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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한 영혼을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열심(눅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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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송천호목사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으신지요? 자녀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 동안 중요하게 여겼던 삶의 모든 일들을 놓아둔 채 부모는 온통 잃어버린 아이를 다시 찾는 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오직 아이를 다시 찾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순수한 자식을 향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런 부모의 마음은 하나님의 우리 인생을 향한 아가페의 심정이 반사(反射)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마음을 양을 잃은 목자의 심정에 비유한 내용입니다. 양 백 마리를 돌보는 목자가 해가 저물어 양들을 점검해 보았더니 한 마리가 모자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목자는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섭니다. 피곤하지만 그 한 마리를 찾기까지 쉴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동안 지나왔던 행로를 더듬어 아무리 험한 계곡일지라도 그 양이 있을 만한 곳으로 쉴 새 없이 찾아 나서게 됩니다.

여러분, 왜 어린 아이를 잃으면 그렇게도 애타게 찾습니까? 왜 그다지도 안절부절 당황하게 됩니까? 물론 근본 이유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혈육의 정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어린 아이 스스로 집을 찾아 올만 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남겨두고 잃은 한 마리 양을 황급히 찾아 나서는 것도 역시 양이라는 동물의 무력함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양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자구책이 전혀 없는 동물입니다. 양은 스스로를 방어할만한 사나운 이빨이나 발톱 등 아무런 무기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은 방향감각이 없어 광야에서는 더욱 더 위험합니다. 팔레스타인 황야에 있는 계곡은 숨을 곳도 없고 엉겅퀴가 있을 뿐인데 그곳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양이 길을 잃으면 그것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3장에 우리 타락한 인생의 운명을 길을 잃은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서”

죄를 범한 인간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생명 길을 잃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잘 아시고 잃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심정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목자는 그 잃은 양을 포기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많습니다. 이미 해가 지고 일과는 끝났습니다. 또한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목자의 생명도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양이 길을 잃은 책임소재도 양에게 있었습니다. 목자의 실수가 아니라 양의 실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그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입니다.

사실 한 마리는 99마리에 비교하면 극소수입니다. 백 분의 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다수를 위하여 소수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대하지 않습니다.

어느 신실한 여 집사님이 남편을 일직 여의고 4삼매를 오직 교육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자녀들은 다 잘 성장해서 가정들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주말 막내아들이 여행 중에 대형사고로 생명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았습니다. 허둥지둥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들이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에 온 조객들 중 한 사람이 ‘너무 비통하지 마세요. 삼 남매가 있잖아요?’고 위로하는 말을 하더랍니다. 이 말에 부인은 ‘남은 삼 남매가 어찌 잃은 아들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냐?’ 외치며 더욱 비통해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이 사건을 통해 ‘아들딸이 셋이 있어도 그 잃은 아들 하나를 인한 슬픔을 메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나 같은 소자와 우리를 위하여 하나 뿐인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으며 큰 위로가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막내를 잃은 어머니의 비통한 마음처럼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안전하다고 한 마리 잃은 양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나를 온 우주보다 더 소중한 나로 보시기에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는 자신을 무리 중에 하나로 하찮게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은 나를 무리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일대일로 대하십니다. 인류 역사상 오고 가는 여러 세대의 억만 인중에 오직 하나뿐인 나로 대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잃은 양인 우리를 찾아 추적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분신이요 영적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은 태초(太初)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추적해 오십니다. 사46:1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기획하였은즉 분명히 이루리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잃은 양인 나를 찾고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99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인하여 더 기뻐”하십니다. 본문에 잃었던 양을 찾고서 가장 기뻐한 이는 누구입니까? 길을 잃었던 양이 아니라 목자였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은즉 피곤함도 잊고 기쁨이 넘쳐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가장 기뻐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경은 나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라 선언하고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1998년에 5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입니다.
1944년 세계2차 대전 중 중서부 Iowa State Ryan 농가에 네 아들이 징병에 소집되어 오마하 해변 전투에서 세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이에 사령부에서 한 가정에 세 번 씩이나 아들의 전사 소식과 유골을 전했으니 그 가정의 막내아들 제임스만은 살려야 한다는 지령을 내립니다. Captain John Miller가 ‘일등병 라이언을 찾아 구하라’는 임무를 위임받습니다. 수소문을 해보니 James Ryan이 매우 위험한 노르만디 작전에 파병된 것 같다는 정보를 얻고 Miller대위는 인솔했던 여러 소대원들의 생명을 바쳐 가면서 일등병 라이언을 구하는 임무를 수행해 냅니다. Captain Miller의 일등병 라이언을 구출하는 그 용기는 대단했고 결국 본인도 작전 중 부상으로 죽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제임스 라이언이 노르만디 작전에서 구출된 44년 후인 1988년 60대 할아버지로서 아내와 중년이 된 자식들을 데리고 자기의 목숨을 구하다 전사한 사람들이 묻힌 국립묘지에 와서 그들의 비석들을 돌아보며 Captain Miller와 여러 동료들이 목숨을 바쳐 연장된 자신의 생애가 얼마나 보람된 삶이었나? 회심에 찬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Captain 예수님께서 내 생명을 구하려고 험악한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 민족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는 영국에서 먼저 복음을 접한 토마스 목사가 조선인들의 영혼을 귀하게 여겨 영국을 떠나 복음을 전하려고 평양에 찾아 왔다가 대동강 변에 피를 흘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수십 년 후 미국의 젊은이 언더우드 박사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조국을 떠나 한국 땅에 찾아와 저들의 생애를 바쳤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들의 묘지공원이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에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한국교회를 위해 희생된 많은 서양 선교사들의 이름이 비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선교사들은 한민족 복음화를 저들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선한 목자의 심정으로 살기 편한 본토를 떠나 낯설고 불편한 조선반도에 저들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관심이 우리 교회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잃은 양들을 찾아야 할까요? 우선은 가장 가까운 이웃에 교회생활을 하다 탈락한 ‘제 갈 길로 탈선한 양’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잃어버린 영혼’,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을 찾고 둘러보아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처럼 중국대륙이나 일본, 그리고 38선 넘어 북한에 길 잃은 많은 양 무리를 구원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당면한 인도네시아의 스마트라 섬 해안에 발생한 쓰나미는 수십만의 사상자들과 수만의 가옥들과 건물들을 흔적도 없이 휩쓸어 갔습니다. 그곳 파괴된 쓰레기들과 시신들, 가까스로 살아난 생존자들의 울부짖음 등으로 지구촌은 깊은 비애에 당황하며 도움의 손길을 펴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때 일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황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회를 선용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이런 때에 굳게 닫혔던 아랍권 모슬렘 사회의 문이 구호와 선교의 손길에 열려 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랍권의 많은 영혼이 구원되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 원근 각처에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까운 주변에, 우리 직장에도 교회를 다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을 누군가가 찾아 주어야 삽니다. 저들을 붙잡아 주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자신의 만족보다 주님의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선교’에 우리의 삶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겨 전도하고 돌보면 나의 신앙이 좋아지고 신앙생활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복음적인 교회가 잃은 영혼을 귀하게 여겨 열방을 품고 기도하고 선교하면 주님의 교회는 부흥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의 관심이 옛날 사도행전의 안디옥교회처럼 잃은 영혼을 찾아 양육하고 멀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집중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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