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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숫날의 얼음냉수같이 시원한 성도 (잠 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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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이제 이번 주 중으로 7월이 시작되기도 하고 장마도 시작된다고 하니 아무래도 제철 여름이 오기는 온 것 같습니다. 살다가 보면 느끼게 되는 것은 가끔 무더운 여름철의 더위보다도 우리를 더 짜증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우리 마음도 시원하게 만들어주어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들도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기쁘고 시원케 하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쾌한 성도가 되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대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흡족해하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은 지혜서인 잠언 말씀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야말로 우리가 어떤 일이나 관계 속에 부름을 받았을 때 팔레스타인 지방의 무더운 추숫날 한참 힘들고 땀이 쏟아지는 지경에서 마치 한 그릇의 시원한 얼음냉수를 마시는 것처럼 그를 부르고 보낸 분의 마음을 시원케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지금의 시대나 아니면 그 시대나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 책무를 맡겨주었을 때 정말 가슴이 시원하게 그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려고 오늘의 말씀을 기록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주인의 짐을 덜어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의 짐이 되는 경우, 또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에 근심을 주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의 일이기에 오늘 이 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얻어 도무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일만 만드는 대신 그 일과 문제는 맡긴 주인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이제 이와 같이 우리를 보낸 주인과 또 관계를 가지고 있는 모든 주변사람들, 나아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하여 이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봅니다. 과연 우리가 추숫날의 얼음냉수처럼 그를 보낸 이의 마음을 유쾌하고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갖추어야 되는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로 우리 마음에 가져야 될 것은 우리 마음에 방향과 능력이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자 하는 마음의 방향이 설정되어져야 하며 그리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제1원칙이 과연 나를 중심으로 온 세계 우주가 움직여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또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내가 돌아가고 움직여 가야한다고 믿고 있는가? 하는 중심축의 문제가 우리들에게 분명히 정돈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21절에 보면 빌립보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내어 그의 모든 수고가 업적의 혁혁함에 대해서 이와 같이 전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편지의 전언을 통해서 마음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속에 여러 가지 텁텁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교회를 위해서 수고를 하고 많은 주의 성도를 위해서 수고했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간파해 보고 느끼기에 사도 바울은 저희는 다 주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일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했을까요? 그들의 마음에 근본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된 동기가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그리고 본인은 십자가 뒤에 숨은 것이 아니라 본인을 드러내는 것이 결국은 주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정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모든 일들을 이루는 경우입니다. 자기도취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중심적 사고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괜찮아하고 묵인한다거나 자신의 누림을 위하여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세우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고치지 않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경우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자신을 어렵게 하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혹은 이 세상에서 삶의 경우 그를 보낸 주변사람들의 마음에 짐이 되는 경우입니다.

우주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맡겨졌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긴 이의 본심을 잘 파악해야 하는데 너무 소심하게 생각해도 안 되고 너무 지나치게 생각해도 안 됩니다. 세상에서의 일도 그를 보낸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또 내가 그를 기쁘게 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결국 시원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지 않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고 매우 성숙된 사고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은 손해가 아니라 진정한 이룸이고 아름다움이고 진정한 유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내 위치에서 어떤 일을 조력하기 위해 애를 쓰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하는 수고와 애씀이 결국 빛을 보게 됩니다. 기여와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많은 경우 영화의 조연으로 나오는 배우 덕분에 그 영화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경우도 보고 결국 그가 또 다른 작품에서 주연을 맡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야구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을 던지는 투수인 것 같습니다. 공을 잘 던져야 결국 그 경기가 이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투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자들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공을 잘 던져서 최소한의 점수를 내도 그 팀에 있는 타자들이 공을 전혀 치지 못해서 한 점도 내지 못한다면 결국 그 경기는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공만 잘 쳐야 되는 것이 아니라 수비도 잘해야 합니다. 