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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전도회 헌신예배] 끝까지 헌신합시다 (딤후 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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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섭 목사

오늘 하나님 앞에 헌신예배를 드리는 남 선교회 회원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님이 주시는 헌신의 기쁨과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 세상에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누가 아내를 제일 사랑했는가’라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각 나라의 대통령들이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동메달은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아내의, 아내에 의한, 아내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은메달은 케네디 대통령이었습니다. ‘아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아내를 위하여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금메달은 박정희 대통령이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땅에 어떠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세상적인 학문과 막강한 지위를 가지고 잔인하리만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은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드리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수많은 핍박과 환난을 겪으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결국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에게 삶은 자유를 주어서 늙고 병든 바울은 수종 드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 속에 있는 바울 곁에는 모두 다 떠나버리고 누가만이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목회 생활을 하다보면 오래도록 함께 있어 기쁨을 주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목회자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훌쩍 떠나는 성도들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데마와 마가, 누가의 신앙을 통하여 소중한 교훈과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 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데마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데마는 과거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힐 정도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골 4:14에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었고 복음을 위해서 환난을 받았던 자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가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항해 떠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바울과 뜻을 같이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라는 말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소망보다는 이 세상의 쾌락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위해 그토록 헌신했던 사도 바울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저렇게 헌신한 사람을 이토록 옥에 갇히고 비참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내가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이렇게 헌신하고 봉사했다는 교만한 마음이 세상을 좇아가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봉사하지 않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봉사요 헌신이라면 누구든지 데마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2: 12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 이름으로 해야 하고 그 분의 은혜를 힘입어 감당한다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립니다.

몇 해 전 아프리카 케냐에 가서 주일예배를 인도한 후 마사이 부족이 사는 소똥집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습니다. 마사이 부족이 소똥으로 집을 짓는 이유가 있습니다. 집을 지을 마땅한 재료도 없고 마사이 족의 남자는 스스로 용사라 자칭하여 사냥 외에는 집안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집을 지으려니 여자가 지을 정도 크기의 집을 짓는데 소똥이 따뜻할 때 흙과 섞어서 짓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똥을 연료로 쓰는데 밥을 짓고 차를 끓일 때도 소똥을 태워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소똥을 태울 때 나는 냄새가 벌레나 짐승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시이 부족들은 소똥을 몸에 바르고 다니기도 하는데 그래야 뱀에 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 얼마나 예수냄새를 풍기며 사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믿음 좋은 청년이 영등포의 한 뒷골목에서 길을 가다가 직업여성들의 손에 붙들려 유혹을 받게 되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했더니 얼른 손을 놓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주의 종 바울과 함께 고난을 함께 하여 충성했던 데마가 한 순간에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것은 그에게서 예수의 냄새가 떠나고 세상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여자분들에 비해 일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합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이런 욕구들 때문에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해서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 부름 받은 자들로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사랑하며 끝까지 충성하는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마가는 주의 일에 매우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에 꼭 마가를 데리고 오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를 그처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마가가 참으로 훌륭한 헌신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가에게서 은혜를 받는 것은 그가 과거 바울과 함께 한 1차 전도여행 때에 속을 썩여서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행 15:39) 1차 전도여행에서 모두가 외로움과 고독과 고난과 싸울 때 혼자 뒤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뉘우치고 과거의 이런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훌륭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1차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마가도 함께 옥중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 4:10 에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며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라고 했습니다. 벧전 5:13 에 보면 베드로도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전도여행을 하면서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바울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던 마가였지만 이제는 바울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복음에 유익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중에 교인들에게 졸음이 오는 것 같아서 천국 갈 사람 일어서라고 했더니 술주정뱅이 교인을빼고는 다 일어섰습니다. 다시 앉은 다음에 지옥 갈 사람 일어서라고 했더니 술주정뱅이가 일어섰는데 혼자 서 있기가 멋쩍으니까 ‘제가 무슨 일로 일어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와 목사님 두 사람만 서 있는군요.’라고 했다 고합니다.

1차 전도여행 때 실망시켜 2차 전도여행 때에는 필요치 않았던 마가가 이제는 바울에게 꼭 필요한 동역자, 주의 일에 매우 유익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마가처럼 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서 유익한 자로 헌신하며 살아가는 훌륭한 남 선교회 회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끝까지 충성했던 누가입니다.

바울에게 분신같이 있으면서 바울을 도왔던 의사 누가가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사는 유망한 직업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포기하고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함께 동행했습니다. 사도행전 곳곳에 보면 누가가 바울을 극진히 수종 들면서 함께 했던 흔적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누가는 우리라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이 공적을 자랑하거나 이름을 드러내며 생색을 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여러분은 느낄 것입니다. 세월이 바뀌고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이 교회를 섬기고 목회자와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는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바울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노라’ 숱한 고난 속에서도 낙망치 않고 바울의 위로자가 되어주었고 모든 수고를 감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속적인 영광을 다 버리고 오직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고 바울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굶고 헐벗은 누가였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일꾼입니다. 정말 함께 하고픈 일꾼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충성스러운 누가가 되시기 바랍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두 번 잘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자기자리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둑을 엄청 좋아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에는 설교 준비를 마치기가 무섭게 맞수인 장로님을 목사관으로 초청해서 밤이 늦도록 바둑을 두셨습니다. 그 주일날도 지난 밤에 장로님과 함께 밤이 늦도록 수고하였지만 별로 이기지도 목하고 강단에 서셨습니다. 그런데 밤늦도록 바둑을 두느라 성령 충만은 고사하고 피곤과 졸리움만이 충만하였습니다. 또 바둑을 지게 된 실수가 머리에 떠올라 설교하기가 영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날따라 할머니들이 많이 나오셔서 강단에서 내려다보니까 성도들의 머리가 검은 돌과 흰 돌로 보여서 애를 먹었습니다. 겨우겨우 설교를 끝내고 축도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내주 교통하심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있을지어다 .아다리’라고 했답니다. 실컷 웃어보라고 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교회 남 선교회 회원 여러분은 제가 밤늦도록 바둑이나 장기 두자고 하면 예배 준비 하도록 빨리 져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사명을 저버리고 떠났던 데마와 같은 분들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한 번 실패했다 할지라도 마가와 같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꼭 필요한 자로, 유익한 자로 훌륭하게 재기하는 역사가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누가와 같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고난과 아픔을 함께 하며 주님과 함께, 교회와 함께, 주의 종과 함께 수고하는 좋은 헌신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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