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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요한 (눅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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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례요한
본문 : 누가복음 3:1~6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큰 자”와 “작은 자”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유명했다거나 높은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큰 자”라 인정된 자라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해서 헌금을 많이 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크게 힘을 쓴 자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큰 자”인가 하는 겁니다.

성경은 요한을 가리켜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눅1:15)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마11:1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세례요한이 어떻게 살았기에 “큰 자”라고 불리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세례요한을 “큰 자”로 만들었는지를 보면서 여러분 또한 하나님 앞에서 “큰 자”로 불림을 받기 원합니다. 

1. 빈들에서 임한 말씀

구약의 말라기와 신약의 복음서 사이에는 400년이라는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모세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없던 시기입니다. 늘 선지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0년의 침묵기는 암담하고 답답한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임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에게 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에서 임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빈들이라고 했지만 광야입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광야는 그리 살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모래 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벌판입니다. 바로 그곳에 있던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분과 장소에 상관없이 임하십니다.
성전에 거한다고 모두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일을 한다고 모두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성전에 있는 것,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성전에 있는 사람들이나 제사장들은 너무 부유했습니다. 마음으로도, 육신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부유해졌습니다. 이것은 곧 영적인 나태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갈급해 하지 않았습니다. 음성이 없어도 사는데 별로 지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다릅니다. 빈들에 있던 세례요한은 좌우를 둘러봐도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의지할만한 권력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고 갈급해 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살면서 먹었던 것은 메뚜기와 석청입니다. 요즘에야 웰빙 음식이지만, 그때에는 들판에서 얻을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세례요한은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마음이 청결해 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세상의 잡다한 음식과 생각으로 채워져 있으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을 청결케 하고, 심령이 가난해져야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2. 말씀의 능력을 입은 세례요한

누가복음 3장 1-2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세례요한의 출생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한 사람의 황제와 한 사람의 총독, 세 사람의 분봉 왕과 두 사람의 대제사장의 이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온 세상의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언급된 것입니다. 디베료 가이사는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유대인들에게 호적 조사를 강요한 황제이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유대인에게 넘겨준 자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이고, 빌립은 세례요한의 목을 베라는 살로메와 결혼한 사람입니다.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을 돈으로 매수하여 대제사장이 된 사람이고,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이며 예수님을 체포하여 심문한 자입니다.

이들 모두는 사회 지도층에 있었습니다. 재산도 많았고 부귀영화도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들은 보잘것없는 “작은 자”였습니다. 세상에서는 유명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작은 자”와 같았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들을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의지하다보니 하나님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반대로 세례요한은 너무나도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7명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세례요한을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할 때의 상황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시대입니다. 세상은 오히려 빛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때입니다. 이 때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의 설교에 능력이 있었고, 이를 듣는 자들이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외칠 수 있는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3. 영적 권위의 세례요한

세례요한이 빈들로 간 것은 누가복음 1:80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을 아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보면 ‘파이디온’입니다. ‘파이디온’은 청소년이 아닌 더 어린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그는 아주 어린 시절에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가만히 있으면 아버지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또 대제사장의 반차에 오르면 대제사장까지도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위대한 점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세례요한이 어떠한 훈련을 받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훈련 이것은 그에게는 아마 혹독한 시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 위해 그가 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광야의 훈련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것이었습니다. 최선으로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쓰임을 받을 때 그들에게 마치 후렴구 처럼 붙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입니다. 바로 이 후렴구가 지금 세례요한에게 붙은 것입니다.

우리가 선지자들을 주목할 때 선지자 자심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선지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바로 영적인 권위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임한 말씀은 이러한 권위를 갖게 하였습니다. 이 권위는 서기관과 사두개인들도 세례요한의 설교 앞에 그들의 교만함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을 치며 세례요한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하오리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영적인 권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불신앙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자로 큰 자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4. 빈들의 훈련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빈들입니다. 이곳은 광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운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낮에는 내리쬐는 햇빛으로 인해 40도를 오르내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해가 지면 다시 추위가 몰려오는 곳입니다. 맹수들의 위협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의 어떤 이로움도 기대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오로지 하나님 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고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의 시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고독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바로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빈들에서 세례요한은 이런 고독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빈들에서의 하나님과 독대, 이것은 세상의 온갖 속된 것에서 우리를 분리하여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빈들은 아주 적합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하나님 앞에서 독대하기까지 많은 훈련과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세례요한에게도 이러한 훈련의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소명을 받은 곳이 어디입니까? 그가 어디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으로 영력을 쌓아갔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신 곳이 어디입니까? 광야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한 후에 왜 아라비아 광야로 갔습니까? 사도 요한이 신령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은 곳이 어디입니까? 모두 하나님과 독대하던 곳입니다. 고독 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만날 수 있었던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광야와 같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분주하게 하고 책상에 앉기만 하면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는 곳은 하나님과의 독대를 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또 이런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메말라 버릴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이러한 시간을 빼앗기 위해 우리의 생활을 분주하게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시간을 너무나도 많이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시간을 다시 찾으십시오. 그리고 회복하십시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 믿은 자의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몇몇의 특수한 사람들만을 세례요한처럼 부르시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여러분을 이 시대의 세례요한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혼란한 시대를 누가 진리의 말씀을 들고 평정을 할 것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 패역한 세상의 인본주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겠습니까? 누가 이 땅에 하나님의 깃발을 꽂겠습니까? 누가 이 세상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가득하게 할 것입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그에게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광야의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오랜 기다림과 연습에서 하나님의 독대가 이루어지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이제야 비로서 큰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환상을 본 자는 모든 시험을 이길 힘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자는 이 세상의 어려움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환상을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독대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여 이 패역한 세상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환상을 봅시다. 바로 우리의 외침을 통해 여호와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할 것을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우리 하나님 앞에서 준비합시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세우셨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준비합시다. 광야에서 빈들에서 하나님을 독대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구합시다. 하나님은 진리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설교 / 안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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