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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죽는 것(죽음)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시 116: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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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은 참 슬픈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죽음을 꼭 슬픔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오히려 귀중히 보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을 귀중하게 보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보시지 않는 죽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데 술집에 불이 나서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고 죄악만 쌓으니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이 땅에 있는 것보다는 빨리 데리고 가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죽었다면 이런 죽음은 여호와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죽음은 아닙니다.

  그럼 어떤 죽음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여기시겠습니까?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십니다. 우리 교회는 최근 들어 사랑하는 교우 두 사람을 먼저 보냈습니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그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죽음은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셨을 것입니다. 주와 및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죽는 성도의 죽음도 귀중히 보실 것입니다. 행7장에 보면 스데반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핍박자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데 그 때 하늘에서는 주님께서 스데반을 격려하기 위하여 보좌에서 일어서셨습니다. 주와 및 복음을 위하여 살다가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몇 가지 죽음을 말하는데 첫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을 버리면 하나님과 분리되며 결국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둘째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몸과 영이 분리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영이 몸에서 떠나므로 몸의 기능이 정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죽음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당하게 됩니다. 셋째는 육신의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육체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경험하는 신앙적인 자기 포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영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때 육신은 죽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할 때 육신이 죽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믿음 안에 있다가 다시 믿음 밖으로 나가는 어리석은 일 즉 영적인 죽음을 날마다 반복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그의 육체가 날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이겠습니까?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며 영 중심의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취할 행동 방식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막8:34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늘 설교는 두 부분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본문 중심으로 육신이 죽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봅니다. 둘째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어떻게 육신이 죽어지는지 살펴봅니다.

1.육신이 죽어지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1)주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16절에 보면 시편기자는 자신이 주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종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인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기수가 말 위에 올라탔는데 기수가 원하는 대로 가는 말이 있고 자기가 원하는대로기수를끌고 가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말이 기수를 끌고 간다면 그 말은 매를 많이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수에게 순종할 때 까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내가 주님을 움직이려고 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생각이 있고 나도 자유의지가 있는데 그렇게 구속당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장기를 둘 때 고수가 훈수 두는 대로 장기 알을 놓기만 해도 상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주의 종이 되어 사십시오. 하수가 고수의 뜻을 이해 할 수 없지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다른 결과를 보게 되는 것처럼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해가 안 되니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방법입니다.

  2) 결박이 풀어진다.
  16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결박을 당했다는 것은 어떤 부분이 묶여서 활동이 제한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재정이 결박당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아니면 돈은 있으나 쓸 수 없게 되거나 손이 수고한 대로 거두지 못합니다. 건강이 결박당한 사람은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합니다. 대인관계에 결박당한 사람은 사람들 때문에 늘 고통당하든지 아니면 엎드려져도 도울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결박은 원어의 의미를 보면 징계로 인한 결박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만 사니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결박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는데 용돈을 엉뚱한 곳에만 사용하는 자녀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필요하다면 용돈을 주지 않는 징계도 내릴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이 아이는 용돈 부분에 있어서 결박을 당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징계의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잠3:11, 12을 보면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징계의 이유를 밝힙니다.
  그럼 언제 징계가 끝날까요? 내가 죽어질 때 징계가 끝납니다. 본문에서 성도가 죽어지면 주께서 그 성도의 결박을 풀어주신다는 말씀합니다. 재정의 결박이 있는 사람은 재정 분야에서 육신이 죽어져야 합니다. 대인관계의 결박이 있는 사람은 대인관계의 결박이 풀어져야 합니다. 내가 어떤 부분에 있어서 육신을 죽이면 하나님은 그 부분에 있어서 징계로 인한 결박을 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3) 진정한 예배자가 된다.
  17절에서 시편 기자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예배가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육신이 죽어진 사람은 진정한 예배자가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내가 제물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 제단에 올라가는 제물은 산채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칼로 찔러 피를 흘리고 완전히 죽여서 드렸습니다. 신약시대에 제사를 대신하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육신을 죽여야 참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를 위하여 몇 가지 권면을 드립니다.
  첫째,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요4:24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신령이라는 성령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도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일도 진리를 벗어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기적도 거짓이요 능력도 거짓입니다.
  셋째, 시간으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모든 것이 주인의 것입니다. 시간도 주인의 것입니다. 내 맘 대로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은 육신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공식적인 예배에 좀 더 시간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시간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넷째, 몸으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활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몸으로 하나님의 듯을 이루어드리는 예배자를 주님은 찾으십니다.
  다섯째, 물질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물질은 형편에 따라서 드렸습니다. 송아지로 가능한 사람은 송아지로 드렸고 염소가 적당한 사람은 염소로 드렸습니다. 염소도 부담스러운 사람은 비둘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제물의 양은 형편에 따라 드렸으나 반드시 제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4) 말씀대로 살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원하는 것이 일치 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 뜻이 일치 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생각이 살아있습니다. 내 고집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일치하려면 내가 죽어져야 합니다. 내가 죽어지면 내 뜻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뜻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2.육신은 어떻게 죽어집니까?

