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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 주님의 마음을 알자 (눅 22: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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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이날을 ‘호산나주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외치던 것에 유래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절의 절정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은 곧 주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금요일에 주님은 물과 피를 쏟으시고 운명하십니다. 주님의 생애 자체가 고난이었지만, 이번 한 주간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그리고 자기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에 비해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도 주님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며, 열광적으로 주님을 환영했지만, 그들은 참되신 주님의 속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왜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군중들은 그렇다고 치고, 3년 동안 주님을 가장 가까이 보던 제자들조차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비극입니다. 이런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어 오늘까지 왔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속을 헤아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특히 오늘과 같은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더욱 주님의 속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은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답답하리만큼 주님의 속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과 그들을 향하여 깨우치려고 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속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죽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작은 바로 앞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부터 출발합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시며 성만찬을 집례하셨습니다. 성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숙한 일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것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알았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어리석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여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처음 주님이 죽음을 언급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누구라고 말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런 주님을 말렸던 것을 봅니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칭찬이후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신앙은 잘 고백했는데, 주님의 속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왜 오셨는지를 몰랐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요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음이 아니라 권세를 잡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고난이 아니라 영광을 얻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죽음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어리석은 본문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면, 주님은 성만찬을 하시고 가룟유다의 배반을 언급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직접적으로 유다를 지목하지 않은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유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자기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배반을 말씀하자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배신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서로를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여기에서 주님은 ‘이미 작정된 대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작정된 것입니까?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이미 작정된 일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이미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팔지 않아도 주님은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음모를 꾸미지 않아도 주님은 자기 길을 가십니다. 사단이 아무리 말려도 주님은 그의 길을 가실 분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미 작정된 길입니다. 주님은 오직 이것을 위해 오셨기에 반드시 그 길을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십자가, 바로 이것이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주님의 깊은 속마음에는 이미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길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가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능력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당시 제자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알았지만, 그들이 어리석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 비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제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고난받아야 할 것을 대신 받으셨고, 내가 지고 갈 십자가를 지셨고,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알이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또한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골고다로 가신 것이요,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이 오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이 주님의 마음을 깊이 새기며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31절 이하에 이것을 주님의 마음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주님은 베드로를 지목하여 그를 향해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것은 곧 베드로의 시험과 배신과 범죄를 예고하는 말씀이십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를 보십시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자만했습니다. 주님이 지적해 주는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그가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주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베드로의 배반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너무 자신을 믿지 말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로 틈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속마음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범죄하지 않게 하려고, 겟세마네동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 기도하면서 시험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섬세한 배려가 듣지 않아 그는 결국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주님의 사랑과 마음을 알려주었건만 귀담아 듣지 않았고, 하라는 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 때 그제야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눈물로 통곡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뒤부터 그가 달라졌습니다. 이제부터 정신을 차리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이제 헤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알 수 있고, 그가 성도들에게 전한 편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려 저를 대적하라...”

  이제 우리 앞에 나타날 주님의 처절한 죽음을 보면서, 십자가로 가까이 가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너무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것이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십자가로 가까이 가면서 정신을 차립시다. 흩어진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로 모읍시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는 생명의 길, 내가 살고 모두가 사는 그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주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 24절부터 29절까지에 이것에 대한 귀한 교훈을 줍니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주님이 제자에게 원하는 마음을 피력해 주었습니다. 24절에 보면,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자리다툼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면, 누가 국무총리가 되고 비서실장이 되고, 장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싸움입니다. 주님은 피를 쏟으며 죽으시기 위해 십자가로 가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제자들이 주님의 속을 모르는 모습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참 주님이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셨을까요? 정말 몰라도 이렇게 모르는 제자를 사랑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의 속을 알려주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이 알려주었건만 아직도 모르는 그들에게 차근차근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주님은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주님은 섬기는 자로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아니라 종의 자세로,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큰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에서,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이 보여주었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까지 주님이 알려주었던 말씀처럼, 주님은 그렇게 섬기는 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라면 모두가 이런 길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셨던 모습입니다. 가졌다고 자랑하지 않고, 높은 곳에 있다고 낮은 자를 멸시하지 않고, 어려워도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섬기는 자로 주님은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면 날마다 추구해야 할 참된 길입니다.

