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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하시는 하나님 (삿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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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본문을 중심하여“시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리므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험일 것입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부담이 됩니다.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아마 방학일 것입니다. 여름 방학, 겨울 방학, 봄 방학 등 방학을 한다고 하면 학생들은 신바람이 납니다. 그렇다 하여 방학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또한 시험이 없다면 학생이 학생답게 되겠습니까? 시험이 있으므로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게 되고 부족한 부분의 실력을 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이 없으면 실력이 증진 되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습니다. 부담이 되어도 시험이 있으므로 실력을 키워 학생다운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통해 원하는 대학에도 들어갈 수도 있고, 또한 잘 치른 시험을 통해 장학생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실력이 쌓이면 졸업한 후에는 그 사람의 길이 환하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험이 사람의 장래를 밝은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시험이 있습니다. 질병의 시험, 사업실패의 시험, 핍박의 시험, 등등 갖가지의 시험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험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시험은 있습니다. 이러한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말씀이 반복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인 야고보서 1:13~16에는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하셨습니다. 같은 성경인데 전혀 상반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글에는 둘 다 같이 시험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시험과 본문의 시험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본문의 시험은 그냥 시험 즉 테스트(test)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1:13에 기록된 시험은 테스트가 아니라 유혹(tempt, temptation)입니다. 야고보서 1:13의 말씀을 바로 번역한다면“하나님은 악에게 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유혹을 하지 아니 하시느니라”고 해야 합니다. 시험과 유혹은 다릅니다. 유혹은 마귀가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넘어뜨려 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느 장로님, 권사님 부부의 아들인 의사가 병원단합대회를 하는 장소인 어느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그만 유혹에 빠졌습니다. 예쁜 술집 아가씨의 유혹에 빠져 그 색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사는, 결혼에 실패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기가 막혀 야단을 칩니다.“야, 이놈아. 술집 색시에게 장가가라고 그렇게 고생하며 공부시킨 줄 알았느냐? 야, 이 못된 놈아!”“부모님 그러나 저는 결혼합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이 아들의 마음을 좀 바꾸어 보려고 목사님을 모셔왔습니다.“목사님, 이 답답한 놈을 좀 보십시오. 글쎄, 술집 색시에게 장가를 간답니다. 그것도 아들이 둘이나 있는 여자한테”그 말을 들은 아들이 말했습니다.“목사님, 어떻게 장로님, 권사님이 되어서 저런 말씀을 하십니까? 장로님이고 권사님이면 불쌍한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야지, 술집 색시라고 사람을 천대하면 되겠습니까? 다 같은 사람인데 저렇게 차별을 하면 되겠습니까?”목사님이 그 말을 들어보니 그럴 듯 했습니다. 결국 이 의사 아들은 아이가 둘 있는 술집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행복했겠습니까? 불행했겠습니까? 여러 남자를 사권 여자라 한 남편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 의사가 얼마나 비통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유혹에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들릴라가 삼손을 유혹한 것이지 시험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빠지니 눈이 뽑히고 망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시험하지 않고 유혹합니다. 우리를 함정에 빠뜨려서 완전히 우리의 등불을 끄려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우리를 시험에 들 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셨는데, 그 때의 시험도 유혹입니다.“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인도해 주세요.( . .... .lead us not into temptation)라는 것 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유혹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혹에 빠지면 반드시 망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 시험하시는 이유 두 가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1. 전쟁을 가르치기 위한 시험입니다.