점수를 안 내줘야 되는데 실수해서 점수를 내주게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점수를 내줄 상황에서 수비를 잘해서 점수를 안 내줬으면 승리하는데 기여하고 공헌하게 됩니다. 투수만, 타자만이 아니라 수비의 위치에 섰을 때 그 선수들의 플레이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또 누상에 나갔을 때 주류플레이도 잘해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감독이 작전을 잘 해야 합니다. 선수기용도 잘해야 합니다. 또 훌륭한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훈련을 잘 시키는 훈련능력이 있어서 선수들의 기량을 향상시켜 주어야 합니다. 사람 관리하는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일사 분란한 팀워크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팀 닥터는 또한 선수들의 건강을 잘 점검하고 유지시켜 주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좋은 선수들을 스카우트 해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팀들이 우승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 그 어떤 것 하나 없어도 안되는 것입니다. 좋은 선수 못 데리고 오면 우승할 수 없습니다. 또 사람들 건강 유지해 주지 못하면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팀 훈련을 잘 못하고 사람관리 잘 못하고 훈련을 못시키고 작전을 잘 못하고 그 다음에 주류에 나가서 플레이를 잘 못해서 아웃이 된다거나 또 수비의 실수가 잦다거나 전혀 치지 못한다거나 잘 못 던지거나 모든 것 하나 결정적으로 잘 못하면 경기에서 패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위치에 있건 얼음냉수와 같은 시원한 종이 되려면 결국 그 사람이 최고의 기여자가 되는 것이 바로 최고의 수고를 하며 이와 같이 훌륭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따라서 우리가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데 내 분수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옆에 사람들한테 ‘분수를 좀 아세요’라고 하면 꼭 욕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분수를 알라는 것은 욕을 하는 게 아닙니다. 가령 저도 제 분수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30분-35분정도 설교해야 되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하다보니까 기분이 좋아지고 성령이 충만해서 1시간 30분 설교를 했다면 무슨 사건이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다음번에는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차가 빠져나가야 여기 주차를 하고 그 다음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고, 차가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예배시간도 지나버리고 엉켜서 예배도 시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 주에도 또 그렇게 하고 그 다음주에 또 그렇게 해서 세 번만 하면 교회는 붕괴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한번 실수하면 ‘무슨 큰일이 있었나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겠지’, 두 번 실수하면 ‘또야?’ 세 번 실수하면 ‘안녕히 계세요’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실수를 세 번만 하게 되면 우리는 그 모든 관계나 우리가 이루는 모든 일, 모든 것들이 다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내 마음 흐르는 대로라는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산속에 혼자 산다면 그냥 해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살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형성되고 사회적인 삶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내 분수를 알고 내 분수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파악하여서 그 일을 잘 하면 정말 그 일을 맡긴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되 추숫날에 얼음냉수처럼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한번 합시다. ‘당신의 분수를 잘 아세요?’ 굉장히 찝찝한 표정을 짓는데 다시 한 번 인사합시다. ‘당신의 분수를 잘 아세요?’ 우리는 내 분수를 잘 파악해서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소심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말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잘 한다면 그야말로 추숫날의 얼음냉수와 같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것입니다.

마음의 정한 방향이 분명히 나를 보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려는 것으로 정해졌다면 이제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나타나는 행동과 그 행동이 쌓여져 이루어진 결과와 과업을 가지고 평가를 하게 됩니다. 물론 동기가 좋았지만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아서 어떤 일을 이루지 못했을 때 우리는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에게 계속 그 일을 맡겨서 관계나 어떤 일을 망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에 생각한 것을 마치 내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많이 빠지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에스라 마라톤대회 보니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열심히 뛰어가는데 저는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안 뛰고 구경만 했기 때문에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달리기를 잘하는 책 한권을 읽고 ‘나는 달리기를 잘할 수 있어’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우리는 그 말을 맞았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달리기를 잘하는 책 한권 읽었다고 해서 달리기를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달리기를 잘하는 책 한 권 읽고 수개월 수년 연습이 이루어졌을 때 그 사람은 달리기를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 이루어진 생각가지고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이루어진 생각이 구체화되어 실현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내 생활 속에 나타난 것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집을 짓고 얼마나 많은 집을 허물겠습니까? 