  지난주간, 저는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으로부터 아주 귀한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김우현이란 전직 PD가 7년 동안 한 사람의 삶을 추적하여 그의 삶을 세상에 공개한 책입니다. ‘최춘선’이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것입니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30년 동안 지하철에서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한 분입니다. 30년 동안 했으니까 우리가 한번쯤은 그를 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지하철을 타던 시절에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몇 번은 스쳐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과 머리에 자기 나름대로 적은 전도지를 두르고, 성경내용과 독립투사의 사상을 뒤섞은 말로 뭔가를 외쳤던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언제나 맨발로 다녔습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당연히 무시하고 외면했습니다. 망령든 노인네나 광신도쯤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에서 그를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걸어오고, 숨겨졌던 삶이 한 작가에 의해,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기고, 수첩에 적혀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독립유공자’였습니다. 김구선생과 함께 독립을 위해 힘을 쏟으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실정을 안타까워했던 분입니다. 알고 보니 그가 맨발로 지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는 것입니다. 맨발만 아니어도 미쳤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을 텐데, 왜 맨발이냐는 질문에 그는 통일이 되면 신는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김포근처에서 목회를 하다가 나중에 전도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젊은 시절, 죽다가 살아난 은혜를 체험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일본에서 공부도 하고,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인데 그가 그런 박식한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엄청난 재력가’였습니다. 김포에서 인천국도까지 펼쳐진 모든 땅이 대부분 이 노인의 소유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대부분 전쟁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김포 일대에서 그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들가운데 최바울이란 사람이 목사님이 되셨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님이 독립유공자였기 때문에 도장만 찍으면 연금이 나오고, 저희들은 대학까지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는데 신청을 안 하셨어요. 남과 북이 아직 분단된 상태이므로 완전한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고, 보상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내일 아침 먹을 쌀만 남았는데, 누가 와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 그마저도 퍼주셨어요. 어머님이 마지막 쌀인데 우리 아이들은 무엇으로 먹이냐고 걱정하시면, 하나님이 다 먹이신다고 말씀하셨어요... 한 번은 지방에 설교하러 가셨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합의도 보지 않고 용서해 주셨어요... 아버님은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믿었기에 등기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걸 알고 누군가가 땅을 자기 앞으로 등기해 소송이 붙었는데, 아버님이 재판에 출석하지 않아 결국 남은 땅마저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수 백 명되는 고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서른 번도 넘게 다녔는데, 그러면서도 힘든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셨어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아들 목사님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젓가락 하나 들어올릴 힘조차 없다고 하면서도, 그날도 전도해야 한다고 나가셨어요. 제가 아버님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수원행 1호선 전동차 안이었는데 의자에 앉으신 상태로, 잠든 듯이 그렇게 편안한 모습을 하고 계셨어요...”

  최춘선 할아버지는 주님의 말씀처럼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는 주님을 본받아 산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데, 특별한 것이 아닌데, 이렇게 특별하게 보이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사셨고, 앞서간 자들이 걸어갔던 삶이었는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도전을 주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의 시대가 그렇게 되지 못한 증거입니다. 물질주의, 개인주의, 황금만능주의가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것이 교회 밖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팽배합니다. 감사하지 못합니다. 더 가지려고 합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예전에 주님을 믿고 경건을 추구하는 자를 ‘신앙인’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참된 진리와 도를 따르는 자를 ‘구도자’라 부르고, 세상에 미련을 두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소망을 두며 미래를 향해 나가는 자를 ‘순례자’라 부르며, 이 땅에 작은 예수처럼, 주님의 삶을 본받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신앙인이나, 구도자를 찾기 힘들고, 순례자가 점점 없어지고, 진정한 크리스챤의 모습을 찾기가 힘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이제 내 신앙을 다지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의 생각을 깨닫고, 그분을 닮고, 뒤를 따라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며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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