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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별설교] 사랑하는 자여! (요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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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여!
본문 : 요한삼서 1-2절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오늘 말씀은 장로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요한은 가이오를 부를 때 그냥 이름만 부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이오’,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자여!’ 예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실 때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딸아’ 기도의 목표는 바로 이 음성 듣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나면 영적 곤고함과 피로가 싹 풀립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여러분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사실 이 기도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소원이며, 은혜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최상의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향한 기대와 소원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여기에 기초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거친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야 하는 위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광야를 걷는 것 같은 메마름을 견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깊은 바다 속에 빠진 것 같은 외로움과 고독 속에 몸부림 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를 견디게 하는 힘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손을 절대 놓지 않습니다.

성도를 향한 우리 목회자들의 기도도 이 세 가지입니다. 성도들의 영혼이 잘되어 행복하고, 범사가 잘되어 부요한 삶을 살고, 건강하여 큰 병 없이 살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건강하십시오. 여러분이 아프면 마치 제가 아픈 것 같고, 제가 기도 못 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 괴롭습니다.

목회자야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잠깐이지만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아파하는 것보다 더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본질이고, 사랑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셋 이면서 하나이다는 말이 우리 머리로 어떻게 이해되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사랑’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셋 이신 하나님을 묶는 끈은 바로 ‘사랑’입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사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멀리 옮기시옵소서”라 기도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죽음이 두려워서 입니까? 그렇다면 그에 비해 소크라테스나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소크라테스는 도망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독배를 마셨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일부러 죽음을 자초하여 갑옷을 입지 않고 전투에 임했고, 죽음의 순간에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파괴입니다. 성부 하나님과의 헤어짐입니다. 다시 만날 것을 알지만 자녀를 멀리 해외로 유학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짠하고 아픕니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천국에 보내고 남은 자의 슬픔은 어떻습니까? 더 이상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요.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더 지극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저 골고다의 십자가의 순간은 우주 역사상 삼위일체가 깨어지는 유일한 한 순간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주를 만들어 놓고 뒷짐 지고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간섭하십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화를 내고 매로 때리시고, 때로는 질투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에 눈 먼 분이십니다. 사랑에 눈멀었기에 하나님 보좌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에 눈 먼 목자는 99마리는 안중에 없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을 살리고 우주 생명을 살리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세상 인간들은 모두 사랑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별은 만남보다 참 쉬운 건 가봐 차갑기만 한 사람 / 내 맘 다가져간 걸 왜 알지 못하나 보고 싶은 그 사람 / 사랑했나 봐 잊을 수 없나 봐 /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윤도현의 “사랑했나 봐”입니다. 유행가의 90% 이상이 아마 사랑과 관련된 노래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사랑’일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사랑을 필요로 하며 또 얼마나 사랑에 굶주려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홍수 때에 먹을 물이 없다고 우리의 형편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매 주일 마다, 매 예배 때마다 이 사랑을 확인해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중표 목사님은 목회자를 영적인 어머니로 표현했습니다. 영적인 양식을 먹는 곳이 교회요, 그 꼴을 주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영적으로 배곯고 있다면 그것은 목자의 책임입니다.

어린 아이는 많이 사랑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자가 사랑을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사랑을 마음껏 부어주십니다. 원죄와 자범죄, 구조적인 죄와 무기력으로 왜소하고 무기력해진 영혼은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인생은 책망해봤자 기가 죽거나 화나면 반발해 버립니다. 죄와 무기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사랑의 빛이 많이 쪼이면 쪼일수록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해주시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이오여!

저는 한신 교회에 있으면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성도님들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목자가 꼴을 주어야 하는데 어린 목자라서 오히려 양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이젠 어린 목자에서 젊은 목자로 성장한 이상 제 피를 팔아서라도 양을 먹이는 것이 앞으로의 제 사역이 될 것입니다.

