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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바다, 열려라! (막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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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먼 훗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물려줄 가장 소중한 유산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내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가장 물려주고 싶은 유산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믿음의 유산’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도 아이들에게 믿음을 소중한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말로만 그렇게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지 라고 생각을 하신다면 정말로 그렇게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보여 주시란 말입니다.  내 부모는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이셨다는 것을 여러분의 삶의 모습 속에서 자녀들에게 보여 주시란 말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선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의 형편이 어떻든, 우리의 여건이 어떻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바리새적인 종교꾼의 모습을 보여 주지 마십시오.  우리는 디모데와 같이 거짓이 없는 신실한 믿음의 모습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보여 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은 운명의 노예가 아닙니다.  단지 자기 마음의 노예일 뿐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그 마음에 나아갈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심령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오늘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면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미래란, 그 마음에 나아가는 길을 찾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막혔는데 무슨 미래가 열립니까?  마음이 막혔는데 무슨 장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러나 결코 경험하지 말아야 할 최대의 비극이 있다면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나만의 폐쇄된 공간 안에서 혼자서 외로워하다가 외롭게 죽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유형의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들을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고통 가운데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화가 전혀 불가능하여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던 그가 어느 날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연민으로 이 사람을 쳐다보시다가 한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에바다”
‘에바다’라는 말은 아람어로 “열려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가 닫혔고, 입술이 닫혀졌던 이 사람에게 주님께서 한 말씀을 하십니다.  “에바다, 열려라.”

주님의 말씀 앞에 이 사람의 귀가 열렸습니다.  입술이 열렸습니다.  그는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 것입니다.  극적인 기적의 상황을 본문 3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그는 분명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  우리가 구약의 이사야서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명한 선지자 이사야를 백성들에게 보내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는 물음 앞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야할 백성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소원하는 것은 네가 가서 이 말씀을 선포할 때에 일어나게 될 그 기대는 이것이다.  나는 저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고침 받기를 원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적인 장애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 장애일 겁니다.  그리고 정신적 장애보다 더 불행한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장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사람들….  보십시오.  지금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외롭고, 그래서 답답한 자기의 세계 속에 폐쇄된 채 인생을 살고있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위에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이 들어야 할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그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이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셔서 다시 한번 세상을 고치고자 하십니다.  치유하고자 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했던 동일한 말씀의 능력으로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바다!”  “열려라!”  그리고 그는 열렸습니다.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렸습니다.  가슴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이처럼 귀가 열려야 하고 마음이 열려야 할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닫혀진 세계 안에서 괴롭게 외로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넓게 보지 말고 바로 나 자신을 보십시다.  닫혀진 내 인생의 벽, 내 인생의 관에서 나도 어떻게 탈출하여 말씀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이 사람에게 어떻게 기적을 베푸셨는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바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사람을 향해 치유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명령 이전에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해 가셨는지,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이 교훈을 통해서 동일한 가르침을 배울 수가 있다면, 그리고 오늘 닫혀진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불행한 이웃들에게 예수님처럼 접근 할 수가 있다면 이웃들의 삶이 열리는 기적이 지금도 일어날 수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웃들의 삶의 세계가 열리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해 가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3절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이 단어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로 데리고.  예수님은 많은 군중 가운데서 이 사람을 분리해 내셨습니다.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공개적인 접촉이 아니라 개인적인 접촉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이 듣지 못하고 말이 어눌한 고통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 사람을 다루는 과정에서 이 사람이 당황하지 않을까?  이 사람의 처지를 배려해서 주님은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분리해 내셨을 가능성이 많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 이 사람의 처지를 깊이 아시고 이 사람을 개인적으로 접근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고 드디어 치유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어떻게 치유하셨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접근하실 때에 한가지 방법을 고정적으로 쓰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 맞는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을 위해 치유하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먼저, 손가락을 양 귀에 넣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에 보면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양 손가락으로 그의 귀에 대셨을 때 이 사람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침을 묻혀 그의 손으로 혀에 손을 대시는 그 순간, 이 사람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주님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순간, 비로소 그는 뭔가를 느꼈을 겁니다.  “아, 내 귀에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모양이다.”  말을 하지 못했던 그의 혀, 쓸모가 없었던 그의 혀, 고통하고 있었던 그의 혀에 예수님의 침 묻힌 손가락이 닿는 그 순간.  “아, 내 혀에도 무슨 일인가 생기겠구나.”  그의 사랑 속에, 그의 친절 속에 그의 구체적인 만짐 속에서 이 사람은 주님을 향한 어떤 기대감을 가질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방법으로 개인적 관심 속에서 개인적으로 필요한 처방을 가지고 접근해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기에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주님의 개인적 관심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막연히 세상의 빛이 아닙니다.  그는 추상적으로 그냥 세상의 빛이다 라고 선포된 분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 각 사람에게,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비치는 빛”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은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분은 나의 처지를 아시고 나의 갈등을 아십니다.  나의 고민을 아십니다.  나의 좌절을 아시고 내가 숨기고 있는 나만의 비밀을 아십니다.  그리고 나만의 두려움과 내 불안을 아시면서 주님은 개인적으로 내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면서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늘 제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처지, 내 절망, 내 고독, 내 눈물을 아시고 나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내게 다가오시면서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은 나를 고칠 수가 있는 분입니다.  이웃을 고칠 수가 있는 분입니다.
