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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울 힘이 없는 인생 (삼하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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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목사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던지, 자기의 위치에 어울리는 일을 하려고 고민하고 노력합니다. 대통령이 되면, 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대통령 재직시에 무언가 업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의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무리하게 경제적 정책도 할 수 있고, 외교정책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노래 부르면 붙잡아다가 패고,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장을 잡아다가 안기부에서 고문하고, 이제는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이 의용군인이 되고,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가 이제는 온 땅에 가득차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어떤 직책에 있을 때 뭔가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심정에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도 누가 어느 자리에 있었을 때 무엇을 할까? 소위 Doing 무엇을 했느냐? 하는 일에 우리는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을 했느냐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그렇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결국 그 말은 조금 유식하게 이야기하면 됨됨이, Being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지요. Doing 무엇을 했느냐?에 의해서 그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Being,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내적인,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평가하고 또 칭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와 마르다에 의해서 마르다는 열심히 무언가 일을 하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앞에서 말씀을 듣는 거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것을 보면서 마르다가 짜증을 냈습니다. 너 말씀을 듣기보다 와서 이 일 좀 도와야 하지 않느냐? 라고 이야기 하지만 우리 주님은 놀랍게도 마리아가 훨씬 좋은 편을 선택했다. 우리 주님도 Doing보다는 Being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열 두 지파 중에 외형적으로는 열 지파를 인도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자기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자기와 충돌해서 갈등을 느끼고는 이스보셋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자기가 실권을 가졌지만 이스보셋왕이 호락호락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자기의 북왕국 이스라엘 그 땅과 모든 권리를 남왕국 왕으로 있는 다윗에게 넘겨야 되겠다. 그냥 넘기는 것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서 나의 지분, 나의 기득권을 차지해야 되겠다. 밀사를 보내고 자신이 직접 찾아가서 계획을 하고, 의논을 하고, 돌아오는 중에 통일이 되었을 때 자기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런 내용을 우리는 지난 주에 보았습니다.

허수아비이기는 했지만, 군대장관 덕분에 왕노릇을 하고 있던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손에 맥이 풀렸다. 그렇게 1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이스라엘 정국이 아주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어요. 그러는 중에 사울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 지금 이스보셋이 사울의 넷째아들이니까 계속 베냐민 지파가 왕을 하고 있는데, 같은 지역, 같은 지파 사람입니다.

처음에 어떤 일을 위해서는 같은 지파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좋을 때에는 서로 도움이 되었어요. 무슨 예를 들면, 충남 향우회, 호남 향우회, 영남향우회, 좋은 때는 같은 지역, 같은 동네라고 하는 것만 가지고도 서로 무엇을 도와주고, 서로 힘이 되어 주지만 어떤 결정적인 이해관계가 들어서면, 서로 원수가 되는 경우들이 있지요.

같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지만, 지금 무정부 상태가 되면서 두 장수 바아나와 레갑이라고 하는 형제장수가 생각하기를 머리를 빨리 굴렸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빨리 정세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지금 무정부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왕국 유다의 왕인 다윗에게 점수를 따는 일인데, 그 일이 무얼까?

지금 허수아비 왕의 무정부상태인 이스라엘의 왕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베어서 다윗에게 바치면 우리는 일등공신이 되지 않을까? 가만히 있어도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은 저절로 다윗에게로 갈 터인데, 그냥 가기 전에 그래도 우리 때문에 북왕국인 당신의 나라가 되었다고 하는 그 공로를 한 번 챙겨보자. 이 형제 장수는 그 생각으로 바빴습니다.

그리고 왕의 궁궐을 찾아갔습니다. 경호원들이 많이 있었겠지요? 밀을 가지고 온다고 하고왕이 누워있는 침상에까지 다가갔습니다. 왕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칼로 그 배를 찌르고, 도망을 쳤다가 다시 와서 왕의 목을 베고서 그 벤 목을 가지고 밤새도록 사해 주변 길로 다녀서 헤브론 다윗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이스보셋, 북왕국 이스라엘왕의 머리를 갔다가 바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왕의 생명을 해하던 원수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의 원수를 자손에까지 갚으셨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왕의 원수를 갚게 했습니다. 우리가 공로자가 아닙니까? 일등공신 아닙니까? 이것이 이 두 장군이 왕의 목을 베어서 배반하고 다윗에게로 온 명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명분을 대의명분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명분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 바아나와 레갑이라고 하는 형제 장수가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가지고 온 것은 다윗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무너져가는, 쓰러져가는 국가에서 무언가 자기의 기득권과 이해를 챙기려고 하는 욕심에서 비롯됐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동안에 대의명분을 내세워서 명분은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사실 속마음은 다른 어떤 욕심 때문에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하셨지요? 목사님, 제가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분입니다. 속마음의 진정한 이유가 다른 것이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까?