저는 94년도에 한신 교회에 평신도로 왔습니다. 그리고 96년부터 신학을 시작했고, 97년 말부터 목회를 했으니 만 7년 정도 됩니다. 목회의 유아기 7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여러분이 주신 사랑이 제 평생 목회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신 교회는 저에게 요람 같은 곳이고, 성도 여러분들은 저에게 유모 같은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했던 이중표 목사님은 저에게 스승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만든 걸작품(나)을 보고 계십니다. 이 설교도 여러분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목소리가 빠르다’ ‘발음이 분명치 못하다’ ‘자신감이 없다’는 등 성도 여러분의 사랑의 격려와 채찍 속에서 제 설교는 자랐습니다. 전도할 줄 모르던 저를 전도 현장으로 몰아가신 것도 여러분입니다. 그곳에서 복음의 확신과 열정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저에게 교회를 사랑하는 법과 성도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더 큰 것은 제 마음 속에 심어준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고 살리는 목자의 열정을 심어주셨습니다. 거룩한 야망 혹은 영적 야망이라 할까 저는 큰 목회의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해서 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하면 영적 게으름의 핑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주신 인생인데 풀가동 시켜 보지도 않고 주님 앞에 선다면 죄송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큰 것에만 관심을 두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 자기 인생을 최대한도록 가동시키는 것은 인생의 마땅한 의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받은 것이 오천 명의 목회의 비전입니다. 저를 위해서 5천명을 먹이는 목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목사님 마지막 병간호 하면서 저는 엘리사처럼 기도했습니다. 목사님의 병든 발을 붙잡고 “이중표 목사님의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저에게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사가 요단강 가에서 마지막 승천을 앞둔 엘리야에게 “당신의 영감의 갑절이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왕하2:9) 부르짖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비전 때문에 계속 성장할 것입니다. 몇 년 후에는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위대한 종으로 변화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장로님, 그리고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께서 이 생명의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한신 교회는 영원한 영적 고향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곳에서 제가 받은 사랑을 전할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요한이 가장 주기 원하는 것은 영혼의 잘됨입니다. 지금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라는 세 가지 축복이 있지만 그 중 제일은 영혼의 잘 됨입니다. 말씀도 그렇습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처럼 범사도 잘되고 강건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영혼과 육신중 우리는 육신의 일에 신경 쓰다 정작 중요한 영혼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건강은 마치 종교처럼 되었습니다. 헬스 클럽이나 한강가로 가면 운동하는 사람 천지입니다. 운동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육신의 건강에 신경 쓰는 만큼의 10분의 1만 영혼의 건강에 신경 쓴다면 정말 행복한 삶, 제대로 된 삶을 살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영혼이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먼저는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생명은 태어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풍성한 생명으로 자라야 합니다. 이것이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가끔 고난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는 나약합니다. 비바람 맞은 잡초가 강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잡초처럼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는 강한 생명으로 자라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를 코너로 몰아가시기도 하고, 우리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시기도 합니다.

육신의 관점에서 보면 박탈이요 실패지만 영혼의 관점에서는 축복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교만하고 자기만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질병이 들었습니다. 질병에 걸린 결과 인생의 무기력과 허무함을 깨닫고 겸손하고 사랑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병에 걸린 것입니까 아니면 고침을 받은 것입니까?

육신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영혼의 잘됨을 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아플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잘되기 때문입니다. 가족도 외면하고 일에만 매달려 살던 사람이 병이 걸리고 나면 정말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병을 통해서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 땅에 내려 보내면서 과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이 풍성한 생명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 관점에서 보십시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물질적 축복은 어떤 때는 축복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이 다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과 실패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성장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성공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탔던 솔제니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통에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우리가 늘 그렇게 생각해왔듯이 성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성장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충분하게 사랑했는지 물어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이웃을 사랑했느냐’, ‘네 자신을 충분히 사랑했느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린도전서 9:27에서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많이 하고, 봉사는 많이 하고, 교회를 많이 세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 일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병약한 성도나 가난한 성도가 있는 것은 우리들의 복입니다. 우리로 사랑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사랑을 주고받을 때 풍성해집니다.

우울증이라는 병도 그래요. 우울증이 왜 오느냐?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생명을 바라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우리에게서 소중한 것이 박탈되어 가는 아픔 속에서 우리는 먼지와 진흙으로 가리워졌던 내면의 생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풍성한 생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로 왜곡되고 연약해진 자신의 본질을 보게 하십니다. 그 동안에는 너무 아파서 사람으로, 환경으로, 일로 외면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그 생명의 본질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끔은 우리의 소중한 것을 앗아가십니다. 그게 사람일 수도, 건강일 수도, 또는 편안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의도는 우리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제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광야로 몰아가십니다. 제가 선택한 광야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제가 광야를 선택하도록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정든 곳과 정든 사람을 떠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성도님들은 저를 정말 많이 사랑해주셨습니다.

이별이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차라리 정이나 주지 말 것을...(무슨 유행가 가사 같군요...) 결단은 오래 전에 하고도 차마 말을 못했습니다. 말을 하려다가도 다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곤 했습니다. ‘왜 떠나느냐?’ ‘어디로 가느냐?’ 일일이 답변을 하고 나면 모든 기운이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병으로, 생활의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성도님들을 그대로 두고 가는 것 같아 너무 죄송했습니다. 이별의 악수를 하는 요 몇 주간은 마치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살은 안 빠져요. 이 기회에 살 좀 빼 보려했는데....

그렇지만 광야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광야로 몰아가십니다. 육신적으로는 섭섭하지만 영적으로 판단하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광야는 육신적으로는 힘든 곳이지만 영적으로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우리 영혼이 잘 되도록 만드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만큼 확실하게 하나님의 기적과 임재를 체험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 그리고 저에게는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렇게 떠나가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성도님들께는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좋은 곳으로 시집 보내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고 순종할 때 주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더 좋은 만남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잘되어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범사가 형통하여 모두 부요하고 윤택한 인생들 되시길 바랍니다. 모두 건강하여 하나님의 분복을 누리는 평안한 인생들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종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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