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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슥 4: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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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등산하는 것에 취미를 붙혀 보려고 한다. 산에 오르면서 생명의 기운도 느끼고, 맑은 공기도 마셔서 머리도 맑아진다. 그리고 묵상하는 시간도 갖고, 설교의 좋은 영감을 받기도 한다. 등산을 다녀오면 이렇게 좋은데, 집을 나설 때에는 망설여진다. 갈까 말까. 다녀오면 좋기는 좋은데 올라가는 길이 힘들기 때문이다.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숨이 차기도 한다. 땀을 비오듯이 쏟아 내기도 한다. 그러나 다녀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등산이야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 살이에서 반드시 넘어야할 산이 있을 때가 있다. 학생들에게는 대학입시가 넘어야할 산으로 느껴지고,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들은 직장에 취직하는 일이 넘어야할 산으로 느껴지고, 결혼을 앞에 둔 처녀 총각들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넘어야할 산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살다가 보면 모진 질병에 걸려서 힘들어 하면서 넘어야할 큰 산을 바라볼 때도 있다. 우리는 성전을 건축하였다. 앞으로 우리가 감당해야할 몫이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점을 보면서 담임목사로서 넘어야할 큰 산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런데 분명한 점은 산을 넘으면 산이 있고, 산을 넘어도 계속해서 산이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마치 우리 인생의 여정처럼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해서 홍해를 건넜다. 하나님께서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는가? 홍해를 건너는 체험을 했으니 앞으로는 산이 없을 줄 알았다. 홍해를 건너고 사흘 길을 가는 동안 물이 없어서 그들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홍해라는 산을 넘어왔는데 목마름이라는 산이 버티고 있었다.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났더니 다음에는 배고픔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모세를 원망한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와 떡을 배부르게 먹었는데 왜 우리를 이곳에 와서 굶어 죽게 만드는가?” 배고픔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고픔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아멜렉 군인들이 버티고 서서 있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왔더니 열명은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땅이라고 손을 들었다. 오직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왔는데 너무나도 큰 산이라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땅이라고 전한다. 요단강을 건너야 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여리고 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성을 무너뜨리는 경험을 했지만 아이성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광야 생활이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의 역사를 봐도 계속해서 산 넘어 산이다. 이것이 역사요, 개인의 인생이다. 본문의 스룹바벨도 마찬가지이었다. 스룹바벨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가 있을 때에 바벨론에서 태어났다. 포로기를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데 5만명의 백성을 이끌고 돌아온다. 돌아와서 보니 예루살렘 성전이 폐허된지 근 50년이 지났다. 제단이 무너지고, 기둥이 쓰러지고, 잡초가 무성한 성전을 바라보며 스룹바벨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도움을 받아서 스룹바벨이 성전을 새롭게 재건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너무 어려운 문제가 많았다.

유대인들이 중심되어 성전을 짓기 시작한다. 이 모습을 보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들도 같이 성전을 짓자고 요청한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층이 “어떻게 더러운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성전을 짓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제 성전을 짓는 일에 앞장선 방해꾼이 되었다. 결국 2년간 성전을 짓다가 중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중지하게 된 세월이 벌써 14년이나 지났다. 기초공사만 하고 14년이 지났으니 유대인들이 너무 지쳤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먼저 자기 집을 짓기에 급했다. 이러한 모습을 본 학개 선지자가 “이것이 무슨 연고뇨.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지쳤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감당할 만한 힘이 많이 빠졌다.

성전을 짓다가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한 스룹바벨에게 스가랴가 말씀을 외친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학개 선지자는 이렇게 격려한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스룹바벨 앞에는 큰 산이 놓여져 있었지만 왜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가 되리라고 외쳤을까? 스룹바벨에게는 어떤 이유가 있었기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가 되리라”고 말씀하였을까?