저는 사무엘상부터 사무엘하까지 오면서 중심적인 인물이 다윗인데, 저는 이 강해설교를 준비할수록 계속 이 다윗에게 깊이깊이 빠져들어요.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약 그 채를 가지고 그의 삶을 채를 친다고 하면 왠만한 것들은 다 구멍으로 빠져나간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남는 다윗이라고 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앞에서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면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도 포기할 줄 아는 사람, 참 어려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하나님 조금 가만히 계세요. 좀 눈 한 번 찔끔 받고 계세요.’ 몇 천만원, 몇 억이 그냥 떨어지는데, 그러는 사람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 마음 속에 손을 한 번 대고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의 이익을 대해서 살아오고, 필요할 때만 여러분 보내지 않았습니까? 오늘 다윗은 정말 놀라운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정말 유익된 일이 다가오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지 않는 일이면 그는 행하지 않았고,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레갑과 바아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 날 잘 모르나봐? 그 전에 사울왕이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과 싸워 전쟁을 벌이다가 군사를 다 잃고 마지막 기병대가 막 다가오는 순간에 더 이상 안 되겠다. 하나님의 자녀가 할례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내가 죽지.

자결을 하는 그 상황에서 아말렉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 사실은 자기가 죽인 것도 아니지만 전쟁터에서 약탈하려고 다니던 그런 비류들이었는데 스토리를 꾸며서 왕을 내가 죽이고, 다윗왕의 원수였던 사울왕을 죽이고, 그 왕관을 내가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공로자 아닙니까? 내가 좀 대우해 주세요. 라고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왔을 때 다윗이 어찌 네가 하나님이 심판해야 할 일을 네가 했다고 하느냐? 어찌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네가 함부로 손을 대느냐? 아말렉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였어요. 사울이 죽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네가 어찌하여 11절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네가 네 욕심을 가지고 기울어진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보상을 받으려는 그런 욕심을 가지고 네게로 왔다고 내가 기뻐할 줄 알았느냐? 내가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사람이 섭섭할 때가 있지요? 몰라줄 때 무슨 오해가 있어요. 속상합니다. 이렇게 나를 모르나? 적어도 몇 년을 나하고 신앙생활을 했으면 알텐데... 눈만 봐도 알텐데... 왜 모릅니까? 욕심이 자기의 생각을 지배하면 몰라지지요. 흐려지지요.

이 바아나와 레갑이 다윗을 정말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욕심이 가득해 지면서 바로 다윗을 볼 수 없었어요. 이 목을 가지고 가면 다윗도 상을 줄 것이다. 그들의 욕심이 다윗의 의로움을 가리워 버렸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결코 기회주의자였던 레갑과 바아나 두 장수의 수고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때때로 승리를 위해서, 축복을 위해서 우리는 인위적으로 애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위적으로 승리하려고 하고, 응답받으려고 우리는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인 줄 믿습니다.

영국 브리스톨은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은혜받고 거듭난 이후에 처음으로 사역을 시작한 곳입니다. 또 브리스톨은 기도의 사람 조지 뮐러라고 하는 분이 고아들을 데려다가 고아원을 시작한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영국 사회는 수없이 많은 아이들을, 사생아들을 내어다 버렸습니다. 그 아이들을 조지뮐러가 다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그 브리스톨 고아원 했던 곳에 가 보았는데, 지금은 도심지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과거에는 아주 시에서 먼 외곽지역이었어요. 거기에 허름한 곳에 고아원을 짓고, 버려진 어린 아이들을 모아다가 빵을 구해서 먹이고, 그들의 삶의 자리를 제공하고, 그러면서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어요. 어느 날 조지 뮐러는 아이들을 식탁에 다 불러앉혀는데, 그 날은 아이들에게 줄 빵이 없어요. 먹을 것이 없지만, 전부 아이들을 나무식탁에 다 불러 앉혀놓고, 우리 기도하자. 감사기도하자. 아이들 생각에 감사기도 하려면 음식이 있어야 하는데, 빵이 있어야 하는데, 그 날은 빵을 배급하지 못하고, 빈 식탁에서 조지 뮐러는 아이들 앞에 감사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비록 빵은 없지만, 우리에게 건강을 주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비록 빵은 없지만, 생명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 밖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브리스톨의 유명한 빵집에서 빵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이 이웃동네의 부자가 빵을 주문해서 수레에 가득 새로 만든 빵을 실고서 그 고아원 앞길로 지나가는데, 비가 자주 오는 영국에서 포장이 되지 않은 진흙길 때문에 수레가 한 쪽 바퀴가 빠졌어요.

