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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룻의 신실함과 하나님의 신실함 (룻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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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금성사에서 행하는 선전 문귀가운데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죄우합니다." 아마도 물건을 살 때마다 이 글귀가 떠올라 금성제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의 일생을 좌우합니다. 평소에 실수가 가능한 일들은 괜찮지만 그 일이 일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일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단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평생 구원을 보장받는 일회용 티켓이 아니고 기독교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을 본받고 무의식가운데 그렇게 사고방식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큼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 신앙인의 성숙함을 측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너무 강하게 가지면 기도를 많이 해도 내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나보다는 여러 사람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주관적인 체험보다는 말씀에 의존해서 길을 밝히십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이 화목케 되는 열매가 있습니다. 뜻을 확실하게 알지 못할 때는 시간을 통해 분위기를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결코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일생 일대의 선택의 기로에 섰던 여인을 맞이합니다. 그의 과거는 초라했고, 그의 인생은 비참합니다. 하루하루 목숨을 연장하는 것조차 불확실한 이 여인이 현명한 선택을 통하여 그의 삶이 복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녀의 초지일관은 하나님이 인연으로 주신 시어머니에 대한 신실함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결코 어머니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16-17. 그는 이 불확실한 결정의 시간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잡고, 자신의 신실함을 하나님이 인연으로 주신 어머니에게 드리고 잇습니다. 과연 롯의 선택은 무엇이며 그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롯의 신실함은 그 당시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결정이었습니다.
롯의 이야기는 서두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라고 말함으로써, 그 시대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조금만 편해지면 우상을 숭배하고 자기마음대로 살고 하나님은 이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다른 민족을 사용하셔서 치시고, 그들이 고통받고 부르짖을 때에는 사사를 보내 주시던 시대입니다. 그런가 하면 간음을 행하고 불의와 부정의가 판을 치는 시대였습니다.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사사기 곳곳에 "그 당시 왕이 없음으로 제 소견대로 행하더라." 말합니다. 기준은 자기의 소견대로입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습니다. 사실은 미국이 프래그마티즘이라는 철학위에 세워진 것이 실용적인 이득이 있지만 이것은 그리이스 철학중의 한파로서 쏘피스트라는 자들과 일치하는데 모든 진리를 자기의 이익과 실용성이라고 하는 기준에 따라 상대화 킨다는 의미에서 위험성을 가지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하기보다는 때와 상황에 따라서 자기가 편리한대로 바꿔버립니다. 하나님이 때때로 전쟁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지만 때가 지나면 또 이 교훈을 잊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대표적인 실용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평범한 유대인이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남편과 상의해 보니 야 모압 지방에 양식이 많다더라. 그들에게 신앙적인 이유는 고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인 모압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신앙문제는 심각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배부를 수 있는 모압지방을 찾았습니다. 실용적인 선택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이 이러한 선택을 합니다.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친구관계에서건 교회를 선택하는 문제이건, 눈에 보이는 작은 양식에 눈이 어두워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보다도 내가 어떻게 편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일을 할까 하는 실용적인 결정을 쉽게 하는 시대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것 처럼 보이지만, 나오미의 선택은 원치 않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둥인 남편이 죽고 이어서 모압여인과 결혼시킨 두 아들도 죽어 버렸습니다. 이 결과는 하루도 예측할 수 없는 이 새상에서 어쩔 수없이 겪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그 자체가 이미 이러한 재앙의 가능성속에 놓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요,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요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불확실한 인생가운데 우리가 실용적인 선택을 했다고 안심하고 자만하다가는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릴지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슬프고 불행한 인생으로 경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오미라는 말은 "즐겁다"는 말입니다. 1장 20절에 "나를 마라라 칭하라,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냐?" 나오미가 게획하고, 자기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결과가 남편과 아들의 죽음으로 다가오자 나오미는 자신의 한계를 느껴 실패한 자신의 인생을 가리켜 마라라고 말했습니다.

