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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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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교부들 중에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소스톰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기를 "주님!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저를 이곳으로 보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기도하기를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같은 사람을 순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한 후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사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사형중지령이 내렸습니다. 그때 그는 또 기도하기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종에게 할 일이 남았으면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십시오"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 조건을 달고 감사합니다. 내게 이런 문제가 있었는데 해결해 주셔서 감사하고, 내게 이런 소원이 있어 기도했는데 응답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먼저 축복해 주시면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감사의 이면에는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다는 마음입니다. 내가 외형적으로 잘 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가 건강한 것은 감사할 수 있지만 병들면 감사할 수 없고,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면 감사하지만 내가 기도한대로 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다는 마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의 감사는 살아도 감사요, 죽어도 감사였습니다. 이러한 감사는 사도 바울에게 찾아 볼 수 있는 감사였습니다. 바울 역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자유를 얻어 감옥을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대로 순교의 제물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감사와 기쁨 대신 원망과 절망으로 매일매일을 보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기를 쓰고 바울을 괴롭히려는 사람들조차 있었습니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됨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과 교부 크리소스톰은 외부적인 환경의 변화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명의 청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가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에 바벨론 땅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들은 모두 유다의 귀족들이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중에 다니엘과 세명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네 사람은 모두 바벨론의 왕궁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고, 세 명의 친구들은 도지사가 되었습니다. 이방의 점령국에 포로로 잡혀간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의 한 도를 다스리는 방백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왕이 그들을 더욱 높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소위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성공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다 대통령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다 관직에 나아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고, 또한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명령이 무엇인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이었습니다(13-15절).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친구로 총리가 된 다니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멀리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총애를 받고 총리가 되고 방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벨론의 본토박이인 갈대아 사람들은 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들을 시기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는 낙성식 때에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상에게 절하며 섬기게 한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용광로에 던져 넣겠다는 조서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신상 앞에 엎드려 절했지만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았습니다. 자신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기회만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자신들이 고위 공직에서 쫓겨날 것을 알았고, 심지어 펄펄 끓는 용광로에 던져질 것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절할 수 없고 우상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소위 상황논리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아마 이쯤되면 어떤 사람은 그렇게 무모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저 적당히 머리를 숙여 자기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상황논리를 앞세워 적당히 타협해서 자리를 지켜 나라를 재건하고 하나님 신앙을 확산시키는 것이, 더 큰 애국이요 지혜로운 신앙생활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들은 체포되어 느부갓네살 왕의 앞에 끌려왔습니다. 단순히 하나님 한 분만을 믿는 신앙 때문에 촉망받던 도지사의 자리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래도 왕은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기에 그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쓰고 있음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나 여러분은 오늘날 어떤 자세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 속에 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임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애써 감추려 합니다. 일반 회사나 관공서에서 돼지 머리 놓고 고사를 지내면 믿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그런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냥 한 번 믿어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거는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로 그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다음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었습니다(16-17절).

본문을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당시 세계 최고의 왕으로 불리웠던 느부갓네살 왕과 당당히 맞서고 있습니다. 본문 16절과 17절을 다시 말하면 "왕이시여! 왕이 우리를 보고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을 섬기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설령 왕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용광로에 던지신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손에서도 우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웠던 느부갓네살 앞이었지만 조금도 위축되거나 비굴함이 없이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지금 어쩌다 한 번 객기를 부려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늘 이런 자세와 이런 모습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다니엘서 1장을 보면 그들이 처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왕궁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다니엘과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세 명의 친구들은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궁에서 하사하는 기름진 고기와 산해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금하고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신앙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지금의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들 말고도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 중에 왕궁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직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을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신앙적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도 방백이 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분이심을 액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펄펄 끓는 쇳물 속에서도, 추상같은 왕의 호령 앞에서도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대 제국 바벨론의 황제 앞에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삶을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직장의 상사가 입을 한 번 삐쭉이면 예수님의 '예'자도 못꺼내고, 친구가 한 번 눈을 흘기면 하나님의 '하'자도 못꺼내는 나약한 신앙인은 아닙니까? 주변에서 누가 하나님과 교회를 욕하는 소리만 들어도 주눅드는 신자는 아닙니까? 혹시 신앙 때문에 내 자리가 흔들릴까 염려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혹시 내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친구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세 청년은 고위공직보다도, 친구보다도 신앙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고 바로 믿을 때 담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브룩스 쿡이라는 목사님은 "당신의 계획을 믿음으로 세우라" 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미국 남부지방에 사는 어느 청년이 한겨울에 와이오밍에 사는 자기 친구를 방문한 일이 있었답니다. 날씨가 영상 5도 가량 올라간 어느날 오후에 둘은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꽁꽁 언 호수를 보고 그들은 차를 세워 놓고 호수를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와이오밍에 사는 친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호수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갔으나, 남부에서 온 친구는 조심스럽게 얼음 위를 걸으면서 호수 가운데로는 가지 못하고 호숫가에서만 서 있었습니다. 그것도 발끝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걸어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때 커다란 차소리에 그 친구가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 지방의 농부가 커다란 트랙터를 몰고 호수 한 가운데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발끝을 세우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농부가 트랙터를 타고 있는 그 똑같은 얼음판 위에 자신은 발 끝으로 서 있다니, 자신이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긴 것입니까? 그것은 그 지방의 농부는 호수의 얼음을 알고 있었고, 그 남부 청년은 모르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의지할만한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발끝으로만 맺고 있다고 그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그는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QT 운동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 히브리서 11:6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성숙한 신앙을 가졌습니다(18절).

앞에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보다 더 놀라운 사실을 18절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성숙하고 차원높은 믿음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조르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면 헌신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고쳐주시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사드락과 메삭고 아벳느고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왕이시여! 하나님은 우리를 풀무불 속에서나 왕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구해 주시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왕이 세운 우상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고, 죽으면 죽었지 우상에게 절하고 신앙의 절개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쯤 된다면 하나님도 방관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 죽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 테니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러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응답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응답하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이러한 믿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풀무불에 던져졌으나 구원을 받았습니다(19-27절).

이쯤되면 우리는 풀무불에 던져지지도 않고 해결되기를 바랍니다만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풀무불에 던져지지 않아야 응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풀무불에 들어가지 않고 살리는 것이 쉽습니까? 풀무불에 들어간 사람을 살리는 것이 쉽습니까?

본문을 보면 그들은 풀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평상시보다 7배나 뜨거워진 용광로에 던져졌습니다. 얼핏 보면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헛된 것 처럼 보입니다. 응답받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속에서 그들을 하나님은 살려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저와 여러분을 지켜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담대하고 놀라운 믿음을 가졌다고 환난을 당치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종래 풀무불에 던져진 것처럼, 그것도 평상시보다 일곱 배나 뜨거운 풀무에 던져진 것처럼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시며, 미래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았습니다(29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의 왕이었지만 느부갓네살은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를 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방 세계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분명한 믿음의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그들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셨습니다(30절).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을 거부하는 것은 망하는 길 같았지만 흥하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왕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죽는 길 같았지만 사는 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이러한 분명한 결단을 갖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곧 인생에 성공하는 길이요, 승리하는 길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릭 린드맨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위기를 당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위기를 당했던 사람들 중의 85%가 위기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나쁜 습관에 젖어 있던 사람이 그 습관을 버리게 되었고,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사람이 부부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위기를 겪음으로 시간과 물질을 절약하는 삶을 살게 되었고, 위기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위기를 두려워하지만 그 위기로 말미암아 정말 의미있는 삶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위기는 새로운 축복의 기회입니다.

위기의 때에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분명한 신앙의 결단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성숙한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일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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