예비된 바퀴도 없고, 지금 시간을 맞추어서 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약속된 시간에 그 빵을 배달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큰 낭패구나. 그리고서는 좌절하고 있는데, 그 사람 눈에 고아원이 들어왔어요. 사실은 그 사람도 동네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고아들을 데려다가 그 아이들을 잘 양육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조금 좋은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만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수레 바퀴가 빠지면서 배달을 할 수 없게된 빵을 내가 그럼 고아원에 가져다 줘야 되겠다. 그러면서 고아원을 들어갔어요.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데, 그 두드리는 시기가 언제냐 하면 지금 식탁에 아무 것도 놓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시간이었어요. 조지 뮐러가 감사기도를 마치고서 나가보니까 여기는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나가보니까 한 신사가 자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요. 지금 방금 만든 고급빵을 저 이웃동네 부자에게 배달을 하다가 지금 당신네 고아원 앞에서 수레 바퀴가 빠져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는데, 이 빵을 내가 고아원에게라도 주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조지뮐러는 하나님께 여호와 이레로 감사한 줄 믿습니다.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고급빵을 그날 아이들은 아낌없이 물론 그 아이들 중에는 빵이 없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불평한 아이들도 있었겠지요. 빵도 없는데 감사기도야? 감사할 것이 있어야 감사하지. 이런 아이들도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도자지요. 리더라고 하는 것은 그럴 때 그런 사람들을 끌고 갈 수 있는 리더쉽, Spiritual Power가 필요한 것입니다.

불평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두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안고 가는 것입니다. 유능한 가이드는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조금만 올라오면 됩니다. 여러분, 산 올라갈 때 제일 고마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까마득하게 멀어요. 얼마나 남았어요?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다 왔어요. 조금만 올라가면 되요. 그러면 힘이 나잖아요. 아휴, 지금 올라가면 어려운데요. 그러면 맥이 쫙 빠지지요.

제가 한라산 올라갈 때도 4- 5시간 걸리는 것을 그냥 뻔히 알지만 물어보지요. 힘들다는 거지요. 얼마나 남은 것 같아요? 다 온 것 같아요. 조금만 올라가면 되요. 힘 내세요. 그러면 힘이 나요. 어휴, 절반도 못 왔는데, 언제 올라가려고 그래요. 이러면 맥이 풀리잖아요. 지도자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입니다.

지금 식탁에 아무 것도 없지만 우리가 감사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여러분의 감사의 기도는 여러분의 식탁이 풍성할 때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닌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조지뮐러는 기도의 사람이라고 하지요? 기도의 아버지라고 하고, 고아의 아버지라고도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기도하고 돌아서서 3분이 지나도 그 마음의 확신이 있다면 그 기도는 응답받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 놓고, 돌아서서는 그 기도의 확신과는 관계없이 또 옛생활로 돌아가는 거예요.

교회에서 기도한 것 따로, 세상 나가서 근심 따로, 3분을 못 넘긴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는 우리가 기도하고 3분이 지나도 확신이 있다면 그 기도는 응답될 수 있는 기도라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죠.

인위적으로 응답을 하려고 하는 그런 우리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응답을 사모하고 기다릴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레갑과 바아나는 기회주의적인 그런 자세를 가졌습니다. 지금 어떻게 주판을 튕겨야, 어떻게 계산기를 두드려야 내게 유익한가 하고 계산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해야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점수를 따지 않겠느냐? 그는 Doing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사람 됨됨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차라리 그가 그 왕을 중심해서 이제 흐트러지고, 연약하고, 혼란스러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오히려 다윗이 그 장수들을 귀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야, 이 어려운 때에 그래도 저 사람들은 쓸 만 하구나.’

시편 46편 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난 큰 도움이시라. 시편 기자는 또 고백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순간, 건강이라는 도움이 필요하고, 물질이라고 하는 도움이 필요하고, 성공이라는 도움이 필요할 때 여러분들은 어디에, 여러분들의 도움을 구하시겠습니까?