“나 어느 날 외로와서 눈물로서 아뢰일 때
주님께서 나의 맘 아시고 위로하여 주셨네”
나의 눈물을 보시고 내 마음을 아셔서 위로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이웃들이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인생이 새로워지는 그런 경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도 주님처럼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서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들에게 개인적 관심과 개인적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기적은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이웃들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세상이 새로워지는 위대한 기적을 소망하십니까?  이 시간 이후로 이웃에게 개인적인 접촉을 시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하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본문 34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하늘을 우러러”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고치기 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먼저 기도합니다.

여러분, 저는 하늘의 도움이 필요 없을 법한 유일한 한 분이 있다면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하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예수님의 이런 고백을 접하게 됩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그는 항상 아버지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의 봉사의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서운 비극, 아주 야릇한 비극 가운데 하나가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다는 유혹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특별히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합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하나님의 도움과 상관없이 하는 것입니다.  워낙 이 사람이 능력이 있으니까, 열정이 있으니까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의 열정일 수가 있습니다.  종종 이런 유형의 봉사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나중에 결과적으로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목표로 했던 것과는 상관이 없는 자기의 성취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은 중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쉽게 그 봉사하는 일 앞에 좌절해 버리고 맙니다.  봉사하는 사람일수록, 선교하는 사람일수록,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하늘의 도우심을 지속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비극, 우리는 이 비극 속에 빠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의 도우심을 바라보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유일한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향해서 도우심을 구하면서 이웃에게로 접근해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 속에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압니다.  그것을 내 힘, 내 자원, 그리고 내 정성만 가지고 하다보면 조금 하다가 쉽게 지쳐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압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새로운 능력이 임할 겁니다.  내 속에서 용솟음 치는 성령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 능력, 그 기쁨으로 이웃들을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의 삶 속에 그들의 삶이 열리는 기적을 제공하기를 원하신다면,

세 번째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34절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그 다음에 우리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가운데 필립스라는 번역본에 보면,  “탄식”이라는 말이 그냥 탄식이 아니라, “아주 깊은 탄식”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냥 탄식한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탄식을 하신 겁니다.  왜 깊은 탄식을 하셨습니까?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시면서 상대방과 동일시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여기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아픔, 얼마나 괴로울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고통, 얼마나 괴로울까?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한 그 아픔, 얼마나 심할까?  견딜 수 없는 그의 고독, 그의 소외, 그의 단절의 아픔, 그 아픔을 주님은 자기의 아픔처럼 함께 느끼시면서 한숨을 내쉬고 계십니다.  탄식하십니다.  본문에는 없지만 아마도 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웃들과 고통을 더불어 함께 느낄 수가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의 고통과 더불어 함께 같이 그 고통을 느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하실 수 있었던 주님의 능력은 먼저는 그 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지만, 또 하나는 이웃들과의 공감의 마음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대제사장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이중 부정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강한 긍정이 됩니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우리와 더불어  연약함을 함께 체휼하신다.  그런데 이 체휼이라는 단어를 어떤 영어 번역에 보니까 “동정한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본래 ‘함께 느낀다, 더불어 같이 느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십니다.  여러분의 좌절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분노를 아십니다.  여러분의 속상함을 아십니다.  나의 고통, 나의 눈물을 아십니다.  나의 방황을 아십니다.  나의 답답하심을 아십니다.  나의 억울함을 아십니다.  나의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아십니다.  나의 무기력함을 아십니다.  내 어쩔 수 없는 좌절을 그 분만은, 그분만은 당신의 그 아픔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고칠 수가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심리학자로 인기있게 활동하는 분 가운데 ‘레오 버스카글리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날, 할아버지 한 분이 암 진단을 받습니다.  그런데 암 진단을 받은 그 날부터 이 할아버지가 난폭해 지셨습니다.  성격이 갑자기 난폭해 진 겁니다.  