그것 가지고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다’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다’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각고의 애씀과 은혜의 인도하심으로 그렇게 행하는 축복까지 임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정서적 설득과 더불어서 반복적인 훈련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교회 일을 같이 섬기면서 느끼는 것이 교회 안에서는 정서적 설득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반복적 설득을 통한 실제적인 능력의 배양인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굉장히 착합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 성도들이 굉장히 착합니다. 이렇게 봐도 얼굴에 성도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얼굴에 성도라고 안 써 있는 사람은 문제에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또 그것이 얼굴에 표정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옆에 사람 보세요. 참 선하게 생겼지요? ‘선하게 생겼다고 평가도 못 받는 이들이여. 왜 그러십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참 착합니다. 그런데 이 착한 사람들이 대부분 의지가 약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 사람은 참 사람은 좋은데, 그 다음이 무슨 말을 하게 됩니까? 결단력과 실천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의 마음은 상대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서 또 착한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강하고 나쁜 것 보단 마음이 약하고 착한 것이 낫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착하다는 것 자체가 매우 정서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착하다는 것이 정서성이 강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들이 비록 말씀을 들으면 비교적 은혜를 빨리 받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감동을 많이 받고 마음 속에 어떤 이런 결심과 마음에 변화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착하다는 것이 정서성이 강하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지력이 약하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자주합니다. 그런데 회개를 너무 자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요? 회개만 자주하면 안 되고 그 회개가 생활 속의 회개가 되어서 실제는 다음에 그런 회개를 안 하고 또 다른 수준의 회개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착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훈련으로 애써 이룬 마음의 결단을 고귀한 결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다. 추숫날의 얼음냉수와 같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했는데 하루아침에 그 능력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은 아무리 애써도 일 년에 안 되고 10년은 가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1년에 안되고 10년은 가야 되는 경우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하루에는 안 되고 3개월은 해야 능력이 생기는 경우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결단과 오랜 기간의 연단 그리고 하루 하루가 쌓여져 습득되는 능력의 비축이 일정기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어떤 일을 이루거나 혹은 사람들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이 있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애씀과 그에 뒷받침 되는 노력과 수고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 사람은 자연스럽게 무슨 일을 하면 되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무슨 일을 하면 안 될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뒤에 숨어있는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의 경주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습득하는데 전력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 어렵게 일이 맡겨졌을 때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부족해서 오히려 그것을 그르치고 주인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가 정치를 하건 경제를 하건 아니면 가르치는 일이건 문화매체를 맡는 일을 하건 어떤 일들도 자신의 일 하나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 기본적인 사항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 이루어야할 수준 높은 성취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일차적인 사역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이차적인 사역까지 나아가고자 원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일차적으로 내 앞에 놓인 일하나 처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다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영적인 사역까지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능력을 습득하되 인내를 가지고 하루하루 쌓아가며 그 일정량이 비축되는 기간까지 우리는 참고 습득해나가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을 소지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철저한 준비를 하고 가혹한 훈련도 받고 열심히 전투의 장면에 임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장면에 임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일이든 맡겨졌을 때 그것을 잘하려면 준비가 잘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예배를 드리실 때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에 기쁨이 있나요? 오늘 아멘이라고 하신 분은 특별히 예배를 위해서 준비를 많이 하신 분이십니다. 왜 준비를 많이 합니까? ‘내가 오늘 하나님 앞에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깨끗한 예배를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마음도 정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왔는데 마음이 정리가 안 되어서 마음에 갈등이 있고 번민이 있고 내가 그 일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내가 그 사람을 만나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러한 것들이 정리가 안 되었다면 설교말씀을 듣다가 이 말씀 들으면 만나야겠고, 이 말씀 들으면 또 안 만나야 될 것 같고 계속 마음이 이렇게 오락가락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 내 마음을 정리해야지. 모든 것 다 정돈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신실한 마음으로 나와야지’ 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나오면, 정말 하나님께 내가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준비가 잘 되려면 때로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수준 이상의 훈련을 이루어야 합니다. 언제나 목표에 따라 훈련의 강도와 성취가 결정됩니다.
