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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 (롬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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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추석입니다. 옛날 농경시대를 살았던 선인들의 입에서는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나라와 민족마다 고유한 역사와 문화가 있고 거기 따르는 명절의 전통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逾越節)을 최대명절로 하고, 칠칠절(맥추절)과 초막절(장막절) 같은 절기를 지켰습니다(신 16:16). 이와 같은 성경의 절기는 모두가 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식과 전통을 지켜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명절과 그 의식은 사실상 하나님과 단절된 문화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고 비신앙적인 전통이 이어졌고, 이것을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고 하여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아 온 것입니다. 명절을 지키는 사람들이 제각기 고유한 전통에 따라 축제를 행하고 즐기는 일을 하지만 빠지지 않는 것이 어떤 대상에게 제사를 행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그 제사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본문 말씀 25절에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

I. 인간의 종교적 본성

「언어 없는 민족은 있어도 종교 없는 민족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구 위에는 수많은 종족이 살고 있지만 저들마다 제각기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풍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문명의 나라요 지성의 도시인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고 하였습니다(행 17:22).

(1) 신을 찾는 본성입니다.

바울은 아덴사람들에게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하고 전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그 마음속에 막연하게나마 신을 찾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마음속에 있는 종교성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사람이 신에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 19-20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2) 도움을 받고자 하는 본성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종교적 본성은 섬김의 대상을 찾는 것 뿐 아니라 거기에 의존하며 강력하게 도움을 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인간 스스로 연약성을 인정하고 자기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일을 제 마음먹은 대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큰소리 치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시간에 잠만 자는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마 26:41).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롬 7:24).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장담하던 사람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봉착하면 결국 무능한 자기를 인정하며 주저앉고 맙니다. 모든 사람은 신체적인 질고나 마음의 공허함, 그리고 죽음에 직면할 때 어디든지 손을 뻗치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하였으면 전혀 도울 힘이 없는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에게까지 무릎을 꿇겠습니까?(23절)

(3) 종교적인 행복감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종교적 성품 가운데 신의 뜻을 추구하고 거기에서 안위를 받는 일입니다. 비록 그 섬김의 대상이 인격적이지 못하고 그저 허무한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에 불과한 것인데도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하거나 그 신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 신이 책임져 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체념을 하든지 만족해하든지 마음속에 안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가치 없는 우상과 허무한 것에게 굴복하는 사람은 얼마못가서 그 바닥이 들어나게 되고 더 큰 허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사 46:6-7). 솔로몬 왕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전 3:11).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종교적 본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전한 섬김의 대상과 거기서 오는 종교적 희열이 아니고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3:9에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II. 변질된 종교성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본래의 심성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로마서 1:28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1-3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될 인간의 마음속에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가 주인으로 차지하고 있어서 그 행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고, 그 결과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 25절에도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변질된 종교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1) 자연을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고대 원시인들은 대부분 자연을 신성시하여 그것들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같은 천체들을 신비롭게 여기고 거기에 절을 하며 소원을 아뢰는 경우가 있고, 또는 오래된 나무나 큰 바위, 또는 높은 산이나 깊은 강물, 바다 같은 것도 사람에게 복을 주거나 화를 준다고 믿었습니다. 동물들도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많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래 천지와 만물을 지으실 때 그것들을 사람의 손에 맡기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목적에 맞게 이를 다스리며 관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창 1:28).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들어오고부터는 건전한 사고의 능력을 잃고 지배해야 될 자연 만물에게 종노릇을 하며 그것을 섬기는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21절에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22-23절에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시며 오직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출 20:3). 이와 같은 명령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주권자요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명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나 다른 신의 형상을 만들면 안 됩니다. 출애굽기 20:4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하고 타락할 때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을 섬겼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열왕들은 이웃 나라 이방인의 풍습을 좇아서 여러 가지 신상을 만들고 음행하듯 그것들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왕하 17:7-18).
오늘날도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게 기도하며 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와 같은 경우를 들어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사 44:9).

(3) 인간을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변질된 심성은 사람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과학이나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라 인간이 한없이 교만해 있어서 거의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9에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저희 신은 배”라고 한 말은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되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고대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땅에서 바벨탑을 쌓을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1:4에 보면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변질된 인간의 마음은 지식이나 기술, 또는 쌓은 업적으로 이름을 들어내며 공명심에 들떠 있는 것입니다.
옛날 다윗은 이와 같은 인간 세상의 타락한 상태를 보고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시 2:4). 성도는 오직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시는 성경 말씀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III. 찬송 받으실 하나님

25절에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타락한 인간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거나 심지어 자연과 만물 또는 금수와 버러지를 신으로 섬기며 경배하곤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홀로 찬송 받으실 분이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타락한 문화가 극에 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가 만연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 돌려야 된다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문명을 단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중생한 성도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찬미의 제사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히 13:15).

인간뿐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만물도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 돌리며 그 본연의 기능을 발휘합니다. 시편 19:1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이며 그 존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2)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7:24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만물과 세계의 모든 인류를 통치하시고 관리하시되 그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평화롭고 의롭게 공존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로우신 목적이 이루어지게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마 6:33). 역사상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거역하며 인간의 욕심이나 완력에 의하여 횡포가 자행될 때 세상은 불행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는 악순환이 거듭되었습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할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탄식한다고 하였습니다(롬 8:19-22). 그렇지만 역사는 언제나 주권자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지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진행되고 맙니다. 그것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수순이기 때문입니다(계 21:1-4).

(3)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사람들의 생각이 우둔하여져서 존귀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그에게 찬송 드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찍이 지혜자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하였고(잠 1:7),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은 가장 큰 복을 소유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잠언 3:15-17에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 경외하며 그에게 찬송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자들 두고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계 3:20). 시편 144:15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손 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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