1절~3절까지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쟁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히위 족속, 가나안 족속, 블레셋 다섯 방백, 시돈 족속을 남겨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전쟁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일까요? 이 땅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했던 조상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났고, 가나안에 정착한 그 후손들은 전쟁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나라가 쳐들어 와도 속수무책이고 큰 나라가 쳐들어오면 아예 싸울 수가 없는 유약한 백성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전쟁을 가르쳐 강한 하나님의 백성, 무적의 백성들로 훈련시키기 위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약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강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어린 소년 다윗에게 이리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물맷돌로 이리를 쳐서 쓰러뜨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자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사자도 물맷돌로 쳐서 쓰러뜨리고 사자가 움켜가는 양 새끼를 건져내었습니다. 거대한 암곰이 와도 물맷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단련된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장수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골리앗 너는 오늘 죽었다. 사자도 치고 곰도 쳤는데 네까짓 것”하며 달려가 단숨에 골리앗을 쳤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정신과 육신이 잘 단련된 강한 젊은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들어 귀하게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품은 약자의 도피가 아닙니다. 강군을 만드는 훈련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한없이 사랑하십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도록 할 만큼 우리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그의 자녀들을 약자로 키우시는 분은 결코 아니십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키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 당부하시기를“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여호수아 1:6~9)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기를“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명기 32:10~12)라고 하셨습니다. 눈동자처럼 지키시되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는 것 같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조류학자들에 의하면 어미독수리는 새끼독수리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그 새끼독수리를 등에 업고 높은 창공에 올라가 그냥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놀란 새끼독수리는 죽지 않고자 사력을 다해 날갯짓을 합니다. 그러다가 지쳐 땅에 떨어질 때쯤 되면 어미 독수리는 다시 신속히 내려가서 그 새끼독수리를 다시 등에 업고 창공을 납니다. 얼마의 휴식시간이 지나면 다시 떨어뜨립니다. 새끼독수리는 또다시 죽지 않고자 사력을 다해 날갯짓을 합니다. 그러다 지쳐 땅에 떨어질 때쯤이면 어미독수리는 또 다시 신속히 내려가서 그 새끼독수리를 등에 업고 창공을 날며 새끼독수리를 쉬게 합니다. 이렇게 훈련된 새끼 독수리는 강한 독수리가 되어 새 중의 왕자로 등장한다고 합니다.“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라는 신명기 32:11의 말씀이 이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단순한 세상이 아닙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험한 세상입니다(벧전 5:8). 거센 파도가 넘실거리는 풍파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하면 아니 됩니다. 연약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강해야 합니다. 인간의 육신이나 영혼이 강해지려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즉 연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강군은 강한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같은 방법 즉 고난으로 온전케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5:7~9에“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상도 할머니 몇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한분이“어이 예수도 죽었다 카데.”하자 다른 할머니가“왜 죽었다 카도?”그러자 다른 할머니가“못에 찔려 죽었다 카데.”그 말을 들은 다른 할머니가“어이구, 그 양반 머리 풀어헤치고 맨발로 돌아다닐 때 내 알아봤다.”이때 아무 말도 안하고 있던 또 다른 할머니가“근데 예수가 누고?”하고 물었습니다. 한 할머니가“몰래, 우리 며늘 아이가 아부지 아부지 케사이 사돈 어른 인갑지 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맨발로 다니다가 못에 찔려 죽으신 본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구원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셨다면 우리들이 어찌 예외이겠습니까? 모든 온전함은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만 가능합니다. 고난 없이 온전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지식이 그렇고, 운동선수들의 높은 기량이 그렇습니다.

어제 한 일간지에 이러한 기사가 실렸습니다.“박주영 박지성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한국축구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고 있는 두 축구 스타의 성장 배경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여러 번의 난관에도 포기하지 않고 한결같이 노력하고 끊임없는 연습으로 실력을 키웠다.”라고 했습니다. 박지성 선수는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를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를 오라는 대학이 없었고, 가려해도 받아주는 대학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감독이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명지대 감독에게 부탁을 해서 대학팀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박지성은 끊임없이 노력하며 연습한 결과 이제 세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캐나다의 토론토에 유명한 수족관이 있는데, 희귀한 물고기가 많아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옵니다. 한번은 그 수족관 기사들이 태평양 연안의 희귀한 물고기를 여러 종류 잡아서 물통 속에 넣었습니다. 넣되 태평양 물을 담고 온도도 태평양 온도와 같이 유지하며 두 주일의 여정 끝에 토론토에 도착을 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물고기는 모두 죽어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1년을 연구한 후 다시 태평양쪽의 희귀한 물고기를 잡아 물통 속에 넣었습니다. 이번에는 물통마다 쓸모없는 문어새끼 같이 발이 많은 것을 물통마다 한 마리씩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괴물 같은 것이 잡아먹을 듯, 쫓아다니니 물고기가 쉴 수가 없어 밤낮 긴장하여 움직이며 돌아다닙니다. 이렇게 토론토 까지 왔더니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의 물고기들은 왜 죽었을까요? 그 물고기가 살던 바다는 물결이 거세었습니다. 그러므로 물고기들이 항상 물결과 투쟁을 했습니다. 또한 약육강식의 세계인지라 큰 고기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항상 정신을 차리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던 고기들은 물결이 없어졌습니다. 잡아먹으려는 원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너무 편안하니 운동부족으로 보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결과는 삶의 승리입니다. 삶의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하시고자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 속에 고난을 통한 충격과 자극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에는 시험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십자가의 군병들입니다. 험한 세파와 싸워야 하는 군병들입니다. 사악한 영들과 싸워야 하는 군병들입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강군(强軍)이 되어야 합니다. 강군이 되려면 강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즉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본문에는 시험이라 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염려와 근심과 고난의 바람이 불어와도 신앙인의 자리를 잘 지키시며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쯤 시골은 밀 보리타작이 끝났을 무렵입니다. 수확을 할 때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방법이 바람입니다. 자연의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키를 가지고 알곡을 가려냅니다. 키란, 곡식을 담아 공중으로 띄웠다 받았다 하면서 바람을 일으켜 알곡만 남기고 쭉정이나 티끌검부러기는 날려 보내는데 쓰는, 앞은 넓고 평평하게, 뒤는 좁고 우긋하게 엮은 도구를 가리킵니다. 이때 멀리 날아가는 것은 쭉정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곡입니다. 알곡은 주인이 사랑합니다. 고이 관리합니다. 시장에 내다 팔아도 고가에 팔려 나갑니다.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야고보서 1:12)하셨습니다.