달리기를 예를 들면 달기기 목표가 운동장 두 바퀴 도는 것인 사람과 마라톤 풀코스 42.195Km를 뛰는 것이 목표인 사람과는 훈련의 강도가 틀린 것입니다. ‘야 나는 운동장 두 바퀴 뛰는 것이 내 평생의 목표야’라고 생각하고 뛰면 이 사람은 한 두 바퀴 뛰다가 ‘됐어, 이 정도면 돼. 만족해. 항상 기쁘게 살라고 했으니까 나는 만족해’ 하면 그 사람은 더 연습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나는 마라톤을 하는데 한번 전 코스를 뛰어봐야지. 4시간 안에 한번 들어와 봐야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또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를 가혹한 훈련의 현장에 몰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 하나 추스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기쁨과 은혜를 나누어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몫까지 거두어 드리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하기 위한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삶의 치열한 삶의 장면을 겪어야 합니다. 정작 일이 맡겨졌을 때 자신의 일을 감당하지 못해서 이러저러한 얘기를 듣는다면 그 주인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평가의 기준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평가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평가자의 기대수준에 130%를 해야 평가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가할 때 언제든지 잘못 지나쳐서 그 부분을 평가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깁니다. 그러면 100%만 준비하면 우리는 언제나 80%, 90%밖에 평가를 못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130% 준비해야 그중에서 스쳐가는 것 있어도 100%정도 평가받아 마음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헐떡거리며 쫓아가는 것보다 항상 우리는 여유롭게 그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유롭게 그 일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될 때 비로소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의 장면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각오와 열심 그리고 준비한 모든 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미 하나님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좀 오래된 여러해 전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시간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12시쯤 된 것 같습니다. 가야 되겠다 하고 사무실에서 나와서 주차장에 내려갔습니다. 겨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추운 한겨울인데 내려가는데 주차장에 차도 한 대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에 가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웬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 한명이 조각조각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뭘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밤 12시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왜 학생이 혼자서 그것을 만들까 의아심이 생겨서 가봤습니다. 그 학생에게 ‘뭘 만드니?’ 하고 물었더니, 중, 고등부 아이들 ‘실로암의 밤’, ‘문학의 밤’ 하는데 그 설치물 만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마음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시간에 이 늦은 시간에 이 학생이, 여러 명이 하면 학생들은 또 재미있잖아요. 재미있어서 잘하기도 하는 것이 학생들의 특징인데 아니, 혼자서 아무도 보지 않는데 추운 밖에서, 너무너무 기특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너 혼자 하니?’ 하고 물었더니 혼자서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어 하고 기쁨으로 전혀 짜증내지 않고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신기해서 ‘야, 너는 아주 참 훌륭하구나.’ 그렇게 얘기하고, 제 마음속에 기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이가 자라면 훌륭한 헌신자가 되겠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아도 혼자 늦은 시간까지 애쓰고, 혼자 한다는 것이 참 힘든 것입니다. 어울리지도 않고 끝까지 남아서 결국 그 일을 하는 것인데, 그래서 제 마음에 그 학생을 위해 기도를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학생이 미술대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학교도 졸업하고 요즘은 미술 작품 활동하고 있는데 잘 하고 있다는 얘기를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정말 그 마음속에 감동이 되어서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치열하다는 것은 박수 받아서 칭찬받아서 우쭐할 때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좋고 기쁘고 또 감사해서 그것을 즐김으로 그것을 이룰 때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내가 정말 나에게 어떤 일이 맡겨졌으면 그것을 꼭 내 마음에 그것을 맡겨준 사람 마음을 기쁘게 해주어야 되겠다.’라는 방향이 설정되고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지고 또 그렇게 하는 과정 가운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것이 스스로 내 기쁨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사람의 심정을 미리 파악하여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예측력과 파악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 삶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하나님과 우리를 보내니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아량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역자들 책상에 ‘한 박자 빠르게’ 라고 써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한 번 더 빠르게 헤아려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삶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나는 없어지는 것 같으나 결국 나 자신을 최대한 기쁘게 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것은 사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데 자꾸 포기되고 안 되니까 ‘아이, 그냥 나 하나 기쁘게 하는 것으로 끝나자.’ 하고 도망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도와준다고 도와줬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엉뚱한 일 하면 다른 사람에게 오히려 해만 끼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되 그 헤아리는 것으로 내 마음과 삶이 분명히 기쁘고 즐거울 수 있으며 또 내 마음의 삶이 정돈되었을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 하나 유지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교회에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빌립보교회 선교헌금 걷은 것을 그 당시에는 인편으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 선생에게 선교헌금 갖다 주는 일을 하다가 병이 들었습니다. 