나오미는 이 실패속에서도 역시 실용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유대땅에 대한 그리움이 아닙니다. 6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포기하고 돌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양식이 있기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실용족인 선택을 거듭하다가 나오미는 어떨 수 없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룻의 결정은 그 시대 사람들의 실용적이고 눈에 보이는 인본주의적인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중요하게 여긴 결정입니다.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룻과 오르바라는 두 며느리를 맞이했습니다. 한때 그는 남편도 있었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있기에 당당하게 며느리를 맞이했지만, 이제 나오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끈으로 두 여인을 데리고 있지만 그 여인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나오미는 롯과 오르바가 재가해서 행복하게 살 것을 권고하고, 자신은 고양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그녀들이 모압지방에 남아 있기를 간청했습니다.

롯과 오르바는 똑같이 모압출신으로 유다 사람과 결혼하고 홀로 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유대 지방으로 떠난다는 것은 굉장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재산도 남지 않은 나오미의 생계를 도와야 합니다. 이방 사람을 차별하는 유대 지방에서 이방인이라고 평생 손가락질 받을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 이방인과 재혼할 유대인이 나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모압 지방에 남아 있으면 좀더 용이합니다. 원래 살던 지방입니다. 같은 모압 사람과 재혼할 길은 더 쉽습니다. 늙은 나오미를 봉양하고 자칫하면 돌아가실 때까지 돌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룻과 오르바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선택의 자리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룻은 어떤 기준에 의하여 선택을 합니까?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이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그의 선택은 조금도 실용적이지 못합니다. 아무런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나오미를 선택하고 고행을 버립니다. 결혼하면서 선택했을 여호와 신앙을 계속하기를 다짐합니다. 낯선 유대세계, 이방인을 차별하는 그 나라로 가려는 결정을 합니다. 원인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자신의 신실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지금까지 걸어온 인연을 무시하고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그것도 인생을 사는 한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예측가능한 실용적인 관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룻이 택한 방법은 자신의 인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그 섭리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합니다. 그 노인네 태어날 떄부터 시어머니였나, 헤어지면 남이지. 남편도 없는데 무슨 시어머니야. 헤어지면 남이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에 편하고 이기적으로 살겠다는 속셈입니다. 그러한 자기이익이 결정되면 얼마든지 나오미를 못본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 한번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에서 유한한 나의 인생가운데 맺어진 인연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행복의 출발은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거부하고 싸우기 시작하면 우리는 필요 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나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확실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다. 인간은 시간안에 유한한 존재요, 무력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가 있는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섭리입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가운데 우리가 미국에 오게 되었고, 산호세의 엘림교회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놀랍지 않습니까? 다른 때도 아니고 1996년 3월의 어느날 이렇게 인연을 맺게 하시고 신앙생활하게 하신 것, 이것이 우리의 출발입니다. 이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아름다와 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나의 인생은 나의 인격을 건 선택이기에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때 내가 누구를 만나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을까? 대학교 3학년떄 나에게 감동을 준 우리 전도사님만 안계셔도 오늘 내가 이 힘든 목회자 길을 안 걸었을텐데.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수련회에 안 참석했더라면 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교회에 바치며 고민하지 않았을텐데. 어떤 이유에서건 나의 인생은 나의 정성을 기울인 선택의 결과이고, 오늘의 그러한 선택을 모아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습니다.

룻은 하나님께서 인연을 맺어 주시고, 홀로 된 나오미에 대한 책임감 위에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무조건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나의 적은 정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적은 책임위에 자신의 미래를 시작했습니다. 나오미는 돌이켜 보면 룻의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녀가 모압에 오지 않았더면 다른 모압 남자와 행복한 생활을 했을지 누가 압니까? 나오미가 전생에 무엇을 잘못 했는지 인생이 잘 안 풀렸는데 그녀의 인생이 잘 안풀린것이 룻의 불행의 원입니다. 룻은 나오미앞에서 비난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나오미가 시어머니로서 그녀를 책망할 만한 힘도, 재산도, 권위도 다 잃은 사람입니다. 룻의 인생을 원망하고 속에 감추인 속시원한 소리를 다 터뜨리고 떠나도 시원치가 않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나오미를 바라 보면서 룻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합니다. 그녀에 대한 책임에서 새인생을 설계합니다. 누가 그녀에게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시아버지나, 남편이나, 시어머니나, 전통적인 신앙안에 있었지만 참된 신앙보다는 실용적으로 살고, 마침내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실패를 맛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사람들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시대에 룻은 결혼을 계기로 처음 믿은 하나님을 향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똑바로 알았습니다.