사람을 많이 아는 것도 도움 중에 도움이지요. 우리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 교회 구청에 건축과에 다니는 공무원이 있어가지고, 교회를 건축하는데 걱정 근심이 없대요. 자기가 설계부터, 시공부터, 구청에 허가 받는 것까지 알아서 다 하니까 걱정이 없대요. 야, 우리 구청 직원이 있으니까 참 좋네.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 사회생활 할 때에 도움이 됩니까? 병원 한 번 입원해 보려고 하면 얼마나 병실 하나 얻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여러분, 정사파이야 권사님한테 전화 한 번 하면 그 날로 들어가서 입원할 수 있잖아요. 여러분 고맙다고 음료수 사 드립니까? 고마워서 어떻게 하지. 하면서 입으로만 하지 않아요? 여러분 치료 다 받고 나올 때 그래도 음료수 박스 하나 해서 그 간호사들 있는 병동에 나눠들 드시라고 최소한의 인사는 하십니까? 그런건 뇌물이 아니예요. 기본적인 우리의 매너입니다.

사람을 알면 도움이 됩니다. 얼마나 도움이 되고, 말고요. 사람들은 또 이야기합니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뭐가 있어? 돈을 사람을 사서 까지, 제가 가끔 길을 지나다 보면 늘씬하게 생긴 아가씨들이 아마 키가 1m70cm는 넘을 것 같고, 짧은 치마 입고, 그 부츠는 그 긴 것을 신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서는 막 춤을 추어댑니다. 아르바이트 중에는 그게 최고라면서요? 맥도날드에서는 1300원 받아도, 그거 하면 10000이 넘는다면서요. 춤도 잘 춰야 하고, 인물도 좋아야 하고, 키도 커야 하고, 아마 우리 청년들 중에도 그런 아르바이트 하는 청년이 있는 줄 모르겠어요.

내가 어떤 목사님이 지나가다가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내 생각에는 저 아이들 얼굴에는 기쁨이 없어, 이번에 온양에서 선교사 대회에서 하는데, 그 앞에서도 큰 점포가 오픈해서 그 아가씨들이 춤을 추면서 난리를 춰요. 가만히 제가 그 아가씨들 얼굴을 봤어요. 춤을 잘 추는가를 본 것이 아니라 그 아가씨들의 얼굴을 봤어요. 전혀 기쁨은 없어요. 왜 그래요? 자기는 돈 받은 만큼만 춤을 춰주면 되니까 기뻐서 추는 것이 아닙니다. 춤은 기뻐서 추어야 하는데, 돈을 받은 만큼만 추는 거지요.

그 사람이 만약에 오늘까지 돈을 받기로 했으면 내일 거기가서 춤을 출까요? 내일 가서 춤을 추면 그 여자는 정신 나간 여자지요. 돈으로 사람을 춤을 추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기쁨까지 살 수는 없지요?

이런 저런 것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지는 않아요. 우리의 육신에 편리함은 줄 수 있습니다. 이틀 기다릴 것, 하루 기다리고, 열 시간 기다릴 것 한 시간 기다리게 하고, 우리에게 편리를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는 않아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많은 기회를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느라고 시간 쓰고, 물질 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까? 그러고도 빨리 회개하고 돌아오면 좋은데, 70, 80 되고나서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외로워 그제야 손들고 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 내 식탁에 빵이 없어도 저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삶에 넉넉함이 없어도 저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인해서, 물질로 인해서,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저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기뻐하라.

레갑과 바아나와 같이 약삭빠른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성공과 출세의 지름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레갑과 바아나와 같은 인생은 여기서 끝내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것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분명한 영적 자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심령을 가지고, 오늘도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새벽은 모든 사람이 포기하는 시각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고,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릅니다. 언제까지 새벽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저는 개척교회 하는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그 고난의 현장을 다 겪었지만, 그 하나님이 잡아주시는 그 시간까지 낙심하지 마세요. 안 되네. 보따리 싸고 다른 데 가서 또 이름 바꾸고, 또 새로운 아파트 가서 시작하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교회를 나오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도 잠재적인 교인입니다. 그들이 불꽃 같은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성도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나도 언젠가 예수 믿으면 저 교회 가야지. 잠재적인 교인이 무서운 거예요.

저는 이 동네에서 5년, 10년, 20년 오래 살 던 분이 어느날 교회 등록했다고 그러면 저는 뛸 듯이 기쁩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서 22년을 있는 동안에 그들이 계속해서 우리교회가 조립식 때에도 보았고, 우리교회가 어려울 때부터 다 지켜보면서 그래, 내가 언젠가 교회 가면 저 교회를 간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결단을 하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여기 있을 이유가 있었구나.

기다려야 합니다. 신앙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때까지,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도우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 환난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환란 중에 주님이 도우실 그 손길을 신뢰하기를 원합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를 기다리게 하시고, 인위적으로 성공하며 출세하며 이해타산을 따지는 그러한 연약한 저희들 되지 아니하도록 주님 저희들의 신앙의 길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를 도우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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