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위대한 조연배우(4)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 (수 14:6-15)

  • 잡초 잡초
  • 944
  • 0

첨부 1


사고방식의 차이

신발회사에서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시장조사를 위해 두 명의 직원을 파견했습니다. 얼마 후 두 사람으로부터 각각 팩스가 도착했습니다. A라는 직원이 보낸 팩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능성 0%,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맨발로 다니며 아무도 신발 같은 것은 신지 않습니다. 괜히 헛수고했음.” 그런데 B라는 직원에게서는 전혀 다른 내용의 팩스가 도착했습니다. “가능성 100%, 이곳에서는 신발이 하나도 없고 신발을 파는 사람도 아예 없음. 거저먹을 수 있는 기회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이 일을 함에 있어 어떤 사고방식,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해봐야 소용없다’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그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은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고 조건이 나빠도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해봐야 소용없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안 될 것만 생각합니다. 그 눈에는 나쁜 조건, 온갖 안 될 이유만 보입니다. 그러니 될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사람이 어떤 사고방식,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일의 성패가 좌우되는 경우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주연급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어떤 일을 하던지 앞장서서 일을 주도하고 중심에 서서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전자, 즉 아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 박사의 유명한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중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가진 첫 번째 습관이 바로 ‘주도적이 되라’입니다. 그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주도적인 입장에서 일을 이끌어가고 늘 능동적,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더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들은 주역이 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2류 내지 3류 급에 해당되는 사람들, 늘 주연은 하지 못하고 조연이나 엑스트라로만 끝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슨 일을 하든지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주연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과 실패의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런 원리와는 전혀 반대 되는, 예외가 되는 사람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분명 조연급입니다. 그러니까 이 “위대한 조연배우” 시리즈에 등장하는 것이겠지요. 이 사람은 결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듀엣처럼 늘 다른 한 사람과 함께 등장하는데 이 파트너는 아주 유명해져서 나중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이끌어가는 리더가 됩니다. 이 파트너는 바로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정복하고 분배하는 일까지 훌륭하게 마친 여호수아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라는 파트너에 비해 이 조연은 이름도 잘 안 나오고 화려하지도 않고 주목 받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분명히 조연급 배우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부분의 조연급이 아주 소극적으로 부정적인 자세를 가지기 쉬운 반면 이 사람은 절대 소극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수아보다, 그 어떤 성경의 주연배우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성경의 가장 적극적인 사람, 가장 능동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바로 ‘갈렙’이라는 사람입니다. 분명 파트너인 여호수아에 비해 이 갈렙은 조연급입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 제목에 나온 것처럼 이 갈렙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말로 대표되는 가장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입니다.