실패 후에 마지막 남은 은혜에 의존하여 고향으로 떠나는 시어머니는 그래도 양식, 고향, 친척이 있지만, 룻은 막연한 시어머니 한분의 끈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뿐입니다.오르바는 신앙과 상관없이 삶의 확실성을 찾았고, 룻은 신앙의 확실성가운데 삶의 불확실성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그 하나님이 허락한 인연으로 인한 책임위에 새 인생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셋째, 자신의 신실함을 하나님께 드린 룻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학자들이 룻기를 읽으면서 궁굼한 것은 이 책이 룻에 관한 것이냐 아니면 나오미에 관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나오미를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룻의 이야기의 결론은 나오미가 텅비게 돌아왔지만 다시 풍성해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무의미에서 의미로, 약함에서 강함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룻의 인애, 룻의 신실함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잃고, 사람에 대한 신실함을 잃고 자기 소견대로 살았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룻과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함을 보이고, 사람을 향하여 신실함을 보이는 룻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룻의 신실하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룻의 행위는 열 아들보다 귀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 보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부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을 내가 들었노라. 하나님께서 네게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니라."

룻의 신실함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룻이 신실함을 보이자 그때부터 역사를 전환시키십니다. 바야흐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역사를 시작하심을 알고 과감하게 보아스를 향하여 메세지를 보냅니다. 그리하여 룻을 그에게 보냅니다. 보아스도 이 일들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적극 동참합니다.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것에 대한 책임으로 시작한 룻의 일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어 주셨습니다. 평생 짐이 되고, 그의 생활을 제약할 것으로 여겨진 나오미는 오히려 축복의 샘이 되었습니다. 룻이 어려운 가운데 어머니를 책임지려고 결심한 것처럼 보아스도 어려운 가운데 룻을 책임지고자 했습니다. 이방여자이며 아무런 이득이 없는 룻에 대하여 책임져야 할 사람은 자기 기업에 손해가 될 것 같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그녀의 모든 불리한 여건가운데에서도 그녀를 택했습니다. 그속에 신실함을 가진 룻도 귀하지만 그녀를 알아보는 보아스도 귀중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한 역사에 동참하면서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룻 3:18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룻의 신실함을 시작으로 마지막 역사를 이루기까지 보아스를 쉬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처음부터 나오미를 모시면 보아스와 결혼할 수 있다고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오르바도 서로 남아 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측할 수없는 미래에 대하여 자신의 신실함을 바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일 뿐입니다. 그녀가 보아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룻은 목숨을 다해서 나오미를 섬겼을 것입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하는 그 마음 자체가 값어치 있는 것입니다. 급기야 룻은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중심이 하나님을 행한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섭리를 귀하게 여기며, 나에게 주어진 작은 책임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고 신실함을 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신의를 가볍게 여기는 시대이기에 하나님은 애타게 자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100원을 투자하면 1000원을 거두어야 하는 계산적인 신앙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섭리를 부정하고 새롭다는 이름으로 우리의 책임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시대입니다. 내가 던진 것이 내 살아 생전 전혀 열매맺지 못한다할지라도 나의 신실함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 자체로 기뻐하며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그릇을 귀하게 여깁시다. 그 그릇은 우리의 책임과 헌신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의 삶이 더 풍성해 지는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우리가 방향을 알지 못하고 낙심해 있을 때 이 그릇에서부터 시작합시다. 이 그릇에 우리의 중심과 신실함을 담아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값진 것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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