노중에서 병이 들었는데 에바브로디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이 근심을 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근심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아픈 것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아픔으로 말미암아 교인들이 걱정하니 얼마나 교인들이 걱정하는 것이 마음에 상해하는지 정말 그것이 가장 큰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다른 일에, 마음에 기쁨을 끼치고 즐거움과 은혜를 끼치고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 내 마음에 소망이 된다면 보다 수준 높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세는 백성이 범죄했을 때 그 백성을 용서해주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제하여지는 것까지를 담보로 하면서 그 백성들을 위하여 간절히 소원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그 마음에 진정하게 위하고 세워주려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언제나 앞을 바라보고 파악하고 예측하는 통찰 능력을 키워야 삶의 진정한 승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삶의 일들은 항상 원칙적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순간적인 태풍이 불고 순간적으로 예측치 않았던 일, 여러 일들이 원칙에서 벗어나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칙이라는 것은 큰 틀에서 보면 결국은 원칙대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통계라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순간순간을 보면 통계 수치에서 벗어나고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큰 틀에서 보면 다 통계 수치에 거의 맞게 원칙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볼 때 큰 틀에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거의 주기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거의 주기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큰 시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작은 일에 기뻐하고 너무 작은 일에 슬퍼하다 보면 우리 삶은 너무 널뛰기가 심해지게 됩니다. 널뛰기가 심하다 보면 우리는 괜히 사람이 주관성이 없어지고 우리 사람에게서 어떤 일관성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러저러한 사고 판단과 훈련을 하게 되면 삶의 통찰력이 우리들에게 자라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간절한 기도와 영적 세계에 대한 신장과 영성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눈앞의 일도 모르고 그저 막 말하고 어리석은 행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너무 단견적인 사고를 가지고 삶을 투자하지 말고 긴 호흡가지고 내 생각과 다를 때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법을 습득해야 우리 삶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통찰력이라는 것은 결코 길게 보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키워질 수 없습니다.

통찰력은 재능과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부분입니다. 재주는 있는데 앞은 바라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재주는 많은데 앞을 보는 능력이 없어서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자꾸 수용하고 배우는 한 우리는 굳어지지 않습니다.

자, 한번 우리 따라서 해 봅시다. ‘청년 같은 노년, 노년 같은 청년’ 노인과 청년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면, 신체적인 나이로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든지 내 마음에 수용해서 자꾸 배우고 습득하고 내 범위를 넓혀가는 한 우리는 청년과 같은 푸르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마음의 틀이 고정돼서 더 이상 확장되지 않고 수용도 되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제단하고 판단하고 그것을 가지고 다 자르게 되면 그것은 이미 우리는 노쇠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것이 내 마음과 다른 것이 있어도 그것을 수용하고 내 마음을 넓혀 가고 그 일에 대해서 보완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 기준을 가지고 더 이상 나로 확장시키지 못하고 다 잘라나가고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 노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푸르르게 계속해서 진보하고 계십니까? 한번 여러분 스스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노쇠함이라는 것은 신체적 연령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상황의 문제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지혜를 위한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노를 참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들을 키워가야 하며, 자신에 대해서 믿어주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자신에 대해서 믿어주는 것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분당중앙교회 성도들은 어떤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믿으세요. ‘나는 나를 믿는다. 내가 판단한 것이 최선이고, 결과도 최선일 것이기 때문에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어떤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자신을 믿지 못하면 결정하는 순간에 항상 실수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 자신을 믿으세요. 이제까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나를 주의 백성으로 삼아가시는 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자신있고 담대하게 결정하십시오. 결정한 것에 대해 결과가 나올 때 내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일절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늘 후회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주어져도 후회하고 저러한 결과가 주어져도 후회합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때로는 잘못 판단해서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후회하지 않고 내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이고 나는 이 결과를 어차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며 주어진 결과에 감사하고 그것을 통해서 또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믿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주장하며 자기를 믿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를 믿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따라서 자신있는 분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결과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를 믿고 중요한 순간에 나 자신의 결정을 믿어야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합시다. ‘중요한 순간에 나 자신의 판단과 나 자신의 결정을 믿읍시다.’ 자신있게 결정하세요.