내 이름은 갈렙

그러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갈렙이 성경에 나오는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가? 무엇보다도 갈렙은 아무리 환경이 안 좋고 조건이 나빠도 그것을 능히 극복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먼저 이 갈렙은 부정적인 운명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우선 이 갈렙이라는 사람의 이름부터가 참 특이한데 그 이름의 뜻은 히브리말로 ‘개’ 혹은 ‘종’입니다. 우리말로 치면 박 강아지, 김 개똥이, 혹은 이 마당쇠쯤 됩니다. 세상에 누가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개’라고 짓거나 ‘종놈’이라고 짓겠습니까? 성경에 안 나와 있으니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이 갈렙이 태어날 때부터 그리 축복 받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13장 6절에 보면 갈렙은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로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 보낸 열 두 정탐군 중 한 사람입니다. 유다 지파라면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지파이므로 출신도 좋은 사람이고 게다가 13장 2절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을 정탐할 사람 열둘을 뽑을 때 아무나 뽑지 않고 각 지파 중 한 사람씩, 족장 된 자 중에 보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갈렙은 유다지파 중에서도 족장급에 해당되는 꽤 신분이 높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왜 이렇게 출신이나 신분이 좋은 사람인데 이름을 ‘개’나 ‘종’으로 지은 것일까요? 그저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어쩌면 아버지 여분네가 원치 않던 아들이 태어나 그 이름을 함부로 지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어려서 자주 듣던 말이 있습니다. 제가 4형제인데 어머니는 위의 형 셋을 낳고는 이제 자식은 그만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들딸 불문하고 넷째를 낳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어느 날 몸이 좀 안 좋아 병원에 가보니 벌써 임신 4~5개월이 지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낳은 것이 저라나요? 어쩌면 갈렙도 별로 원치 않던 자녀를 낳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태어날 때 유난히도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태어나서 붙은 이름일까요? 아무튼 분명히 그 이름을 ‘개’나 ‘종’이라고 지었으니 운명론적으로 따진다면 이 갈렙은 천상 남의 밑에서 종노릇이나 하든지, 남의 충실한 개 노릇이나 할 사람으로 타고 난 셈입니다. 우리가 자녀들 이름 지을 때 이 아이가 나중에 큰 사람 되기 원하면 큰 대(大) 자를 붙이고, 부자 되기 원하면 부유할 부(富)자를 붙이지 않습니까? 사람이 꼭 이름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사람의 이름은 잘못하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갈렙은 결코 이 이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름대로만 한다면 남의 개나 될 운명이요, 종놈이나 될 운명으로 천박하게 끝날 수 있던 인생이 갈렙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개로 종으로 살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는 그 이름을 극복했다기보다 오히려 이름을 신앙적으로 승화시켜 종은 종이로되 다른 사람을 위한 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종으로, 개는 개로되 남을 위한 충직한 개 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처럼 궂은 일 도맡아 하고, 죽도록 충성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분들도 참 잘 드시지만 가끔 멍멍탕을 앞에 놓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개는 살아서는 주인을 위해 충직하게 봉사하다가 죽어서도 이렇게 사람의 배를 채우고 영양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는구나.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충직한 사람을 개로 비유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개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도 태어날 때부터 정말 절망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집안은 지지리도 가난하고 천하고, 그래서 학력도 남들만큼 못하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외모가 잘 생겨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머리가 좋게 태어난 것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재주나 능력도 타고난 것이 없습니다. 자, 이럴 때 우리는 대개 절망하기 쉽습니다. 내 운명이 원래 이런 모양이다라고 말입니다. 타고난 운명이 나를 슬프게 하고 나를 절망하게 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럴 때 운명론에 빠진다면, 그래서 왜 나는 남처럼 타고난 것이 하나도 없느냐고 나는 왜 남처럼 아무 능력도 없냐고 부모를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정말 가능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일지라도 자세만 바르게 가지면 분명히 그 삶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인물 중에, 또 영적인 위대한 인물들 중에도 본디 타고난 조건이 너무 좋아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오히려 그 운명을 극복하고, 그 상황을 딛고 일어나게 되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갈렙처럼 내 삶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바꾸어 놓게 되면 그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정탐군 갈렙, 정복자 갈렙

갈렙이 조건과 환경을 극복한 적극적인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은 민수기 13장에 나온 열두 정탐군 이야기에도 잘 나옵니다. 오늘의 주인공 갈렙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도 바로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위해 보낸 열두 정탐군 이야기인데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이 열두 정탐군들의 의견이 정확하게 10대 2로 나누어 진 것입니다. 절대 다수인 열 명의 정탐군은 뭐라고 보고합니까? 31~33절에 나옵니다.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한 마디로 우리는 그들과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 서면 메뚜기 같아서 절대 못 이기니까 아예 올라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소극적 자세, 부정적 태도, 불신앙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자세와 신앙을 우리는 ‘메뚜기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했지요?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14장에 보면 밤새도록 울고 곡을 하다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아예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절대 소수인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들과 전혀 다른 보고를 합니다. 민수기 14장 6~9절을 봅시다.

