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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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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어느 교수님의 모친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강의하러 나오셨던 첫 날 그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당신의 모친 장례에 조의를 표해 준 데 대하여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그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저도 한 교회의 담임목사인 까닭에 다른 사람의 장례식도 많이 집례해 보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할 때도 많았지만, 정작 제가 모친상을 당하게 되니까 그 상황에서는 저도 그저 위로를 받고 싶은 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라고 하시면서, 그런 위로를 다른 목사님들과 교인들 그리고 신학생들로부터 받게 된 것을 감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서로 위로하고 위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성도들 간의 교제를 통하여 누리게 되는 귀한 은혜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후 약 1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의 첫머리 인사말에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위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두 편지의 어간에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에 대하여 특별히 강하게 체험한 바가 있었고 또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바람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과 바울, 그리고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인들 사이에서는 어떤 영적 교감과 온정이 오가고 있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성도들 사이에서 나누어야 할 위로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1. 성도의 위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굳게 믿는 가운데 그 어떤 환난에서도 나눌 수 있는 위로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발신자로서의 자기 신분을 밝히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는 것은, 나중에 언급될 이단 교사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이 고린도후서가 씌어질 당시 사도 바울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 인사에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모데가 고린도후서의 공동 발신인은 아니었습니다.
  “아가야”는 오늘날의 남부 그리스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로마제국 당시에는 고린도가 이 아가야 지방의 수도에 해당되었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함께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초대교회 시절에 사도들이 보낸 편지가 그 해당 교회뿐 아니라 주변 지역의 다른 교회들과 성도들에게도 회람되어 읽혀졌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일단 발신인과 수신인을 서두에서 언급한 후,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비는 축복의 인사를 했습니다.
  “은혜”는 원래는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내려주시는 축복의 본질을 뜻합니다.
  “평강”은 바로 그런 은혜를 받음으로써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축복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한 사람의 한 마디 말로 한 지방 전체 교인들을 한꺼번에 다 축복한다는 것은 그저 의례적인 인사로만 여겨지기 쉬운 것이며 어쩌면 그저 공수표처럼 보이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도 바울의 인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축복의 인사는 하나님 살아 계심을 근거로 한, 아주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바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에게 은혜와 평강을 축원했습니다.
  즉 이 축복 인사의 구구절절마다 ‘하나님’이 들어간 것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축복하는 사도도 하나님의 뜻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축복받는 교회와 성도들도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 역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 인사의 진실성과 효율성 역시 전적으로 그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전적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으면 이 축복 인사 전체가 완전 무효요 빈말이요 헛소리가 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 축복 인사는 100퍼센트 진실하며 완전무결하며 그 효과가 100퍼센트 충만하게 발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하나님 살아 계심을 틀림없이 믿는 사도가 하나님 살아 계심을 틀림없이 믿는 성도들에게 이런 축복을 내릴 때에 그것은 결코 인사치례나 빈말이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실속 있는 인사였고 알짜배기가 있는 진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과 4절 말씀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계속하여 사도 바울은 그로 하여금 그처럼 진짜 축복 인사를 할 수 있도록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소유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사람이 알 수 있게 된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즉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서만이 사람이 믿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참 하나님,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또한 “자비의 아버지”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 하나님은 죄인 된 사람을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자비하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이 세상의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매사를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우시는 위로입니다.