2. 신앙생활을 저울질하시기 위한 시험입니다.

본문 4절에“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고 하셨습니다.
사사기 2:21~23에는“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대로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를 보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시험 문제는 성경이고, 답안은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딸들이 예쁘니까 그들을 아내로 삼고 또 자기 딸들을 이방인에게 보내어 이방인들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입니다.

시험에 떨어지자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셨습니다. 만일 거기에서 이겼더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복을 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신 다음에는 그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를 확인하십니다. 하나님은 주일 낮에 주신 말씀, 주일 밤에 주신 말씀을 가지고 한 주간동안 그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를 보고 계십니다. 거기에 합격하면 상과 축복이 따릅니다. 불합격하면 손해가 크고 상처가 큽니다.

창세기 2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까지 가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예’라고 되어 있는데, 영화를 보면“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 이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시고는 왜 이러십니까? 제 자식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시고는 지금 죽여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시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저는 못합니다. 저는 못합니다.”하고 따집니다. 밤새도록 따져도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시니 할 수 없이 순종 합니다.

그래서 삼일 길을 갑니다. 사환들을 두고, 아버지는 불을 들고 아들은 장작을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을 오르던 아들이“아버지,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것을 모르고 물으니 아버지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심코 한 말이“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의 말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가 바치지 않는가, 말씀대로 순종 하는가 불순종하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정상에 올라가서 장작을 쌓아놓은 다음“아들아, 미안하다. 하나님이 너를 원하신다.”하며 밧줄로 묶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 같으면 절대로 묶이지 않을 것입니다.“아버지가 백세가 넘더니 노망이 나셨구나.”라고 하며 반항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아들을 묶어놓고 목을 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식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백세에 낳은 자식인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아들의 목을 치려는 순간“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시면서 다급하게 두 번 거듭 부르셨습니다.“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나를 위해 제물로 드릴 수 있으니 됐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아하, 하나님께서 이것을 예비 하셨구나.”이때에 생겨난 말이“여호와 이래”입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험당할 때 주님께서는 피할 길을 벌써 예비해 두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순종하면 새 길이 열립니다.“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하셨습니다.
그 숫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라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가 네 독자 이삭도 내게 아끼지 않았 니 네게 큰 복을 주리라.”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시험에 이겨야 하겠습니다. 시험을 잘 치르면 영광이 있습니다. 상이 있습니다. 칭찬이 있습니다. 학생이 시험을 잘 치르면 상과 장학금이 주어집니다. 직장인이라면 승진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동일하십니다.“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야고보서 1:12)하셨습니다.

몇 년 전 우리교회에 부흥회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첫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원에 한때 비가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아 온 땅이 메말라 곡식이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군민들과 공무원들이 군수를 찾아와서 군수가 산에 올라가서 산신령에게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수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어떻게 기우제를 지내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고 하자 군수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비가오지 않아 군민이 다 죽게 되었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면 군수자리에서 물러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우제는 지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군수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지리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하나님,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비를 주시옵소서.”금식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습니다. 삼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졌습니다.

군수가 없어졌으므로 모두 군수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지리산에서 기도하던 군수를 발견했습니다.“군수님, 내려가십시다. 지금 비가 너무 많이 옵니다.”하면서 군수를 모시고 내려 왔습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기를“하늘의 비를 마음대로 오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로 모두가 그 군수를 아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그분이 훗날 전남 도지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그분이 우리 아버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형은 토지개발공사 사장과 농수산부 장관을 지낸바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그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직장상사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어서 손해를 많이 볼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새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하셨습니다.


시험을 잘 치른 사람에게는 영광이 있습니다. 시험은 시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광으로 나아가는 관문입니다. 하지만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시험은 다 있습니다. 시험은 그 사람을 연단시켜 세파를 이길 수 있는 강한 힘을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마다 시험을 주십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다윗도 혹독한 시험을 치른 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시험을 통해 순종에 대한 그 사람의 신앙상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을 하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이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시험을 잘 치르므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 가운데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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