이 본문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스룹바벨의 어떤 점이 있었기에 왜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말씀하였을까? 말씀을 연구하는 중에 그 정답을 찾아냈다. 스룹바벨은 고레스 왕의 임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 5만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총독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은 안전한 귀환보다는 하나님을 예배케 하는 영적인 부흥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스룹바벨의 관심이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서 성전이 무너진 것을 보니 스룹바벨의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자기의 쓸 것은 다 쓰고 성전 짓기에 게을리 하는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성전을 짓는데 방해하는 사람들을 보니 스룹바벨의 마음이 아팠다. 왜? 스룹바벨의 관심은 영적인 부흥에 있었기 때문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이것이 어찌 스룹바벨에게 만 적용되는 말씀인가? 우리 교회에 적용되는 말씀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영적부흥을 꿈꾸는 자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우리가 예배당을 준공하고 넘어야할 큰 산이 있다. 이것을 경제적으로 어떻게 풀어갈까?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영적부흥을 꿈꾸는 자 앞에서 네가 평지가 되리라.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외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힘은 세상이 가져다주는 능력이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권력의 이동이라는 책에서 힘의 이동에 관해서 말했다. 역사를 보면 먼저 주먹의 힘이 세계를 지배했다. 군사적인 힘, 물리적인 힘이 온 세상을 지배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러한 물리적인 힘은 경제적인 힘으로 넘어갔다. 주먹의 힘보다는 돈의 힘이 더 크다는 점이다. 돈이 많은 나라가 좋은 무기도 사용한다. 돈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경제력의 힘에서 정보의 힘을 강조한다. 실제로 정보 산업에 앞장선 빌게이츠가 세계 제일의 부자이다. 정보가 곧 힘이다. 제 5공화국을 보면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쿠데타에 성공한 이유도 역시 군사의 정보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 물리적인 힘, 경제적인 힘, 정보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앞에 놓인 큰 산을 물리적인 힘으로 물리칠 수 있겠는가? 앞에 놓인 산을 경제적인 힘이나 정보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영적인 부흥을 꿈꾸는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다음으로, 스가랴 선지자는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내용은 내 마음에 갖는 결심을 의미한다. 내가 스스로 결심한다고 내 앞에 놓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내가 스스로 갖는 결심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형상 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결심하고 돌아서서 후회하고, 결심하고 돌아서서 후회하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인생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능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말씀은 곧 내가 스스로 결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결심"으로 변하고 성숙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결심이나 의지가 아니라 믿음으로 변하고 성숙한다. 봄에 농사를 시작하는 농부는 마음으로 결심을 하거나 의지를 품고 들녘으로 나서지 않는다. 봄이 오면 얼었던 땅이 풀리고 쟁기를 깊숙이 넣어도 흙이 부드럽게 일어나리라 믿고 아무 의심없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사람이나 일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모든 결심은 언젠가는 무너진다. 하지만 믿음은 언젠가는 일어나 아름답게 승리한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 앞에 놓인 큰 산이 무엇인가? 우리는 큰 산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물리적인 힘, 경제의 힘, 지식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우리는 큰 산을 내가 결심하고 새롭게 출발하려는 마음으로 해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결심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스가랴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영적부흥을 꿈꾸는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예배하는 자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기도하는 자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영적부흥을 꿈꾸는 자 앞에서 네가 평지가 되리라.

어느 교인의 이야기이다. 집을 하나 장만했는데 팔리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는 사업도 되지 않아서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너무 괴로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 이 높은 산을 넘어야할지 막막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이 가정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보자. 그의 마음 속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음에 뜨거운 열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갑자기 장사가 잘 되기 시작하면서 어려운 문제가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적부흥이 일어나고 나니 큰 산이 평지가 되는 경험을 하였다. 얼마나 감사한가?

엄마의 뱃 속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체를 생각해 보라. 배꼽으로 연결된 탯줄로 숨을 쉬고, 탯줄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그것이 끊어지면 그 생명체는 죽는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내 속에 일어나는 영적인 부흥이 내 인생의 탯줄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영적인 부흥이 교회를 살리는 탯줄이다. 이것을 놓치면 죽는다. 이것을 놓치면 끝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영적회복을 꿈꾸는 자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에 네가 무엇이냐? 예배하는 사람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곽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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