 말을 지극히 싫어 했을 것입니다. 바울을 이단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때 무엇을 했습니까? 5절에 보십시오. 우리가 바닷가에 무릎을 꿇어 기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는 바울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그리고 20:4에 동행자로 나온 부로의 아들 소바더,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아리스다고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동조하지 않고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큰 일을 앞에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를 지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 앞에 처절한 십자가의 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엄청난 공통, 모멸감, 수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땀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전심전력하여 밤새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다 시험에 빠져 버립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 40일 금식 기도를 드렸고 제자들을 공직적으로 임명할 때도 산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큰 일을 앞에 놓고 서로 다투거나 자기 주장만하며 마음 갈라서면 안됩니다. 사업이 잘 안되면 안될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현실적 이유를 들고 서로 말만하면 싸움밖에 없습니다. 기도해야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그 문제로 인해 신앙이 성숙되고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체험받는 것입니다. 인생의 큰일이면 큰 일일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한 15년 전에 암으로 투병하는 자매를 심방한 일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집안 분위기가 썰렁했습니다. 어머니와 딸이 서로 싸운 것입니다. 어머니와 딸이 서로 돈을 합해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그것 팔아 서로 지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놓고 싸운 것입니다. 딸이 죽게 되었는데 지분이 문제입니까? 서로 힘을 합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무엇을 합니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솔로몬 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기에 앞서 무엇을 합니까? 1천 번제를 드리며 기도합니다. 에스더가 민족의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무엇을 합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기도합니다.
테너 최화진교수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1982년 돈 한푼 없이 미국으로 건너간 그가 현재 뉴욕 나약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방 한칸에 열식구가 사는 너무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었다고 합니다. 매일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대학진학은 꿈도 못꾸었다고 합니다. 친구 전도로 찬양대에 찬양을 하였는데 말씀을 듣는 중에 찬양대에서 은혜를 받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방언기도를 하고 성령체험을 하여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다짐했다고 합니다.“제게 좋은 목소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주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미국에 가서 전문대학에 들어갔는데 교회에 나가 찬양을 했다고 합니다. 찬양을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데 한 할머니께서 지폐를 든 손을 덜덜 떨면서 그에게 다가 왔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는“은혜를 많이 받았다”며 내게 감사 표시로 지폐를 건네며 말했답니다. “밥 최는 왜 이런 시골에 살지? 뉴욕에 가면 줄리어드나 맨해튼 음대에서 공부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더 크게 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시골에서 이러고 있지?”그 때 그는“줄리어드는 알아요. 제게는 딸 둘이 있고 그곳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제 형편에 가능할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기도해봤어?”라고 재차 되물었답니다. 그는 그날 저녁 기도했답니다. 며칠 뒤 뉴욕에서 서류봉투 1개가 도착했답니다. 그 안에는 줄리어드음대 맨해튼음대 등 음악대학 입시요강이 들어있었답니다. 그 할머니는 뉴욕 롱아일랜드 헌팅턴감리교회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다고 합니다. 시험을 보았는데 줄리어드 음대 전체 수석 및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큰 일이 있습니까?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울고 있는 형제여 왜 찬송을 잊었는가 어둠 속의 찬송은 기적을 부른다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다오 고통의 문을 찬송 찬송으로 찬송 찬송으로
울고 있는 형제여 왜 기도를 잊었는가 어둠 속에 기도는 하늘 보좌 흔든다오 네 모든 사정을 주님께 고백을 하여 위로받고 구원받아 참 평화를 영원 영원토록 영원 영원토록(1129)"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하여 풀려났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 성도들이 합심기도 하여 기적을 체험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홍해 앞에서 원망합니다. 큰 일 앞에서 원망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때마다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했습니다.(삼상 12:23)" 다니엘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이지만 하루에 세 번씩 어김없이 기도하였습니다. 문제의 해결의 길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기도입니다.

2. 큰일을 앞에 놓고 부정적으로 목표를 회피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13).
어떤 큰 일이 있으면 현실을 잘 진단하고 그 목표를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표가 너무 크다고 말하며 그 목표를 줄이자는 사람도 있고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힘도 없으니 그만 두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 진단은 잘하는데 접근 방법이 늘 부정적입니다. 방법 자체가 신앙적이 아니라 합리와 논리라는 근거로 늘 이성적입니다. 물론 이성적 접근이 기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큰 일이 있을 때 이성적 접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명적 접근입니다. 그것이 내 일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면 부정적으로 목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어려움과 고통이 있고 희생이 따른다하여도 그 일만을 꼭 이루어야 겠다는 방법으로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제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님 중의 한 분이었던 빌립 집사님의 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 네 딸이 있었는데 다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여러날 빌립 집사님 집에 머물렀는데 선지자 아가보라는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바울에게 와서는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발을 잡아매고는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1절을 읽어보십시오. 성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신처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때 바울과 함께 가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2절을 읽어보십시오. 이들도 아가보의 말에 동조를 합니다. 과거 유대에 기근이 들 것을 예언하였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져 그의 예언에 권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어려움을 당할 것은 이미 바울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가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면 죽어도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큰 일을 할 때 어려움이 있으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그 목표는 이루고야 말겠다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 다 아십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 길을 회피합니까? 그렇게 했으면 인류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과 희생이 있다하여도 그 길이 옳은 길이면 감수하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내가 목사가 되었는지 왜 내가 장로가 되었는지 왜 내가 제직이 되었습니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왜 내가 결혼하고 왜 자녀를 낳았습니까? 어렵다고 포기하고 어렵다고 자녀들 방치합니까? 밤하늘의 별은 어두울수록 더 초롱초롱 보이는 것입니다. 요나가 왜 실패했습니까? 목표를 부정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선지자가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어가는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성의 죽어가는 사람 이방 사람들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임명한 목적이 아닙니다. 그에게 주신 사명은 어떤 사람이든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 일을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 일평생 그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광야에서 실패했습니까? 매사 부정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홍해가 나오면 원망하고 물이 없으면 모세를 죽이려고 하고 먹을 것이 없으면 불평불만을 합니다. 가나안 땅을 보여 주고 들어가서 정탐하게 하였는데도 자신들은 메뚜기라고 합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를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하였습니다.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가지고 분명한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이라는 분명한 목표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긍정적으로 접근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꾸었던 어릴 적 꿈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향하여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접근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할 분명한 목포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목표를 이루는 디딤돌로 생각했습니다.