  그래서 ‘위로자’(보혜사, the Comforter)라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별명 중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다른 성도를 통해 받게 되는 모든 종류의 위로도 그 원천을 따지면 어디까지나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런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실 수 없는 경우란 있을 수 없을 것도 자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하나님을 믿게 된 성도는 이처럼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며 동시에 위로를 체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과 마찬가지로 위로 역시 오직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그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 살아 계시지 아니하면 그 어떤 감동스러운 말도, 그 어떤 부드러운 소리도 아무 쓸모없는 인사치례, 빈말, 헛소리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사도의 축복도, 목사의 기도도, 성도의 위로란 것도 그야말로 빈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로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진짜로 믿는 성도가 서로 나누는 위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 주시는 위로를 서로에게 체험하게 해 주고 일깨워 주고 누리게 해 주는, 실로 든든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 삼풍 백화점이 무너진 그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다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그 사고를 당한 사람들 중에는 예수 믿는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유가족들이 자기 교회의 어떤 목사님을 찾아와서 그 당한 일을 두고 하소연했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나중에 어떤 지면에서 “그때 도무지 그 유가족들을 위로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로 위로하겠습니까?”라고 회상하시는 것을 제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마는, 저는 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잘 믿는 신자라도 그런 불상사를 당할 때 일단 혼란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 목사가 아무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저로서는 정말 이상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불신자 세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위로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위로할 무슨 건더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는 목사와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는 성도 사이라면 그런 상황이라고 해서 위로할 말이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모든 환난에서도 위로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그 사고가 그런 하나님께서도 위로하실 수 없는 비극적인 불행이요, 그런 하나님께서도 무어라 설명해 주실 수 없을 만큼 불가해한 난제가 된다는 말입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가 이 경향교회에 온 이후로 그 짧은 기간 중에도 정말 사람의 위로 가지고는 그 어떤 위로도 줄 수 없는 일들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건강하게 일하시던 가장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만 가족들도 있었고, 젊은 나이에 불치의 병을 앓다가 결국 먼저 소천하신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 기운마저 잃어버린 어린 딸과 남편도 있었습니다.
  그런 유가족들을 세상에서 누가 정말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직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는 목사이고 역시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는 유가족들인 까닭에, 그 사이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충만한 위로가 나누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능히 서로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바로 믿기만 하면 그 아무리 위로가 불가능해 보이는 최악의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위로할 수 있고 넉넉히 위로받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설사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과 재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처럼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는 자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진짜 위로, 정말 효력 있는 위로를 주고받음으로써, 매사에 ‘하늘의 아버지와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평강’을 마음껏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의 위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에 같이 참예함으로써 더욱 뜨겁게 나눌 수 있는 위로입니다.

  5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4절에서부터 사도 바울은 ‘환난’이란 말과 ‘위로’라는 말을 나란히 두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이제 5절 이하에서는 더욱 본격적으로 ‘고난’이란 말과 ‘위로’라는 말을 나란히 붙여서 구구절절 쓰기 시작합니다.
  그 고난은 그냥 세상에서 당하는 불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기서 말하는 ‘고난’이란 ‘화육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당하신 고난’이며 또한 ‘그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이 자연히 받게 되는 고난’인 것입니다.

  바로 이 고난이야말로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진짜 위로와 정비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는대로, 성도는 만약 그리스도를 인하여 받는 고난이 없으면 위로 받을 일도 전혀 없습니다.
  신앙생활 잘 해 보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고난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때 자연히 받게 되는 고난이 있어야만 위로받을 자격과 기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 그리스도 위해 기꺼이 고난 받을 각오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체험해 볼 길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처럼 특별한 위로를 ‘넘치도록’ 받은 것은 오직 그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역 중에 받은 고난이 먼저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받은 위로는 자기 혼자 받고 혼자 힘을 얻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환난을 통해 먼저 받은 위로는 곧 그가 다른 성도들을 위로하는 데 또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바울의 위로가 전해질 때 그 꼭 같은 “위로가... 역사하여” 그 고린도교회 성도들 역시 꼭 같은 “고난을.. 견디게” 하는 연쇄 작용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더욱 자세히 설명합니다.
  8절 이하 11절에 기록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의 내막을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기록을 참조해 볼 때, 그것이 그가 소아시아 지역의 전도 여행 중에 당했던 핍박과 환난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인내력 가지고 견디기에는 이미 한계를 훨씬 초과한 고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생각될 정도였고 아예 “큰 사망” 그 자체나 다름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하고, 죽을 준비만 하고 있던 상황에까지 도달했던 환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이제와 회상해 보니 그것은 오직 바울로 하여금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성도들을 장차 죽음에서도 능히 살리실 하나님이시라면 세상 환난에서 건져 주시는 정도야 너무나도 간단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죽음에서도 부활시켜 주실 하나님으로 정말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 환난에서는 넉넉히 구원해 주시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믿고 의지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처럼 죽음 같은 환난 중에 오히려 그 죽음보다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던 사도 바울은 “그가...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한번 맛본 위로가 바울로 하여금 앞으로 더욱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할 수 있게 해 준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환난을 과시하는 것 결코 아니라, 성도를 환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얼마나 큰지를 증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위로, 자기를 그 죽음의 환난에서도 살려 주셨던 그 하나님의 위로를 꼭 같이 의지하라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위로할 뿐 아니라, 고린도교회 교인들 역시 복음 위해 고난 받는 자들을 기도로 도우라고 권고했습니다.