식구들을 향해서 욕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욕을 퍼붓고,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고, 병실에 입원해서도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간호원과 의사들에게도 포악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도와야 하느냐?  옛날 친구들을 들여보냈습니다만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소리를 내서 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이 사람과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들을 보내 보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을 보냈더니 목사님도 욕만 먹고 쫓겨났습니다.  카운슬러를 들여보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동네에서 이 할아버지가 가끔 만나던 동네 어린이 꼬마가 하나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왔습니다.  식구들이 반 호기심으로 “그럼 네가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만나 보아라.”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삼십분 이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 다음에 나오더니 이 할아버지가 변한 겁니다.  태도가 갑자기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지고 사람들도 만나시고 얘기도 하시고 변했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그 어린 소년을 붙들고 사람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너, 할아버지하고 무슨 얘기를 했니?”  그 소년이 아무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하고 이 삼십분 동안 너는 도대체 뭘했니?  그랬더니 그 어린 소년이 대답하기를 “저요,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이 할아버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면서 함께 우는 순간, 더불어 껴안고 울던 그 눈물 속에서 이 할아버지의 아픔과 질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을 때, 그 아픔을 함께 느낄 때 치유의 능력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웃들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왜 능력이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신 그 분, 그렇게 죽어야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고통을 받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그 분이 세상에서 가장 극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매달려 가장 처참한 고통을 받으시며, 가장 처절한 배신과 외로움을 경험하시면서 십자가의 한복판, 고통의 절정에서 “아, 내가 목마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나를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고통하며 부르짖으시며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분, 저는 그래서 십자가가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오해받음, 우리의 배신, 우리의 눈물, 우리의 죄악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이해하십니다.  거기 그렇게 내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쏟아내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십자가 앞에 오는 사람을 우리 주님은 구원할 수가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위로입니다.  십자가는 소망인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작자 미상의 「에바다 이야기」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을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나는 열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데가볼리 지방에서 살고 있었지요.
눈을 뜨면 맑은 햇살과 고운 새들을 보았지만, 이 세상의 소리는 하나도 들을 수 없었지요.
어머니의 따스한 음성도, 형제들의 고운 노래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요.
나의 삶은 절망이었습니다.
어느 날 유난히 햇살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던 날,
친구들이 내게 몰려 왔지요.
그리고 다짜고짜 나를 붙잡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 갔지요.
친구가 이렇게 손으로  말했지요.
너도 말 할 수 있어.
너의 좌절을 희망으로 바꿀거야.
들을 수가 있어.  들을 수 있어?
들을 수가 있다고?
미친놈들.  말할 수 있다고?  나를 놀리는 거냐?
나는 태어나서부터 이랬어.  나는 병신이야.  제발 그냥 그대로 놔줘.
그때 내 눈 안에 누군가를 볼 수가 있었지요.
그렇게 부자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좋은 옷은 입고, 훌륭한 가문의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러나 무엇인지 힘이 있어 보였지요.
막연히 이런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 이 분이 내 귀를 열고, 내 입을 열어 주실 지도 몰라.
그 분은 나를 보시자 마자 나를 따로 불러 세우시고,
아무도 몰래 왼손을 들어 나의 귀를 막으셨습니다.
어떠한  따스함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오른 손을 들어 침을 무치시고, 내 혀에 그 손을 대셨지요.
그리고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지요.
하늘을 보며 탄식하시며 눈물을 흘리며, 이 닫힌 세상이여, 이 막힌 사람들이여.
사랑치 못한 사람들이여.  답답한 형제들이여. 
귀가 있어도 말씀을 못 들으며, 입이 있어도 전하며, 찬양치 못하는 자들이여.
닫힌 마음을, 닫힌 가슴을, 닫힌 입을 열어라.  에바다.
천지가 깜깜해 지고 온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귀의 막힌 것이 열리고, 입의 맺힌 것이 풀렸지요.
아, 아. 아. 나의 말은 탄식을 토해놓고,
그렇게 그리던 말을 하며, 그리고 그렇게 그리던 소리를 듣게 되었지요.
할렐루야. 위대하고 전능하신 주,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의 찬양을 받으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음성을 들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쩌면 정말로 이 음성을 들어야 할 사람은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에바다!”
닫힌 폐쇄된 공간에서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런 이웃들.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고통까지도 어루만져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닫힌 마음과 세계가 열릴지어다.  에바다!  에바다!  열릴지어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임할지어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지어다!  에바다!”
이 말씀이 우리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을 믿으면서 이 한 주간도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주 철 목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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