원수 마귀 사탄은 우리의 시선을 자꾸 흩틀어 놓으려고 합니다. 다윗에게 우리아의 아내를 자신이 돌보아야 자신의 백성인 것을 망각하고 욕정을 채우는 도구로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목표, 그 성취의 기술에서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내가 만일 5분 동안 당신의 성공에 도움이 될 만한 딱 한 가지 생각만을 전해줄 수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날마다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나가십시오.' 이 조언을 충실히 따르기만 한다면 이제껏 배워온 그 어떤 것보다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 첫째가 목표가 분명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접근했습니다.
로버트 클필톤은 세상에 많은 영향력을 미친 여덟명의 영적 지도자를 연구하여 [초점이 있는 삶]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는 밝히기를 그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의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삶에는 초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표를 어떻게 접근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 긍정적인 태도로 목표를 접근해야 합니다.
오늘날 제주도에서 나오는 지하수는 미국 FDA, 일본 후생성 등 선진국 수질검사에도 합격하여, 깨끗하고 질 좋은 물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물이 귀한 섬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제주도에 풍부한 지하수를 가지게 된데는 농림부 산하 지하수 개발팀에 근무한 한규언씨의 공이 크다고 합니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모두가 제주도는 용암지역이기 때문에 지하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안 근처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용출수(湧出水)를 발견하고 힘을 얻었습니다. 분명히 지하수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없이 실패를 했지만 목표를 가지고 암반을 뚫은 굴착 장비를 개조해 만들었습니다. 끈질긴 노력 끝에 그 해 5월 지하 27m에서 그는 지하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북제주군 한림읍 동명리에 보존되어 있는 제1관정이라고 합니다. 그 후 수백, 수천의 관정이 개발되면서 제주도는 오늘 같은 지하수 천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평생 복음 증거의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갖은 장애물을 뛰어 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간 바울은 고백합니다.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3. 큰 일을 앞에 놓고 내 뜻 관철하려 하지말고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4).
큰 일이 다가오면 자꾸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드로아 제자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바울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석을 잘못한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대처 방법은 정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결박되는 모습을 보고 바울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 어려움이 있을 것을 보여 주며 준비하고 희생의 짐을 지라는 의미로 보여 주었는데 그것을 그는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제자의 길이라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겠다는 바울의 단호한 신앙의 결단을 보고 바울의 동료들이 결국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큰 일을 앞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뜻을 굳히지 않고 바울을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견해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바로 영적 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릴 때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을 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유혹을 합니다. 사울의 실수는 제사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제사를 드린데서부터 온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뜻이면 모두 잠잠해야 합니다. 큰 일일수록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현실에 기반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못하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마져 방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자신의 이름을 새긴 깃발만 꽂고 자랑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군인가 적인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내 뜻에 맞지 않으면 목회자도 동료도 적으로 취급하여 싸우려고 덤벼들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동료들은 자신의 뜻을 빨리 거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합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신앙의 동지들입니다. 조금 내 자존심 상해도 하나님의 뜻 이루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모멸감을 받고 조금 짓밟혀도 하나님의 뜻 이루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인류 대속의 어마어마한 일을 앞에 놓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무슨 기도를 드립니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통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감당하십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자존심만 상해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혈기 부리고 오기를 부려서는 안됩니다.
얼마나 열정을 가지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큰 일일지라도 그것이 악한 일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해만 더 끼치게 됩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열정을 내면 낼수록 손해입니다. 더 열심히 노를 저으면 더 잘 못된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도둑이 더 열심히 도둑질하면 더 큰 죄만 짓게 됩니다.
이세벨은 열정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의 사람만 더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기업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의 힘에 의해 이 땅이 통치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닛케이(日經)비즈니스」 지는 과거 100여 년 간 일본 100대 기업의 흥망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이들 기업의 평균 수명이 30년 정도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는(technology-based) 대기업 2,000개 회사를 샘플로 평균 수명을 조사해 보니 평균 수명이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역사학자 슈펭글러(Spengler)는 생명주기이론(生命週期理論)으로 역사 속의 흥망을 설명했습니다. 탄생, 성장, 성숙, 그리고 노쇠기를 거쳐서 결국 사멸된다는 것입니다. 토인비(Toynbee)는 도전(挑戰, challenge)과 응전(應戰, response)으로 역사 속의 흥망을 설명했습니다. 무수히 다가오는 도전 앞에 응전에 성공하면 계속 존속, 발전할 수 있고, 실패하면 소멸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도전을 적시에 인식하고 그에 응전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주체를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라고 했습니다. 이 창조적 소수에 의해 발전된다는 것입니다. 의미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적 소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을 통해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해 가십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인공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큰 일이 앞에 있을 때 현실적이 어려움, 사실을 말하는 사람만 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5).
큰일을 앞에 놓고 부정적으로 목표를 회피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13).
큰 일을 앞에 놓고 내 뜻 관철하려 하지 말고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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