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원치 않는 결과가 온다 할지라도 후회하지 말고 이것이 내가 얻은 최선의 좋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기쁘게 누리고 부족하면 또 한 번 수고해서 애쓰는 이와 같은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나는 잘 못했어’, 늘 ‘나는 못했어, 늘 나는 안돼.’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은 결코 행복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못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하나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자기도 믿고 다른 사람도 믿어 줘야 합니다. 자기를 믿는 만큼 다른 사람도 믿어주어야 합니다. 낙심하지 않고 자신과 사람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진보를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전도서 10장 10절을 보면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부족하다 생각하고, 내 철 연장이 무디어졌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잘 갈아서 그것을 가지고 일을 잘 해야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낙심하지는 않으나 부족함을 생각해서 보완하는 이와 같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 철연장이 무딘지도 모르고 휘두르는데 모든 것이 잘 잘라지지 않고 다 이리저리 망가지기만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당장은 재능과 힘이 있는 사람이 승리하나 결국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자 우리 따라서 합니다. ‘당장은 재능과 힘이 있는 사람이 승리하나 결국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과 체험은 지혜의 재료가 되니까 결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지식과 체험이라는 것은 지혜의 재료가 됩니다. 그러나 지식과 지혜로 끝나지 말고 그것을 재료 삼아서 지혜의 근본까지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어떤 작은 중간적인 성취보다 최종적인 성취를 목표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지칠 만큼 중간에 아무런 성취가 없으면 안 되겠죠.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최선의 성취를 위해서 우리는 마지막까지 가야 합니다. 더욱 우리의 통찰력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파악과 그를 수납하면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면인 것을 생각해서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세 번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 앞의 사람을 도와주고 세워주는 것이 내 기쁨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추숫날의 얼음냉수와 같은 일꾼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세워주는 것이 기쁨일 수 있을 때 그 일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 바나바와 바울, 요나단과 다윗같은 사람의 관계가 나옵니다.
출애굽한 세대 중에서 1세대는 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묻혔습니다. 그리고 2세대와 더불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동등한 반열에 있었던 12명의 정탐꾼 중에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둘 중에 하나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는 얼마나 낙심하겠습니까? 둘이 있는데 둘 중에 단 하나가 지도자가 됐다면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그런데 갈렙은 그것을 꿋꿋이 잘 감당했습니다. 오히려 여호수아를 도와주고 정말 어려운 전투가 있을 때 최선봉에서 ‘저 산지를 내게 허락하소서’라고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고 오히려 어려운 일을 자처하면서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여호수아의 마음에는 이 갈렙이 고마운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갈렙에 대해서 온전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게 어떤 위치가 주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 최선의 일인가를 생각해서 그 일을 이루는 사람이 바로 성경의 이와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를 보십시오. 여러분 신약시대를 봐도 바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바울보다 못하지만 바울을 기독교 역사의 무대로 소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처럼 바나바는 바울을 초대교회의 기독사회에 세워주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같이 동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저 사람하고 나하고 같이 일하면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이 뻔히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같이 초청해서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나바라는 사람의 인격의 크기가 얼마만 했겠습니까? 그러니 바나바를 생각할 때 바울은 늘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범위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나단과 다윗을 보세요. 요나단은 자기가 사울왕의 아들로서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들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자리를 비키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그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요나단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역대 왕 중에서 요나단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요나단은 왕이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 중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도 요나단의 이름만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내 기쁨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성공과 성취와 만족이 전부라면 그것은 너무나 짧은 시간만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내부와 자신을 위한 성취가 전부인 사람에게는 아무리 모든 일이 100% 다 이루어진다고 해도 마지막 관문이 하나 탁하고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권태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으나 조금 지나면 그것이 권태로워집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모든 이룸이라는 것이 의미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권태롭기 시작해요. 그 다음부터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패와 무너짐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룬 모든 것이 다 권태롭고 더 이상 재미없는데 거기서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쾌락과 탐욕을 좇고 부패하게 되고 무너지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항상 최고의 정상에 서면 결국 무너지게 되고 내려오게 되거나 떨어지게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끊임없는 새로운 목표들이 우리들에게 샘솟듯이 우리 앞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내 자신이 내부 지향적일 때 끊임없는 목표가 세워지지 않아 이만하면 됐다, 내가 원하던 목표가 됐어. 