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여호수아와 갈렙의 눈은 분명히 나머지 열 명의 정탐군과 달랐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믿었고 그들이 아무리 강하고 크더라도 우리의 밥이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눈이 다릅니다. 관점이 다르고 자세가 다릅니다. 특히 13:30에는 두 사람 중에서 갈렙이 혼자 한 말이 나옵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갈렙이 얼마나 적극적인 신앙과 자세를 가진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적극적이고 무작정 하자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주장한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 중에 근거도 없이 고집 부리며 무조건 하자고만 외치고 무조건 적극적이기만 하면 좋은 줄 아는 분들이 있는데 아닙니다. 근거가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근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 14장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땅을 분배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정복한 요단 서쪽 땅을 제비 뽑아 이미 요단 동편에서 땅을 분배 받은 르우벤,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과 반 지파에게 분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바로 이 때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등장합니다. 10절에 보면 갈렙은 이미 나이가 85세나 된 노인이었습니다. 모세가 갈렙을 가네스 바네아에서 정탐군으로 보낸 것이 그의 나이 40세 때 일인데 벌써 4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이렇게 노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85세짜리 노인이 하는 말을 좀 보십시오. 12절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이 말은 45년 전에 있었던 한 가지 약속을 근거로 한 말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고 나머지 열명의 말을 듣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떼를 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엄청난 벌을 내리시는데 그 내용이 출애굽 당시 이십 세를 넘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살아서 들어갈 수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벌입니다(민 14:29~30). 그런데 단 두 사람,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신앙과 자세에 대한 보상으로 살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갈렙은 여기에 한 가지의 복을 더 받는데 그것이 바로 24절에 나온대로 자신이 정탐했던 헤브론 산지를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갈렙은 지금 바로 이 45년 전에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는 45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번도 이 하나님의 약속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땅을 분배하고 있는 순간에 여호수아에게 찾아와 ‘이 산지’ 즉 헤브론 산지를 내게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10절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이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고 나를 45년 동안 더 생존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남이 볼 때는 나이가 늙었다고 하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틀림없이 이루실테니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아직 싸울 힘이 남아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확신과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산지가 그러면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냐? 절대 아닙니다. 다시 한번 12절을 보세요. “그것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라고 하는 것을 보니 아직 헤브론 산지는 완전히 점령되지 않았고 아직도 아낙 사람이라고 부르는 거인족들과 크고 견고한 성읍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으로 올라가 그들을 쳐서 정복하고 내 땅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갈렙을 가장 적극적인 신앙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렙의 적극적인 자세가 바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그의 힘있는 말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갈렙이야말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신앙을 가진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반드시 배우고 본받아야 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적극적인 조연배우

이제 마지막으로 조연배우로서의 갈렙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설교 첫머리에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갈렙과 여호수아는 언제나 함께 등장하는 파트너였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정탐군이 되어 가나안을 정탐하였으며 같은 목소리로 절대다수인 10명의 잘못된 보고에 맞섰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20세가 넘어 가나안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파트너 가운데 여호수아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역이 되었지만 갈렙은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갈렙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를 책임지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갈렙의 이름은 완전히 사라졌다가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 14장에 이르러서야 다시 등장합니다. 그동안 갈렙은 무엇을 했기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분명 갈렙은 은퇴를 하거나 숨어 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기간 동안 가장 앞장서서 싸웠을 것입니다. 비록 그 이름이 다시는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는 갈렙의 성품과 신앙적 자세를 근거로 분명히 그가 가나안 정복전쟁의 가장 전면에 서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왜 여호수아의 이름은 계속 나오는데 갈렙의 이름은 안 나온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조연의 사명을 생각해 봅니다. 조연은 자기가 할 역할을 다 마치면 사라져야 한다고 했지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보여준 모범처럼 말입니다. 자기 할 일 마치면 사라지는 것은 정말 잘 한 일입니다. 그래야 주연이 삽니다.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연설한 것처럼 갈렙은 이러한 조연이요 노병의 사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실천한 사람인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 친구와 파트너가 되어 언제나 중요한 일은 둘이 같이 하고 궂은일도 둘이 함께 도맡아 했는데 둘 가운데 내 파트너는 나중에 유명한 주연이 되었는데 나는 조연으로 끝났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이 들까요? 억울함? 원망? 섭섭함이나 질투? 하지만 갈렙은 이런 자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할일을 다 마치고 파트너가 주연을 하는 동안 조용히 뒤로 물러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한 가지, 조연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뒤로 물러나 있고 소극적이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조연은 사라졌다가도 자기 차례가 되면, 내가 나와서 연기를 해야 할 때가 되면 다시 나타나야 합니다. 그 때가 되면 가장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내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연이라고 해서 절대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면 안 됩니다. “그는 그고 나는 나다, 할 일이 다르고 분야가 다르다, 그의 일은 주연이고 나의 일은 조연이다”라고 인정하고 나는 나대로의 사명을 가장 잘,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연이 반드시 주연보다 못 나서, 능력이 없어서 조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를 보면 오히려 조연이 연기를 더 잘해야 합니다. 못 나서 조연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역할과 사명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연의 자리는 파트너에게 양보하되 내가 할 일을 찾으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며 가장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조건이나 환경이 있습니까? 그것이 나이입니까? 학력이나 가정환경입니까? 타고난 재능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 이런 것들은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조건은 하나님이 힘주시면 다 해결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에게 믿음과 적극적인 자세가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조건과 환경을 극복하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믿음으로 내게 맡겨진 사명을 능히 감당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설교/이하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