  그처럼 “기도로 얻은 은사” 즉 그처럼 사도를 위해 기도하고 그 응답으로 얻게 된 은혜가 바울의 복음 사역에 넘치게 될 때, 그 결과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 더욱 많아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성도들의 기도는 바울의 사역에 엄청난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받은 위로는 그냥 하늘에서만 직접 내려온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그를 기억하고 기도해 주는 성도들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를 위로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은 사도라는 자격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의 환난을 통과하던 중에 받은 위로가 그처럼 컸던 까닭에 같은 환난을 당하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위로하는 일에 있어서 교회 직분의 위아래나 순서라는 것은 성도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느라 당하는 고생과 그 때문에 또 그만큼 받는 위로의 체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남을 잘 위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동병상련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큰 환난 당한 자일수록 더 크게 남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중에 서로 위로할 수 있는 교우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해 주는 위로가 별 효력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해 주는 위로란 듣기에도 어색한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약한 처지, 못난 꼴을 당하고 있으면서 남을 위로해 보았자 오히려 창피한 일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신자 세계에서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그런 방향의 위로가 오히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위해 고생을 겪는 중에도 위로 받아본 체험이 있는 성도의 위로는 슬픈 자에게 진짜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승리한 경험이 있는 성도의 위로는 다른 약한 성도를 능히 살려내는 힘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헌당헌금 때문에 죽을 고생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뢰함으로써 서원했던 것을 이행하는 장로가 되어야만, 꼭 같은 어려움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할 때 그 위로가 힘이 있지 않겠습니까?
  불신남편에게 온갖 핍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끝내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해 본 아내가 되어야만, 아직도 그런 슬픔과 눈물 중에 있는 교우들을 제대로 위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병이나 혹은 불치의 병을 앓는 중에도 조금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큰 사망에서 건지시고 이후에도 또 건져 주실 것’을 믿고 소망할 줄 아는 성도라야만, ‘같은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그 위로가 역사하여 견디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성도들은 자기가 잘된다고 남에게 보란 듯이 위로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가 먼저 겪는 고난 때문에 더욱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위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이 먼저 환난 받는 것은 다른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로부터 먼저 위로를 받는 것도 역시 다른 성도들을 ‘위로해 주기 위함’입니다.
  단순한 동정심에서 나오는 정도의 위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의 위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냥 말로만 하는 인사치례의 위로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의뢰하고 견디어 냄으로써 건져 주심’을 실제로 겪어 본 선험자만이 줄 수 있는 뜨겁고도 강력한 위로를 서로 나누어 줌으로써, 끝내 그런 도움과 간구를 통하여 많은 감사가 피차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예수 믿으면 환난이나 고생이 저절로 사라지는 줄 아는 사람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는”(마 5:45) 하나님께서 때로는 의인에게도 환난이 일어나게 하시며, 또한 신자는 예수 잘 믿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특별히 더 많이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자로 하여금 바로 그런 환난과 고난들을 통하여 잘 연단 받고 더욱 영육 간에 성숙하고 더 큰 복을 누리도록 섭리하시는 분이시며, 그러기 위하여 그 과정에서 결코 탈락하지 않도록 적절하고도 충분한 위로를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위로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셔야만 성도는 어떤 환난에도 시험에 빠지지 아니하고 그 원래의 목적, 즉 연단과 성화의 성장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오묘하고도 충만한 하나님의 위로는 오늘도 성도들을 통하여 서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남을 위로해 줄 수 없는 불가능한 경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어떤 환난의 경우에도 다른 성도를 위로해 줄 수 있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의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는 남을 위로해 줄 힘이 없다는 경우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힘은 내가 남보다 더 잘되어서 생기는 힘이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은 고난을 받을수록 더욱 ‘넘치게’ 먼저 얻은 위로에서 나오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그 어떤 환난에서도 넉넉히 위로를 받고, 또한 자기 곁에 있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그 먼저 받은 넘치는 위로를 가지고 능히 위로해 줌으로써, 서로 함께 소망을 더욱 견고히 하고 서로 같이 사망의 권세를 끝까지 이기고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  기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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