그런데 우리가 내부 지향적이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세워주고 정말 추숫날의 얼음냉수와 같은 시원한 일꾼으로서 끊임없이 기쁘게 해주어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생긴다면 우리는 새로운 목표들이 계속해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게 맡기니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는 것이 기쁨이고 세워주는 것이 기쁨이라면 우리의 능력이 어느새 한 수준 높아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능력있는 한 사람이 되는 수준을 넘어서서 주변에 많은 능력있는 사람을 둘 수 있는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혼자 이룬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엄밀한 의미에서 베드로 행전, 바울 행전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 행전, 바울 행전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그 베드로와 바울이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을 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이루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양육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남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일을 이루는 것은 제자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과 주변사람을 시원케 하는 것은 시기심 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쁨일 때 우리는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 중에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가지고 있는 큰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주인에 대한 시기심도 들어 있었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마음이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 가운데 벌써 시기심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해서 기껏 남기면 주인이 다 가지고 가, 나는 수고하고 애쓰면 주인은 수고한 것도 없이 뭔가 맡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 가지고 간다면 그럼 나는 뭐야? 내가 수고하나 아니면 조금 노나, 나는 똑같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시기심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추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정화해야 합니다. 시기심 대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기심 대신 축복의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진정한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게 축복이 넘쳐 다른 사람이 잘됨을 시기하는 수준을 지나 오히려 세워주고 축복해 줄 수 있는 단계가 된 것입니다.

내가 주변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면 그 역시 시원해 나를 돕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돕고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그릇을 채우면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눈이 흐려져서 잘 안보일 때 우리는 무엇을 쓰기 시작하죠? 안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안경을 안 쓸 때는 잘 안보였는데 안경을 쓰고 나면 환히 보입니다. 안보이던 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멀리 있어서 볼 수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망원경이라는 것을 통해서 멀리 있는 것을 봅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도 너무 작아서 볼 수 없어요. 그러면 현미경을 통해서 미생물과 같은 작은 것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도 안 보이는 것이 있어요. 아무리 관찰을 해도 내 눈에 보이지가 않아요. 아무리 관찰해도 내 눈에 도저히 발견도 안되고 아이디어도 생기지 않는 일이 있어요. 어떻게 봅니까? 망원경, 현미경, 안경이 있어도 못 보는데 어떻게 봅니까? 그럴 때는 다른 사람의 눈을 빌려서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보는 것입니다. 나는 그 상황을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아무것도 관찰이 안 돼요.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장면을 보면 무엇인가 관찰되는 것이 있어요. 무엇인가 발견되는 일도,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능력이 부족해요. 어떤 일을 잘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그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내 능력을 키우기도 하지만 능력있는 사람을 감동시켜 그 일을 같이 이룰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주인과 내 주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면 그 감동은 내게 큰 유익이 됩니다.

잠언 27장 18절을 보면 ‘무화과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인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는 청지기의 역할이 더 커지고 시간이 지나면 주인은 청지기에게 그 일에 대해서 일임하게 됩니다. 가장 대표되는 사람이 요셉이라는 사람이 아닙니까?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가니 그 집에서 전권을 맡겼습니다. 감옥에 가니까 전옥, 간수장이 감옥에 대한 전권을 다 맡겼습니다. 그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신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왕이 그에게 맡겼던 일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고, 그가 사자굴에 던져질 때 가슴 아파했던 일이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 인생에서 하기 어려운 일을 했을 때, 참기 힘든 일을 참았을 때, 주기 어려운 것을 무엇인가 나누어 주었을 때, 이루기 어려운 것을 이루었을 때, 진정으로 기쁘고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편하고 쉬운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유익하고 훌륭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스쳐가고 또 스쳐가는 삶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 우리는 더욱더 성숙해져가기도 하고 쇠하여지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추숫날의 얼음냉수처럼 시원하게 해 드릴 것인가, 아니면 나를 생각만 해도 가슴 답답하게 하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하고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빈 칸을 우리는 어떻게 채울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주인되신 주님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 주변사람들의 모든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유쾌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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