  하나님은 성도가 육신을 죽이고 영중심의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시고 육신을 죽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축복으로 역사하십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육신을 죽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육신을 죽일 수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몇 가지 해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죽어집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살아있는데 죽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 지성인들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보다성경 말씀이 옳으며 진리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머리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갈2:20에 보면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믿음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믿으면 천국, 믿지 못하면 지옥입니다. 믿으면 기도가 응답되고 믿지 않으면 기도의 응답은 없습니다. 믿으면 축복을 받지만 믿지 않으면 축복도 없습니다. 내가 죽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2000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사실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배를 사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갈2:20 말씀을 그대로 믿으십시오.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어떠하든지 성경대로 나는 죽었다고 믿으시고 그 믿음대로 육신이죽어지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의지적인 굴복을 할 때 죽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를 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려면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 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쳐서 복종 시킨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표현으로 인내와 절제입니다. 인내는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이며 절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제와 관련하여 국민일보에 실린 예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을 지탱하는 ‘파워 엘리트’그룹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가정에서 여왕처럼 강력한 권한을 가진 엄격한 어머니로부터 ‘절제’와 ‘도덕적인 삶’을 교육받는다. 미국을 지탱하는엘리트를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라고 부른다. 와스프는 백인이며 앵글로색슨족이며 개신교인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와스프가 아닌 사람은 케네디대통령이 유일하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부시 전대통령과 부인 바바라여사도 대표적인 와스프그룹이다. 한번은 부시의 동생 조나단이 야구경기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며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제가 홈런을 쳤어요” 그러자 어머니 도로시가 엄하게 꾸짖었다. “네 자랑은 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네 팀이 어떻게 됐느냐는 것이다. 개인보다는 전체를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단다”지도자는 개인보다 전체를 생각한다. 지도자의 권위는 절제와 희생의 삶에서 나온다.”
  저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 성도들은 미국을 움직이는 파워엘리트 그룹인 와스프처럼 영적인 훈련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들이 여왕처럼 강력한 권한을 가진 어머니들로부터 절제와 도덕적인 삶을 교육 받았던 것처럼 나는 그렇게 목회하고 있는가를 돌아봤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인생의 열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선택에 실패를 합니다.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을 선택할 줄 몰라서 실패하는 경우보다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지만 육신이 원하는 것을 쳐서 복종시키지 못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주님에게 완전히 정복당하면 죽어집니다.
  주님에게 정복당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살아서 육신의 일을 행합니다. 그 결과 육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에게 정복당하면 영의 일을 하게 되고 영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럼 주님에게 완전히 정복당하는 방법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첫째, 주님의 다루심으로 육신이 초죽음이 되면 주님에게 정복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복하셔서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 사역의 열매, 영혼의 열매, 기도 응답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환경을 적당하게 안배하셔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아픔이 있기에 힘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신으로 충만하면 주님에게 정복당하고 육체는 죽어집니다. 성령님은 지배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를 지배하십니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마가에 다락방에 모인 120명에게 임하시자 그들의 언어가 지배당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였던 핍박자 사울에게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가 지배를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지배하시면 우리는 죽어지고 그분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마치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하듯 성령님은 우리를  지배하셔서 우리의 죽음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마경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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