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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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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연수 목사

(고후 6:1-10)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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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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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부활의 감격으로 새로운 삶을 출발하신 모든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더욱 넘치기를 제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고 부활을 우리가 함께 느끼며 경험한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났습니다. 이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 그리고 무덤을 이겨내고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며, 우리가 누릴 은혜의 뿌리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 사도바울의 자기 정체성 -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오늘 설교의 주제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 전, 오늘 저는 본문이 시작되는 1절 말씀을 읽으면서 사도바울을 또 한번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갖고 있는 자기 정체성입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를 지칭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 명예로운 호칭은 단 한 사람 바울만의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그 고백의 주어로 쓰인 말은 <우리가...>라는 말, 즉 복수형으로 쓰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는 표현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동업,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글에서만해도 이러한 개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또한 그런 마음으로 함께 일하는 이들을 동료로, 또 동역자로 여겼습니다.

(고후 8:23) 『디도로 말하면 그는 내 동료요, 여러분을 위한 내 동역자입니다. 그리고 여러 교회의 심부름꾼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신 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동역자이십니다. 그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 지금은 은혜받을 때

교회 다니는 사람은 물론, 어떤 세상의 사람도 은혜라는 말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 나오자마자 듣는 말 가운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단어가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또 주위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는 것도 큰 인생의 복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단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거리를 걷다가 만난 3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쓴 글입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
처음 예수님은 한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이오?.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할만한 직업이 하나도 없었소.”
그 다음 예수님은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받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 갔단 말이오?” 창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몸을 파는 일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 수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답니다.”
또 예수님은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에게 매질을 하고 있는 광경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또 물었습니다.
“여보게,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불량자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소.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요?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우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이 아니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 박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소. 그러니 이제 나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시오.”

이 단편이 그리려는 것은 은총을 은총으로 누리지 못하고, 빛을 만났으나 빛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상을 그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참으로 거대한 것입니다. 창녀에게서 구원되거나 소경이 눈을 뜨는 이상의 큰 은혜를 우리는 입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감사와 은혜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깨달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 그리고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야 하는지...? 또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삶의 자리에서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은혜야 받으면 그만이지 헛되이 받는 것이 있나요?
그러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 은혜를 헛되이 만드는 일 1 - 받지 않는 것.

은혜를 은혜답게 만드는 일은 넙죽 받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 베푸는 분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큼 은혜 베푸는 사람을 속 상하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저희도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하나님께서 신비롭게도 엄마의 몸을 변화시켜서 아이에게 먹을 생명의 젖을 냅니다. 다들 경험해 보셨겠지만 아이가 젖을 잘 빨지 않으면 엄마의 젖이 불어서 엄마는 고통을 느낍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엄마에게서 자신의 생명을 살려내는 젖을 받는 것이 은혜이지만, 엄마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힘차게 젖을 빠는 것이 또 큰 은혜입니다.
진정한 사랑, 조건없이 주고 받는 아가페 사랑의 관계 속에서는 주는 이는 받는 이로 인해서 감사요, 받는 이는 주는 이로 인하여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의 관계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할 때에 어떨 땐 자존심 때문에, 때로는 오해 때문에 받아 들이지 않을 때에 마음 아파하고 속상했던 기억들, 다들 있으시죠?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지금은 구원을 누릴 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때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그저 받아 누리기만해도 하나님 아버지께 큰 효도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외치십니다.

(겔 33:11)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하여라.』

비록 악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비록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받아 누리는 것으로 충분히 하나님께 기쁨의 보답이 됩니다.

■ 은혜를 헛되이 만드는 일 2 - 감사치 않는 것.

레위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가는 동안에 지켜야 할 종교적 계명 뿐 아니라, 생활하면서 지켜야 할 많은 생활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감사를 강조하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자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탈무드는 이렇게 해석을 내립니다. “율법에 감사를 모르는 자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처벌하시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미국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돈이 없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서 당시 거부였던 바턴씨를 찾아가서 2천불을 꾸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바턴 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지만, 바턴 씨는 왠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당시로서는 큰 돈인 2천불을 꾸어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 씨는 완전히 파산이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 씨를 찾아가 당신이 빚진 돈 7만 5천불을 내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턴 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 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한 스트로사의 대답은 멋진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빚진 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베풀어 준 은덕은 평생 갚지를 못할 겁니다. 그때에 2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당신의 은덕과 사랑은 제겐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혹시 <교회에 다녀주는 것>으로 다 됐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분의 죽으심과 고난, 피흘림에 대해 <교회에 해만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혹 있지 않습니까?

오해 말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는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내 인격과 사랑을 담은 최선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절대평가로 우리를 재지 않으시고, 상대평가로 보시니 그것도 참 은혜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많은 재물보다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과부의 두 렙돈이 칭찬 들은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성도들의 감사를 절대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령 1억원짜리 집을 사서 입주하신 가정에서 감사헌금을 드릴 때에 1만원 헌금을 드리면서 “이 귀한 집을 하나님께서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동의가 안됩니다. 둘 중의 하나이라 생각합니다. 이 집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 아닌 것이라 생각하는 것 하나와, 집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밖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너무 속물 목사라서 그런 걸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 때문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보여준 행동이 나옵니다.
많이 견디는 것, 환난, 궁핍, 고난, 매맞음, 갇힘, 요란한 것,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 위해, 그분이 내게 주신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지 않기 위해 보여준 그 삶의 내역들입니다.

■ 은혜의 가장 갚진 보답 - 자천하는 마음으로!

앞서 말한 이 모든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 있기만해도 하나님께서 정말 칭찬할만한 우리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것들 위에 한가지 더 얹기만하면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천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as servants of God we commend ourselves in every way

여기서 commend 라는 단어는 칭찬하다 추천하다 맡기다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만, 한글성경은 이 단어의 의미를 <추천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서 commend ourselves를 자천(自薦), 즉 스스로 천거한다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의 해석은, 이렇게 상상해 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종이 될래?... 하면서 물을 때에 서로가 “저 사람이요~” “쟤가 하면 좋을 것 같아요~”하면서 서로가 미룹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내가 종이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자기 스스로를 천거했습니다.
그래서 그 종은 스스로가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금 언급한대로 종이 겪어야 할 것들을 겪습니다. 많이 견디는 것, 환난, 궁핍, 고난, 매맞음, 갇힘, 요란한 것,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
이런 고생도 했지만 또 그렇게 종으로 자천한 사람은, 깨끗함, 지식, 오래 참음, 자비함, 성령의 감화, 거짓이 없는 사랑,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소양을 갈고 닦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종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가 하나도 아깝지 않고, 아들 예수님의 희생이 빛나는 가치로 돌아오는 것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속장님들을 세우기 위해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 중에 한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 원칙으로 인해서 다른 것들이 흔들리더라도 하나님, 이런 성령의 원칙들이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제게 성도들을 은혜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벧전 5:2)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십시오. 그들을 잘 감독하십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박해석 님의 '기쁜 마음으로...'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너희 살을 떡처럼, 떼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너희 피를 한잔 포도주처럼 찰찰 넘치게 따르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조그만 틈을 벌려 주는 것,
조금씩 움직여 작은 곁을 내어 주는 것,
기쁜 마음으로...

■ 은혜를 누리며 모든 것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들인 오천교회 가족 여러분,
자원하여 머슴이 되기로, 종이 되기로 작정하여 희생의 삶으로 스스로를 결박지어 내어 놓은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저는 큰상을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큰 명예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단지 오늘의 말씀에 약속하신대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 밖에는 여러분에게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희생의 자리에 스스로 서신 분들이여!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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